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YOU ALL ARE WORTH IT

- 육영신


– 젊은 작가 네 명 인터뷰

오래 전부터 온라인상에 떠돌던 사진 한 장이 있다. “미술이 돈이 된다는 걸 보여주겠다.” 홍대 어느 골목 담벼락에 누군가가 써놓았다는 글귀를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곧 저 노란 담벼락 너머에 있을 미대생의 모습을 상상했다. 독한 물감냄새로 찌든 눅눅하고 어두컴컴한 작업실과 그 안에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일토록 그림에 열중하는 한 젊고 재능 있는 화가의 모습을! 그는 문득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내 갈길 가겠노라’며 다짐하고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에 솟구치는 눈물방울들로 얼굴을 적셨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밖으로 뛰쳐나와, 온 힘을 다해 저 글귀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나의 상상은 물론 완벽한 허구이다. 하지만 결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100년 전 반 고흐의 암담했던 삶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주변에서 ‘돈’ 때문에 미대진학을 포기한, 혹은 ‘돈’ 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전업 화가를 꿈꾼다는 것은 실로 돈보다는 열정 하나만을 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종종 무시되고 평가절하 되기 일쑤다. 그들 주위에는 명절 때마다 “쟤가 커서 뭐가 되려고.” 걱정하며 혀를 끌끌 차는 친척들은 물론, 그림 한 장만 공짜로 그려달라고 끈질기게 부추기는 얄미운 친구들도 있다. 최근에는 ‘한국형 열정 페이 계산법’이라는 사진 한 장이 온라인상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이는 젊은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시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씁쓸하다.

그럼에도 해마다 국내 미술대학들은 어마어마한 수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리고 그들을 받아줄 준비가 (전혀)되지 않은 사회 현장은 이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서로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며 애써 이들을 외면하고 만다. “예술은 가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문장은 세간을 떠돌며 ‘정말 그런 것처럼’ 믿어지고 왜곡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화가 지망생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비빌 언덕’이 이들 뿐이기에, 그들은 그저 ‘인내’라는 무기로 ‘버티기’를 시도한다. 혹은 말 그대로 산속의 야인처럼 살아간다. 아무런 기약 없이 미술계 주위를 표류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어떤 희망을 품고 화가이기를 꿈꾸고 있을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간 여러 문화경제학자들에 의해 예술가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으며, 국내에서 역시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 각종 대안공간의 마련, 입시제도에의 변화모색, 최근에는 ‘예술인 복지법’의 시행을 앞두기까지 여러 노력의 여정이 있어 왔다. 그러나 예술가들을 도와야 한다는 혹은 예술가들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거대하고 피상적인 담론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낸 제도들이 과연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실질적인 대안이 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여전히 화가들의 삶은 퍽퍽하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 역사 속 궁핍했던 화가들의 이미 박제된 삶만을 안타까워하는 또 한 명의 방관자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생하게 손에 잡히는 이야기들을 들어보기로 했다. 나의 친구들일지도 모를 ‘노란 담벼락 너머’ 네 명의 미대생들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우연한 생각으로 시작된 이 인터뷰는 뜻밖에도 내게 큰 행운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그들의 경험들과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예술가들이 겪는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들이 모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

(왼쪽부터)
이설아 (세종대, 25)
차하린 (상명대, 26)
류희경 (한예종, 27)
은희준 (경기대, 30)

① 첫 번째 키워드 – 미술대학에서 겪은 것들

“미대에서 화가를 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MVP 올스타처럼 손에 꼽을 정도……. 나머지 미대생을 위한 학교차원에서의 대비책은 부족한 편”

▶모두 미대 졸업생들이다. 미대에 입학하기 위한 입시를 모두 겪어보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준비해왔을 ‘미대 입시’의 경험이 본인들 각자에겐 어떠한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이 : 나는 광주가 고향이다. 미대생들 누구나가 그렇듯이 나 또한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막연한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또 스스로 실기를 잘한다고 생각했기에 서양화든 동양화든 어느 전공을 하던지 잘 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준비했다.

류 : 나 또한 여러 기회를 통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미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시켜서 미술을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싫어 오히려 학원교육이나 예중, 예고 등을 피해오다, 결국 입시 준비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대학의 선택은 이것을 평생의 취미로 삼을 건지, 일로서 할지를 고민하게 하였는데, 나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어야 일로서도 더욱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예술학교에 지원 했다.

은 : 나도 어려서부터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한건 고2 겨울에 시작했고, 그 전까지는 막연했다. 그런데 막상 학원에 가보니 합격을 위한 패턴대로 그리는 게 나와는 안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자리 앉아서 그림 그리는 게 답답했다. 그림 그리는 건 좋은데 이런 건 그리기 싫다는 생각이 있었다. 딱히 미대에 가서 뭘 해야겠다는 진지한 고민을 한 적은 없었고 시키는 대로 하는 느낌이었다.

▶(요새는 많이 바뀌었지만) 똑같은 것을 반복하도록 하는 입시제도가 오히려 흥미를 떨어뜨린 면이 있나.

차 : 우리 세대까지가 그랬던 것 같은데……. 특정 학교를 제외하고는 입시 때는 학교 스타일에 맞춰 다 똑같은 걸 그린다. 심지어 학원마다의 특징도 있다. 물론 나는 똑같이 그리는 것 자체를 재밌어 해 답답하다거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패턴화 된 그림그리기가 과연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부분 어려서부터 본인의 미술에 대한 흥미나 재능에 대한 확신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가 나온 소위 ‘주입식’의 입시 제도를 겪고 대학에 입학하니, 혼란스러운 적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대학에서는 그것만으로 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 나는 대학에 오기 전 까지 스스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수업할수록 다른 친구들의 뛰어난 점을 많이 보게 됐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모습들 말이다. ‘저 친구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나는 대체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류 : 다른 학교 입시에 비해, 한예종 입시에 지원 할 때는 나를 보다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또 입학 후에도 다양한 매체를 접해 볼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학교 내외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예술에 대한 태도를 접하는 동안, ‘무엇이 미술인가(혹은 예술인가)’에 대한 혼란이 나에게는 가장 컸다. 경험하고 공부한 것들을 토대로 한 내 나름대로의 예술에 대한 정의, 목표 등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지금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보통 ‘미대’하면 창작 활동, 즉 실기 수업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런데 커리큘럼을 보면 미술사, 미학 등 미술 이론 수업의 비중도 꽤 되는 것 같다. 창작 활동을 하면서 이론 수업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은 : 나는 실기수업에서 보다는 이론수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 화가들에게도 분명히 이론적 베이스가 필요하다고 본다. 경험상 이론적인 공부를 안 할수록 자기 작업에 대한 확신이 센 사람이 많다. 현대에 와서는 ‘모든 것 이 다 예술이 될 수 있다’고들 하는데, 그 강령 하나로 ‘그럼 내가 하는 것도 예술이지’라고 믿는 것이다. 본인 작업에 대해 설명을 해도 결국 그 강령 하나로 돌아 가버린다. 이론을 배우지 않으면 결국 작업구조가 허술해진다.

류 : 전문 예술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실기과목과 함께 이론과목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예술 전공생들로만 이루어진 학교이다 보니 이론분야의 심화 과목이 많지는 않지만, 대신 공통 인문학 수업이나 타 대학의 교류수업을 듣기도 한다. 미술 전공생이라고 해서 누구나 미술사를 통달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작가가 스스로 자기 작업이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이론 수업은 꼭 필요하다.

▶이론 수업이 꼭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렇다면 실기 수업에서는 어떤 수업이 가장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 : 우리 학교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작가를 초청해 그들의 일대기와 작품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렇게 작가를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작가 뿐 아니라 평론가들 등 사회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도움이 된다. 또 이와 별개로 실기는 소수정예로 이루어지는 수업이 좋았다. 일부 강압적인 교수님들은 실기 수업에서 “이 부분의 색깔을 바꿔봐.”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학생은 아무 의견도 없이 그에 맞춰 그리게 된다. 하지만 소수정예의 실기 수업에서는 교수님과 더욱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내 작품에 대한 소통이 가능하고, 그것이 곧 내 작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차 : 나는 서양화, 조소과 복수전공을 했는데, 조소과는 학생 수가 적어 선생님과 친밀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삶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작업하시는 선생님들의 여정을 직접 가까이서 듣기도 하고 좋았다.

류 : 나는 다른 예술 전공생들과 함께 한 수업이 좋았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분야를 가지고 수업을 만들어 와서 수업을 진행하거나 팀 활동을 하곤 했는데,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또 미술원 안에서는, 나도 작가를 직접 만나는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학생들끼리 조별로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작가를 만났다. 이 수업을 통해 카페나 술자리에서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듣기도 하고, 실제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친 후, 해마다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비율상 얼마나 되나.

차 : 우리는 40명이 입학하면 10명은 작업을 하고 싶어 하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5년까지 하는 사람은……. 2명 정도 되려나? 졸업하고 얼마간은 10명 정도가 노력을 하지만 결국엔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은 : 매 졸업시즌마다 작가 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역대 MVP 올스타처럼 손에 꼽아야 할 지경이다. 작가를 안 하면 주로 게임, 컨셉아트, 동화책 일러스트를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것들은 생계와 자기가 작업이라는 두 가지 사이에서 중간 지점으로 선택한 것들이다. 생계를 포기하고 작업 자체만을 해야겠다는 비율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교수님들은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작가가 작업을 해야지.”라고 말씀 하신다. 물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현실적인 연관성은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작가를 하기엔 너무 막막하고, 나중에는 그냥 그만두는 것이다. 주변에서도 “나 작가 할 거야.”하면 “쟤가 뭐 되려고 저러나.”하는 무언의 눈치가 있다.(웃음)

▶작가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 본인의 적성을 살려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하다고 보나.

은 : 취업 자체를 못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주변의 경우에도 잡지사나 영화소품제작 등 어디로든 취직은 한다. 입시미술을 하는데 영어까지 가르친다거나, 아동미술 쪽에 타겟을 잡아 학원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 : 요새는 조그만 회사들 중에서도 문화예술전공자를 선호하는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결국은 토익이나 경력이 중요하고, 졸업하기 전에 이런 저런 자격증도 따야 한다. 이런 준비들을 하고 나서 본인 적성을 살려 회사에 들어가는 친구들도 있다.

류 :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항공사, 광고회사 등 많은 회사들이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미대를 나왔다고 해서 바로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도 자격증이지만 학점에, 영어성적에, 하다못해 면접 준비도 필요하다. 우리학교에서는 아무래도 일반 회사로의 취업률이 낮고, 예술 외의 전공이 없기 때문에 취업을 준비하는 분위기는 더욱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 할 때가 가까워지며 체감하는 작업 비용, 작업실 등에 대한 부담이 좀 갑작스러운 느낌이 있다. 사회가 예술 전공 졸업생들을 요구한다고는 하지만 그에 맞는 인식과 대비는 부족한 편인 것 같다.

응답 1개

  1. 은희준말하길

    잘 찍고 잘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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