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문학의 빛2: 행복이라는 빛, 그것의 잔존과 나눔

- 심보선

문학 제도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단독성singularity 신화를 통해 작동하는 문학 제도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자유 의지와 독창성을 발휘하여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개인”에 대한 믿음을 강고히 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성은 제도적 장치에 의해 그 형식과 내용이 마름질된다. 고독한 개인들과 저항하는 공동체의 소멸, 수평적 연결망의 확산, 제도적 행위자들의 우세로 요약되는 현대의 문학 장에서, 이제 자율적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 자율적 개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은 명성이라는 선망의 빛이다. 이 빛의 영향력 아래에서 현대의 예술가들이 가장 오르고 싶은 지위는 “popular avant-garde”이다. 파퓰러 아방가르드란 대중성과 전위성, 명성과 개성, 성취와 자유를 양손에 동시에 거머쥔 승자의 이름이다.

이쯤에서 나는 얼마 전 시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눈 대화 한 자락을 소개하고 싶다. 한 시인은 요새 시인들이 온라인 서점에서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보여주는 세일즈 포인트의 등락에 온통 신경을 기울인다며, 심지어 시인들이 모이면 “오, 세일즈 포인트 많이 올랐던데!”를 칭찬처럼 주고받는다며 한탄조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다른 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세일즈 포인트 누구나 다 보는 거 아닌가? 나도 가끔 보는데……” 그러자 한탄 하던 시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혼자 보고 마는 거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는 다르지!” 나는 생각했다. 그래, 누구나 선망의 빛을 원한다. 이제 차이란 게 있다면, 그 선망의 빛을 원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 원하느냐, 원하지 않는 척 하면서 원하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숭배의 빛이 선망의 빛으로 대체됐을 때, 문학 장에서도 승자독식의 논리가 득세하게 된다. 과거에 숭배의 빛은 승패의 논리와 긴밀히 결합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예를 들어 사무엘 베케트는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일갈했다. 문학은 소위 “패이승(losers win)”의 논리를 따라 패배자들에게도 숭배의 빛을 던져주었다. 가난한 시인, 은둔자, 예언자, 보헤미안,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라는 패배자들의 영웅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패배자는 패배자일 뿐이다. 그들은 소수의 승자-그러나 자신과 너무나 가까운-를 둘러싼 선망의 빛을 어둠 속에서 주시하며 언젠가 저 빛 속으로 진입하리라 절치부심 마음을 다잡다가도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한없는 열패감에 빠진다.

나는 시인과 소설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문학 장은 더욱 공급 과잉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1% 소수의 승자만이 선망의 빛을 누릴 것이다. 이 소수의 승자 집단의 99% 또한 상품 유행의 흐름에 따라 한 때의 명성을 누린 후에, 광막한 어둠 속으로 쓸쓸히 퇴장할 것이다. 결국 극소수만이 후광효과-되는 사람은 뭘 해도 되는-를 누리며 지속적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공급 과잉은 기성 집단과 신예 집단 사이의 충돌을 예술 운동이라는 형식을 빌어 격발시키는 구조적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공급 과잉은 네트워크 수준에서는 모두와 연결됐지만 실존적 수준에서는 모두와 분리된 불안한 신참들을 문학 장 내부에 넘치게 하는 구조적 조건일 뿐이다.

누군가는 지금까지의 내 말을 듣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언급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문학 장에서의 근본적 불평등은 구조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재능의 불평등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단지 과거에는 재능의 부족을 보완하는 상징적, 경제적, 관계적 기제가 존재했을 뿐이고 지금은 그런 보호 장치들이 없을 뿐이다.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불행했다. 지금은 단지 더 불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되묻고 싶다. 재능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모든 문제를 무릅쓰고서라도 창작에 매달리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사회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승자독식의 논리가 문학 장에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재능을 판단해보건대 성공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 말은 아프게 들리겠지만 사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창작을 그만두지 않는, 혹은 창작을 그만두었다가도 언젠가는 창작으로 돌아오리라 결심하게 하는, 그리고 기어이 돌아오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어리석음인가? 집착인가? 과욕인가?

창작을 하는 모든 이에게, 프로건 아마추어건, 누구에게나 드리우는 빛이 있다. 그것은 숭배의 빛도 선망의 빛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학적-예술적 제작, 즉 창작의 기쁨에서 오는 행복의 빛이다. 이 행복이야말로 창작자가 창작을 멈출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니체는 예술이 창작자에게 “행복의 약속”을 제공한다면서 ‘사심 없음(disinterstedness)’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칸트 미학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예술이 너무나 ‘사심 있는(interested)’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때의 사심이란 위대한 단독자로 숭배를 받고 싶다거나, 대중적 인기를 끌고 싶은 사심이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조각상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살아나 자신과 영원히 살았으면 하고 바랄 때의 간절한 소망 같은 사심이다. 창작의 기쁨은 창작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와 놀고, 싸우고, 씨름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그것에 질서와 형태를 부여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과 마치 연인과도 같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창작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제작은 노동의 제작과는 차이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첫 번째 자질이 ‘목적의식적 노동’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벌이 인간보다 더 정교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벌보다 더 우월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노동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전에 이미 머릿속에 그 무언가에 대한 설계도가 ‘목적의식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적 제작은 노동의 목적의식적 제작과 다른 점이 있다. 예술적 제작에는 사전에 설계도가 없거나, 혹은 있어도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시 작성하고 심지어 지워나가는 과정이 핵심적이다.

창작자에게 사전에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적의식’이 아니라 차라리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말이다. 이때의 좋은 결과란 것도 사실 지극히 막연하다. 창작자는 제작 과정에서 그 간절한 소망을 재료를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의지로 전환시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창작에는 일종의 기적이 일어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창작자의 막연한 그러나 간절한 소망이, 마치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나듯이, 눈앞에서 구현되는 일이다. 창작자는 이 기적 앞에서 “이것을 내가 어떻게 만들었지?”하는 경이로운 기쁨,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창작의 행복은 노동의 제작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에 노동자가 도면에 따라 자동차를 완성했을지라도, 거기에 재료와 노동과정에 대한 장인적 통제와 자주적 관리가 개입된다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최종 결과에 낯선 경이로움을 느낀다면 그때 노동은 창작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누구나 글을 쓴다면, 등단하지 않더라도 시인이요, 소설가다”라는 나이브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이란 창작자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최선의 결과를 낳으려는 간절한 소망에서 출발하며 그 소망을 이루려는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중단 없이 이어진다. 나에게 문학적 재능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그 소망과 의지를 끝내 행복에 다다르게 하는 집중력과 주의력을 뜻한다. 그토록 쉼 없는 집중력과 주의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창작의 행복은 달성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창작의 행복을 달성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창작의 행복은 지배적 사회질서를 따라 노동력과 자원을 분배하고 작동시키는 제도적 장치들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자크 랑시에르를 따르자면 창작의 행복은 제도적인 장치들이 사회적 신체들에게 할당한 감각의 고정된 자리를 거스르고 가로지르며, 그것과 싸우며 성취되는 것이다. 요컨대 창작의 행복이란 사회적으로 규정된 행복, 즉 ‘그저’ 성공과 안정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며 어렵사리 지켜내는 것이다.

나는 문학 창작의 행복이 창작자 자신이 혼자서 느끼고 마는 자족적인 행복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창작자는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창작자는 자신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으로 ‘나누어지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인정(recognition) 욕망이다. 그런데, 현재의 예술 장, 혹은 문학 장은 인정 욕망을 소수에게만 선망의 빛을 허락해주는 승인(approval) 장치들을 통해 충족시키려 한다. 상승하는 세일즈 포인트와 문학상 수상, 메이저 신문과 잡지의 언급, 비평가의 심오한 해석 등이 불안한 창작자들을 임시적으로 안심시키고 위로해주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인정이란 무엇보다 ‘다시-알아봄(re-cognition)’이다. 인정이란 창작자가 제작 과정에서 작품에 투여한 열정과 의미를 독자가 다시 알아봐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정은 외적인 척도들에 의해서 작품의 가치가 평가되는 ‘승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승인이 아닌 인정,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집중력과 주의력을 요하는 이 ‘다시-알아봄’의 몸짓, 시선, 끄덕임, 공감으로서의 미소 또는 찡그림이란 우정의 한 양상이다. 조르주 아감벤은 우정이란 “출생, 법, 장소, 취향”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사실, 삶 자체의 나눔, 존재한다는 순수한 사실을 함께-지각함”이라고 말했다. 독자가 창작자의 작품을 다시 알아본다는 것은 독자와 창작자가 함께 작품을 알아본다는 뜻이며 궁극적으로 작품을 통해 표현되고 구현된 삶을 함께 나누어 갖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행복의 빛은 작가와 독자를 동등하게 비추며 서로의 비밀을 알아챈 친구 사이처럼 서로를 연결시켜준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표현을 빌면 문학이 창작자와 독자 모두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의 빛은 가까스로 ‘잔존’한다. 그것은 서치라이트처럼 강력하고 사나운 제도의 빛, 선망의 빛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반딧불의 미광처럼 드문드문 이곳저곳에서 잔존한다. 늦은 밤 반딧불처럼 어렴풋하게 빛나는 이 행복의 미광 아래서 창작자는 온몸으로 글을 쓰고 독자는 먼 곳에서 온 친구의 편지를 읽듯 기대감에 부풀어 책장을 넘긴다. 이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가장 근원적인 장면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영웅도 아니요, 스타도 아니요, 다만 고유한 실존을 지닌 삶의 주인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응답 1개

  1. 미리퐁말하길

    찾았던 책을 만났을때,아는 사람의 글을 읽으때
    기대감과 쓴 이를 헤아려보는 일은 기쁜 일중의 하나인것같아요
    다시-알아봄 하며 살았음 좋겠네요. 참..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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