수유칼럼

앞으로의 원전사태에 관해서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 가게모토 츠요시

한국에서 일본사람을 하면서 자주 원전에 관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일본인은 원전에 대해 잘 알거나, 무언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나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반원전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의 원전 사태에 대해 일본에 사는 사람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반원전 운동을 하는 친구들한테 많은 지식이나 사고방식을 배웠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한국에서의 반원전 미디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논의하면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는, 그러나 아주 중요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논의에 대해서이다.

우선 말해야할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우리가 살아 있을 시간적인 범위 안에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후, 처음 비가 왔을 때에 학교를 휴교로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때라 전전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도 역시 말해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원전 사태는 끝나지 않는다. 계속 방사능이 방출이 되며, 그리고 피폭자들의 피해도 전전 늘어날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피폭 피해는 지금부터 가시화될 것이며, 가시화됨에 따라 피해지역에서 비난할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쓰나미 피해지역은 부흥을 하게 되면서 동시에 후쿠시마에서는 이제 와서 피해가 가시화된다는 것이다. ‘부흥’이라는 아름답고 너무나 올바른 말들이 가리는 것이야말로 방사능 피해이다. 부흥을 하기 위해 피해지역의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담론도 일본의 주류 미디어에서는 활발하다. ‘풍평피해’라는 말도 자주 이야기된다. 그 의미는 ‘후쿠시마는 무섭다’는 ‘근거없는’ 평이 있기 때문에 안전한 농산물을 만든 농민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피해지역의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이 논의는 정치인이나 미디어에서 담론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원전 운동 안에서도 논의될 경우가 있다. 특히 반원정파의 유명한 방사능학자가 먹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 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농산물은 ‘풍평’이 아니라 ‘실재’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염되지 않는 농산물도 있겠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하나하나를 검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이 원전사태에서 알게 된 것은 방사능은 정말 변덕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원전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방사능의 움직임에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먹었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배설을 하게 된다. 오염된 것을 먹는다는 것은 오염된 배설물을 배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하수도 노동자들도 피폭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먹지 않는다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피해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의 부흥을 돕기 위해 그 지역의 농산물을 먹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올바르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지역의 농산물을 먹자는 논의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말해야한다. ‘나는 늙었으니까’, ‘나 따위 죽어도 되니까’라든가 하는 이유로 피해지역의 농산물을 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배설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피폭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 영웅주의적인 희생자정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 있으니까 이러한 논의를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측면 역시 봐야 한다. 일본, 특히 동 일본(도쿄를 포함)에서 내가 말한 것과 같은 논의는 매우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피폭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 있으며, 스스로의 입장을 피폭 상태라고 인정하며, 신경을 쓰면서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가지면 사회에서 이상한 사람으로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일본에서 가끔 친구가 올 때마다 이야기를 하지만 일본에서는 수돗물도 먹기 어렵고 슈퍼에 가도 생산지를 매번 확인해야하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의견에도 일리가 있게 된다. 마치 방사능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것 같이 논의될 경우가 있는 이유는, 이러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꿔 말하면 방사능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어야, 겨우 일본사회에서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다. 이미 일본 사회에서 편하게 살려면 피폭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특히 가족에서 발언권이 약한 여성은 도망가고 싶어도 참고 있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아이에 무순 피해가 나면 여성이 그 아이를 봐야 한다. 아이의 활력이 없어지면, 여성에 대해 ‘니가 잘못 기웠기 때문’ 따위의 공격이 일어날 것이 확실하게 눈에 보인다. 방사능 피해를 가장 민감하게 받는 인간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아이를 걱정해서 도망가고 싶어 하는 어머니들도 많다(실제로 도망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실제 도망갔던 사람들 배경에는 그 10배 이상의 도망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사능을 걱정하면 할수록 살기 어려운 일본사회아다. 지금 일본에서는 원전에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다. 그런 속에서도 아마 한국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지만, 야부 시로(矢部史郎, 1971-)1라는 사상가의 책에서는 정말 중요한 작업이 수행되어 있으며, 우리가 생각해야할, 혹은 운동해야할 지평을 알려준다. 야부는 이러한 ‘어머니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그녀들은 남성사회나 기업사회의 자(measure)에서 미리 배제된 존재이며, 처음부터 자 밖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이 피난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의 정당성이 나중에 증명이 되어도, 누구한테도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없으며, 누구한테도 사죄를 받지 못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게다가 자가 보지 못했던 일들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태의 뒷정리를 하게 되는 것이 자기들이라는 것도 역시 알고 있다. 슈퍼에서 식품을 검증하는 것, 그리고 상태가 좋지 않는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다 주는 것 등등, 결국에 그녀들은 자기들이 뒷정리해야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2

공해 사건에서 뒷정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생활이며, 가사이며, 부모이며, 여성입니다. (중략) 지진 쓰레기 처리나 학교 급식의 문제를 열심히 하는 주부들에 대해 모성이데올로기라든가 해서 비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너무나 틀린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이들이 피폭의 위험 안에 있다는 것을 걱정하는 자는 어머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모성주의 이데올로기입니다.3

야부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방사능에 관심을 가지는 여성들을 ‘히스테리’라고 표상하는 일본사회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지만, 더욱 그러한 여성들의 운동이야말로 가장 믿음직하다는 것이다. 이미 동경대학교나 동경공업대학교 같은 데에 있는 교수들의 말은 물론, 아시히나 요미우리신문같은 미디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아마추아이면서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시민들이 스스로 방사능을 측정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시민들의 활동과 데이터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국가 혹은 미디어를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에 대해 ‘후쿠시마 차별’이라고 하면서 전문가주의에 빠진 것이 일본의 언론이다.

여기에서 생각을 해야하는 것이 더 하나 있다. 즉 ‘후쿠시마 차별’이라는 문맥이다. 후쿠시마를 비롯해, 일본 동북지방은 일본의 근대사 속에서 차별을 받아왔다(이 차별의 자세한 실태에 대해서는 여기서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도쿄의 전기를 후쿠사마에서 만들어야한다는 것 자체가 차별구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후쿠시마의 위험한 물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인 것 같이 담론화되어 있다. 지금 고생하는 후쿠시마의 농산물을 먹자는 표어는 ‘부흥’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에서 이야기되면서 동시에 ‘후쿠시마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라는 함의도 거기에는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후쿠시마의 아이를 피난시키지 않으면서 마치 방사능 실험과 같이 후쿠시마에서 살게 만들고 있는 상황자체가 더욱 심한 차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야부 사로는 이에 대해 ‘사회적 피폭’라고 말한다4), 부흥이데올로기 안에는 후쿠시마, 혹은 동북지방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자는 함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운동 안에서도 있는 논리이기 때문에 더욱 경계를 해야 한다.

이것저것 쓰고 싶은데 나의 태만 때문에 부족이 많은 글이 되었다. 그러나 야부 시로의 논의를 다소나마 소개할 수 있었기에 의의는 있다고 생각한다. 야부의 논의는 욕을 많이 먹을 수 있는 논의이다. 그렇게 할 만큼, 자극적이며 논의의 바탕을 제공해준다. 야부의 논고에서는, 311과 312를 확실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 된다. 왜냐하면, 원전이 터진 것을 지진과 같은 천재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재라고 확실하게 말해야한다. 즉, 원전사고는 지진이 있었기에 발상한 것이 아니다. 즉, 지진과 상관없게 보이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사고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진과 원전을 연결시켜서 사고를 하면 안된다. 그러하기 위한 사고를 하기 위해 원전이 터진 ‘312’에 고집해야한다. 또는 야부의 논의에서는 원전노동자들의 파업가능성, 근대과학의 부정과 마술적인 것의 상승, 방사능 측정의 방법 등등 다양한 논의를 제공해준다. 부디 누군가 야부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주면 좋겠다. 두 권 있는데 얇은 책이다. 일본에서는 수많은 원전관련서적이 출판되었으며, 유명한 좌익학자들도 그러한 책을 내고 있다. 그러한 책들 속에서도 야부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지만 너무나 중요한 논의를 과감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볼 필요가 있다.

그림 :: 312의 사상

그림 :: 방사능을 먹어라고 한다면 그런 사회는 필요없다. 제로 베크렐 선언

앞으로 방사능 피해는 가시화되어 간다. 사카이 나오키는 원전사태의 책임을 누구도 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치지 않았다는 것과 겹쳐 논의한 바 있다.5 앞으로 이 재해의 책임을 따져야 할 것이며, 모든 원전을 정지시켜야 하며, 동시에 정지시킨 원전을 냉각하기 위해 수 천 년 단위로 관리해야 한다. 싸워야 할 일이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다.

  1. 검색을 해보니 <녹색평론>120호(2011)에서 야부의 논고가 번역되었다. []
  2. 矢部史郎, 『3.12の思想』, 도쿄:以文社, 2012, 44쪽. 번역은 인용자, 앞뒤의 문맥을 인용자가 보충했다. []
  3. 矢部史郎, 『放射能を食えというならそんな社会はいらない、ゼロベクレル派宣言』, 도쿄:新評論, 2012, 20쪽 []
  4. 矢部史郎, 『放射能を食えというならそんな社会はいらない、ゼロベクレル派宣言』, 도쿄:新評論, 2012, 37쪽 []
  5. 酒井直樹, 「無責任の体制・三たび」『現代思想』, 2011년5월호, 도쿄:青土社 []

응답 1개

  1. 수플어름말하길

    저는 방사선과 관련된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방금도 고농도의 방사능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실험을 끝내고 한숨 돌리다가 우연히 좋은 글을 읽게 되어서 인사드립니다.

    ‘영웅주의적 희생자정신’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됩니다. 실제 위험한 것에서 도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 아름다워보이는 그러한 모습들이 도리어 감동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으로 자진해 뛰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적으로 선생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한편으로는 ‘방사능을 먹이는 그런 사회는 필요없다’는 문구에서 많은 고민이 됩니다.
    원전같이 무시무시한 것까진 아니지만 실제로 제가 하는(하게 될) 일이 사람들에게 방사능을 먹이는 꼴이 되기도 하고요.
    제가 공부하는 분야가 방사능이 안전하거나 유익하다는 증거나 원리로 삼아질까 걱정도 됩니다.
    자발적으로 방사능 피해지역의 농산물을 먹겠다고 선언한 방사능학자와 같은 꼴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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