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1)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0. 경험의 조직 원리 찾기

인간이 외부 환경을 지각하는데 제일 많이 사용하는 감각기관이 뭐겠니? 눈. 그래, 눈이지. 그럼, 눈만 뜨면 무엇이든 다 보일까? 그럼요. 아니야. 눈을 떴어도 안 보여서 못 보는 것들이 더 많아. 그게 뭔데? 이를테면 눈썰매를 열대지방 사람들에게 가져다 보여주면 눈썰매가 보일까? 보이죠. 아니야. 그 형체는 보아도 그게 뭔지는 몰라. 내가 지금 사용하는 ‘보인다’는 말은 시각이 아니라 ‘알아본다’는 뜻이니까 지각을 가리켜. 열대지방 사람들에게는 눈썰매의 본질이 안 보이니까 못 볼 수밖에. 그러나 극지방 사람들은 그 형체를 보자마자 ‘이것은 썰매다’라며 알아봐.

그야, 극지방 사람들은 눈썰매를 경험했기 때문이죠. 바로 그거야. 그들의 경험체계 속에는 여러 종류의 눈썰매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다른 부분은 다 잊어버리고 공통된 이미지와 재료와 용도 등만 간추려서 기억하고 있어. 그게 바로 개념이야. 그래서 그들은 그 형체를 보자마자 그 형체를 자신이 경험체계 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 즉 해석틀에 대입하여 일치함을 확인하고 즉시 눈썰매를 알아봤어. 그러나 열대 지방 사람들의 경험체계 속에는 썰매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나 이론 등의 해석 틀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형체를 해석하여 참모습 즉 본질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 수학의 해석 문제를 풀이할 때도 관련 공식 즉 해석의 틀을 알아야 그 틀에 맞추어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네. 너 말 잘했다. 경험체계가 곧 해석체계이기 때문에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야. 우리가 영문을 해석하려고 모르는 영어 단어의 뜻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고 또 관련 문법들을 영어 문법책에서 찾아보잖아. 우리가 해석하려는 그 문장이 한국어였다면 그 문장 속에 있는 단어들의 개념이나 문장의 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문법 지식이 내 경험체계 안에 들어있으므로 굳이 밖에서 찾아보지 않아도 그 문장을 해석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경험체계는 사물이나 상징을 해석할 수 있는, 그리고 해석해주는 체계야.

거꾸로 우리말 문장을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필요할 때 즉시 검색하여 문자의 상징 의미를 해석할 수 있도록 우리의 경험체계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개념체계 즉 국어사전과 우리가 아는 문법지식들로 이루어진 문법책이 들어있었다는 뜻이야. 그런데 경험체계 속에 있는 국어사전은 한글 자모 순서가 아닌 마인드맵과 같은 엉성한 의미체계, 개념체계일 거야. 그리고 경험체계 속의 문법책도 엉성한 문법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실제와 같이 정확하지는 못할 거야. 그러나 우리는 감각으로 받아들인 이미지나 언어 상징들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개념이나 지식이나 이론이라는 해석틀에 대입하여 해석하므로 경험체계는 의미체계 또는 개념체계이면서 해석체계이고 인식체계임을 알 수가 있어.

그러면 경험체계가 해석체계나 인식체계가 되어 사물의 본질을 알아보게 한다는 뜻에서 우리의 눈이나 안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네. 그렇고말고. 시각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해석체계, 인식체계에 비추어 보면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는 뜻에서 마음의 눈 또는 마음의 안경이라 할 수 있지. 인간은 알고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경험에 비추어서 조금씩 알아가잖아. 알아가려면 먼저 얻은 경험들에 비추어 보아야지. 그런데 좀 더 잘 비추어 보이게 하려고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경험들을 이치에 따라 또는 관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조직하게 되지.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조직한 경험체계로 만든 안경을 쓰지 않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인식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능력이란다.

그런데 누구나 그 자신이 만든 안경의 굴절 때문에 사물이 크게 또는 작게 또는 찌그러지게 보이게 마련이야. 그리고 또 색깔 때문에 붉게 보이거나 푸르게 보이거나 칙칙하게 보이게 마련이고. 인간의 경험의 한계 때문에 완전한 경험체계로 렌즈를 만든 안경은 있을 수 없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진선미에 대한 경험으로 안경의 렌즈를 끝없이 갈고 닦아 굴절과 색깔을 줄여가는 것 즉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줄여가는 수밖에 없어. 마치 안경을 쓰지 않고 보는 것처럼 사물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경을 만들어 가는 것, 즉 경험체계를 확충하고 또 보다 잘 정리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핵심 화제야. 그래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럼, 경험을 어떻게 조직해야 잘 보이는 안경이 될 수 있어? 그걸 알려면 인간의 뇌가 경험을 어떻게 조직하고 있는지 조직의 원리를 알아야 돼. 그 원리를 따라야 더 잘 조직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현대 뇌과학은 경험의 조직 원리를 찾지 못해서 우리의 과제를 풀어 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가 없구나. 그래도 하버지는 경험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그 많은 양의 정보가 쉽고 빠르게 검색되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뒷받침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싶었어. 그 조직 원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에 맞는 수행의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진선미의 경험가능성을 더 많이 성취하여 우리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까.

마치 자유롭게 연상한 마인드맵처럼 신경 세포 사이를 시냅스들이 연결하고 있다는 것은 밝혀진 사실이야. 현대 뇌과학은 이 연결이 어떻게 어디까지 연결되었는지는 밝혀내고 있지만 그러나 신경세포들의 연결이 경험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저장하고 또 검색하게 하는지는 밝히지 못했어. 그래서 하버지는 두 가지 방식의 관계 맺기의 개념을 경험체계의 조직 원리로 적용해보는 실험적인 사고를 하고 싶어진 거야.

사물들이 관계를 맺는 데는 두 가지 형태가 있대. 그것은 수목(樹木) 형태와 리좀(지하경:地下莖) 형태래. 수목 형태는 대나무가 뿌리줄기에서 싹이 터서 지상부인 가지줄기가 뻗어가는 형태의 관계 맺기래. 리좀 형태는 거꾸로 대나무의 지하부인 뿌리줄기가 하나의 그물같이 잔뿌리들이 얽히는 관계 맺기이고. ‘리좀’이라는 말은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et Felix Guattari)가 그들의 공저 『천의 고원(Mille Plateaux)』(1980)이란 책에서 ‘수목형'(樹木型)과 대비적으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어.

그렇군요. 두 관계 맺기 방식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 줘요. 수목 형태의 관계 맺기 예로는 생물의 계통 분류와 같은 방식이야. 또는 한국어 음운 체계도 같은 방식이야. 한국어에는 자음과 모음이 있고, 자음에는 무성자음과 유성자음이 있고 유성자음에는 ㄴ, ㄹ, ㅁ, ㅇ이 있다는 가지치기 방식의 관계 맺기 방식이지. 그리고 리좀 형태의 관계 맺기는 대나무의 뿌리줄기와 같은 형태야. 지상부의 대나무는 수목형 가지줄기를 뻗어가지만 지하부의 뿌리줄기는 잔뿌리끼리 이어져서 하나의 그물처럼 연결되는 것이 리좀 형태의 관계 맺기래.

만약에 맨처음 대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숲을 이룬 뒤에 여기저기에 독립된 대나무가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숲 전체가 하나의 뿌리줄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심은 지 60년쯤 지나면 커다란 대나무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한꺼번에 숲 전체의 대나무가 다 죽어 버린다는 거야. 죽든지 살든지 모든 대나무는 하나의 뿌리를 가진 공동운명체였던 거야.

그러면 두 관계 맺기 방식이 아무 관계가 없는 전혀 다른 거야? 이 두 가지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조건(또는 규정)이 많을수록 수직적인 관계 즉 위계적인 관계를 맺게 되어 수목형이 되고, 조건이 적으면 수평적인 관계 즉 평등한 관계를 맺게 되어 리좀형이 된대. 여기서 ‘조건이 적어진다’는 말은 관계 맺기가 ‘자유롭다’는 뜻이어서 관계 가능성은 많아지는 거고, ‘조건이 많아진다’는 말은 관계 맺기가 ‘까다롭다’ 뜻이어서 관계 가능성은 줄어드는 거래. 둘 다 절대적인 관계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조건이 많고 적음에 따라 역방향(逆方向)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상대적인 방식이래. 그래서 서로 관계 맺기의 조건이나 규정들이 많아지거나 적어지면 두 방식도 바뀔 수가 있대.

그렇다면 인간의 경험조직은 둘 중에 어떤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거야. 하버지는 대뇌의 구조로 보아 이 두 방식이 다 경험의 조직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 대뇌의 껍질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어서 껍질부분의 표면적인 넓어진대. 그리고 껍질 즉 피질 부분에는 대개 6층으로 신경세포가 분포되어 있대. 그리고 피질은 네 개의 영역이 커다란 주름으로 구분되는데 크게 창조적이 사고 중추인 전두엽(앞부분), 운동과 감각 중추가 있는 두정엽(꼭대기 부분), 청각 중추인 측두엽(옆 부분), 시각 중추인 후두엽(뒷머리 부분)으로 나뉜대. 거기서 다시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한 더 많은 하위 영역으로 나뉜대. 어쩌면 120억여 개의 세포단위까지 미세하게 서로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을 거야.

대뇌의 모든 부분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한다는 것은 대뇌 조직이 수목형 관계 방식이라는 거네. 그렇지. 여기까지만 보면 기능에 따라 하나의 대뇌에서 네 부위로 구분되고 다시 하위영역으로 구분되는 수목형의 관계 맺기인 듯이 보여. 그러나 하버지는 지금 하나의 대나무 숲을 떠올리고 있어. 땅위에 대나무 한그루마다 독립된 영역이나 분야인 것 같아. 어쩌면 각각의 대나무는 하나의 숲의 디랙토리들 즉 목록들일지도 몰라. 그리고 한 그루의 밑동에서부터 마디마다 가지가 나있고 가지의 마디마다 다시 가지가 나있기를 계속하다가 마지막에 잎이 달리지. 밑동에서 뻗은 굵은 가지들은 대뇌피질의 독립된 어떤 분야나 영역을 가리키는 소제목들일 수도 있고 경험의 특정 분야나 영역의 목록들일 수 있어. 각각의 목록들을 펼치면 거기에는 그 하위 목록이 나오다가 결국은 대나무 잎으로 구체화되듯이 각각 다른 분야나 영역이 전개되겠지. 이것이 수목형의 관계 맺기야.

대나무 한그루의 가지줄기만 보면 대전제인 밑동이 있고 그 대전제에 딸린 결론으로 가지가 있어. 이렇게 한 가지에 여러 가지가 연속적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연역법적인 전개 방식으로 생물의 계통 분류도 이런 방식이야. 그래서 만약에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가려면 이 가지와 저 가지의 접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돼. 관계 맺기가 계통경로이기 때문이고 디렉토리 구조이기 때문이고 바이너리(binary: 2원체, 2항 대립, 2개의, 2진법의) 방식이기 때문이래. 검색엔진으로 보면 ‘야후 Yahoo’ 검색 방식도 수목형의 연역적인 전개 방식이라 계통경로를 따른대. 웹 게시판도 그렇고.

그러면 대뇌의 구조나 경험의 조직에 리좀형은 없어? 당연히 있지. 가지줄기와는 달리 대나무의 뿌리죽기는 숲 전체가 하나의 그물 조직을 가지는 리좀형 관계 맺기야. 마찬가지로 대뇌의 신경세포의 연결도 리좀형 관계 맺기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회백색으로 보이는 대뇌피질 안쪽에는 대뇌피질의 신경세포에서 나온 신경섬유(축색돌기) 다발들로 이루어진 대뇌수질이 있어서 흰색을 띤대. 이 신경섬유들은 같은 부위의 대뇌피질로 가는 것들끼리는 모여서 다발을 이루면서 여러 영역으로 연결된대.

그리고 대뇌수질 안쪽 깊숙한 곳에는 몇 개의 신경 세포 덩어리의 집단이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 기저핵 또는 대뇌핵이라 한대. 기저핵들은 신경세포들이 모여 있는 회백질 덩어리로 대뇌피질의 여러 중추의 신경세포와 와 척수이하 말단 신경세포까지를 연결하며 감각 수용과 운동 명령 등을 중계한대. 이것이 종적인 연결이라면 대뇌 세포들끼리의 가장 큰 횡적인 연결 통로는 널빤지 모양의 뇌량이래. 뇌량이라는 대뇌 수질은 좌우 두 대뇌반구(大腦半球)가 서로 신호를 전달하여 상호작용을 하도록 양쪽 뇌의 신경세포들을 연결한대.

지금 하버지가 왜 지금 신경세포들끼리의 연결을 말씀하시는 거야. 아, 그건 길이 길로 이어져 결국 모든 길이 하나로 통하듯이 대뇌와 온몸의 신경세포는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 통한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왜 그 얘길 하고 싶어? 그래야 신호를 전달하여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유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지. 세포 단위에서부터 생명체의 모든 기관이 서로를 위하여 상호 작용을 하는 하나의 전체야. 그래서 신경세포는 작게는 세포에서부터 크게는 모든 기관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을 하도록 직간접적으로 그리고 상하전후좌우로 그물처럼 연결하여 하나의 전체로 통합시켜주는 그 무엇이라는 말이고.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신경세포가 리좀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잖아. 수목형의 연결로도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있지. 이를테면 야구공이 날라와 유리창이 깨져서 이를 치워야 되는 상황이라고 하자. 먼저 유리창이 깨졌다는 상황을 판단하려면 시각이 시각중추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할 거야. 전두엽이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판단하고 유리조각들을 치워야 한다고 판단하면 운동연합과 함께 어떤 동작들로 이를 치울 것인지 계획을 세우고 이 계획을 소뇌로 보내면 소뇌는 양손의 해당 근육을 움직여 유리를 치울 거야. 이 과정에서 말단의 감각(시각)세포가 계통경로로 대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두 손의 근육이 신경세포로 명령을 받아서 상호 작용을 할 거야. 이와 같이 감각신경이 보고를 하고 중추신경계의 명령을 전달받아 근육이 움직였다면 이는 계통경로에 따른 수목형 연결이고 관계야.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시각 중추나 사고 중추나 운동 중추 등에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상호작용을 했는데 이는 연동경로를 따른 리좀형 연결을 하고 관계를 맺은 거야. 다른 예로 불에 손을 덴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 상황을 판단하고 운동 계획을 세우기 위해 대뇌까지 계통경로로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오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걸려서 그동안 상처는 커질 거야. 그래서 척수에 있는 신경세포들에 기록된 무조건 반사 방식에 따라 얼른 손을 뗐어. 이 과정은 완전한 계통경로도 연동경로도 아니고 둘 다라는 거야. 그러나 이와 같이 중추신경계를 거치지 않고 연결되는 연동경로를 전제한다면 마치 땅밑의 대나무의 모든 뿌리줄기가 모든 대나무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경세포는 하나로 연결된 리좀형 관계 맺기를 하고 있음을 보여줘.

그러면 연동경로를 따른 리좀형 관계 맺기가 유리하거나 반드시 필요한 이유라도 있어? 검색이나 지령의 속도를 생각할 때 연동경로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하버지 생각이야. 대나무의 뿌리줄기는 전체가 하나의 그물 조직이래. 대등한 횡적 구조가 하나의 지상부를 떠받치고 있다면 귀납적인 구조이고 리좀형 관계 맺기지. 그래서 이 뿌리에서 저 뿌리로 가려면 분리 직전의 접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대. 대나무 뿌리줄기는 종적인 구조가 아니라 횡적인 구조이므로 잔뿌리에서 잔뿌리로 수많은 ‘연동경로(聯動經路)’를 따라 이동이 가능하대. 검색엔진으로 보면 ‘구글’이래. 웹으로 보면 ‘페이스북 (Face Book)’ 구조래.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대. 그래서 검색 속도로는 ‘야후’가 ‘구글’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거야.

검색과 명령 전달의 속도 때문에 경험의 리좀형 조직이 필요하고 그리고 사고의 합리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합리적인 관계 방식인 수목형의 경험 조직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요. 우리의 경험 조직의 원리는 두 가지 방식의 관계 맺기가 필요할 것 같아. 네가 내 생각을 인정해주니 반갑다.

한 그루의 대나무는 땅위의 ‘가지줄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연역법’이고 땅밑의 ‘뿌리줄기’가 전개된 방식이 ‘귀납법’이래. 그리고 연역법과 귀납법은 ‘차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근거와 결론 사이의 관계방식이 다르대. 연역법은 상위개념인 전제에서 하위개념을 결론으로 이끌어내는데 귀납법은 하위 개념적인 근거들로부터 상위 개념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지. 만약에 우리의 신경망이 한그루의 대나무와 같다면 우리의 경험도 연역적이고도 귀납적인 전개 방식, 수목형과 리좀형적인 관계 방식, 종적이면서 횡적인 구조, 계통경로와 연동경로로 검색 등의 원리로 조직 되어 있을 거야.

여기서 분명한 것은 수많은 정보를 쉽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도록 우리의 경험이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의 경험이 연동경로로 검색할 수 있는 리좀형 관계 맺기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을 거라고 추리할 수 있어. 동시에 합리적으로 사고하여 새로운 사물을 정확하게 해석할 있도록 조직 되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의 경험도 논리적인 계통경로를 따라 수목형으로 조직되었으리라고 추리할 수 있어. 그러니까 모든 잔뿌리에 다 연동경로가 붙어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경험에 연동경로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닐 거야. 촘촘한 정도에 따라서 어떤 연동경로는 계통경로의 2차 접점에 또는 3차나 4차, 5차 접점의 경험에 붙어 있을 수 있어.

그런데 하버지, 리좀형이나 수목형은 절대적인 관계 방식이 아니랬잖아. 그렇단다. 미로와 같은 연동망을 떠올려 보자. 그물 조직의 ‘미로’ 에서 분명히 ‘지름길’ 즉 연동경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연동경로가 더 이상 ‘미로’가 아니라는 뜻이야. 만약에 그물이 벼리 줄이 없다면 어떻게 그물이 그물노릇을 하겠어.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연동되는 뿌리의 ‘계통 줄기’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연동경로가 열릴 수 있어. 전혀 다른 개체의 계통줄기라면 연동될 수가 없는 거지.

대나무에서 뿌리줄기의 리좀형이 지상부의 가지줄기의 수목형 없이 리좀형만이면 그건 살아있는 리좀이 될 수가 없어. 반대로 지상부의 수목형이 지하부의 리좀형 없이 수목만으로는 살아있는 수목형일 수가 없어. 마찬가지로 연역이 연역만이면 그것은 연역이 아닌 것이고 귀납이 귀납만이면 그것도 귀납이 아닌 거야. 대나무의 가지줄기에서 연역과 뿌리줄기에서 귀납은 서로를 전제해야 존재할 수 있어. 아무리 그물조직이라도 벼리를 통하지 않고는 그물을 사용할 수 없어. 리좀형의 뿌리줄기들도 결국은 맨 처음 나온 계통줄기 즉 밑동으로 귀납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경험을 조직하는데도 두 가지 관계 방식과 두 가지 논리가 필요하다는 거야. 처음부터 가지줄기와 뿌리줄기는 한 그루의 대나무의 두 모습이었듯이 따지고 보면 두 관계방식이나 두 논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대. 그렇듯이 우리의 경험 조직의 원리도 둘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의 과정에서 역방향의 모습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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