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예술가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존재

- 오현미(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르네상스시대 예술가의 신분이 장인이었을 때, 창작자로서의 자기 각성이 예술가를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장인도, 완전한 자유인도, 신도 아닌 자, 규정되지 않는 자의 이름이 예술가였다. 예술가의 이름으로 기존 신분질서와 지배체제에서의 탈주와 위반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신을 닮은, 그러나 신은 아닌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는 후원자의 구속과 보호에서 벗어나 자유경쟁체제 속에 방치되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의 능력이고 그들의 실패는 그들의 무능력 때문이라는 철저하게 방임적 개인주의 사고 속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생활보장은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금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보장과 기본생활보장은 설득력 있는 명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예술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라고 인식하는 대신 개인적 취향과 선택의 산물로 인식하는 한 예술 이전에 예술가를 있게 하는 삶을 돌아보게 하기란 힘들다.

예술에 깊이 스며든 시장주의는 사회 속에서 예술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또한 예술가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시장을 움직이는 손은 19세기에 형성된 천재 예술가 프레임이 유지되길 바라고 있다. 위대한 작품은 예술가의 영혼과 삶을 담보로 탄생된다는 허구적 명제를 폐기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분명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되는 것도 사실이고 그 고통이 창작의 기쁨과 자기성취의 희열로 극복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 안전망도 없는 열악한 생존여건을 기약 없이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 성공과 세속적 성공이 쉽게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 성공하고자 하나 성공을 위한 길까지 혼자 개척해가야 하는 개인은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단기임금 노동을 해야만 한다. 단기적인 시간노동을 하고 있을지라도 작업을 하는 한,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있는 한 그, 혹 그녀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시간은 일시적일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리고 이들은 비정규 노동시장을 지탱하고 있다.

성공한 예술가 패러다임 안에서의 ‘나’는 ‘남’과 달라야 하고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속에서 예술가는 수많은 ‘나’들로 이루어진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한다. 파편화된 개인은 서로의 차이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서로의 닮은 점, 공통점은 볼 수 없다. 서로가 딛고 서있는 공통된 사회적 제반 조건을 통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인식하기 쉽다. 이 패러다임 안에 있는 한 시간제 노동자의 최저임금제와 보험적용과 같은 사항들이 예술가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까지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예술과 예술가를 고급상품의 하나로 취급하는 시장주의적 사고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내는데 기여한 예술의 존재론적 위상은 조명 받기 힘들어 보인다. 우리는 개인주의적 경쟁체제를 근간으로 삼는 시장주의에서 벗어나 예술과 예술가를 공동체의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이천 년의 예술역사에서 예술이 개인의 산물이라는 사고는 150년도 되지 않는다.

1980년에 채택된 유네스코 예술가 지위권고(Recommendation concerning the Status of Artist)의 제정목적을 보면 ‘예술가는 사회생활과 사회 진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므로 예술가의 창조적 영감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동시에 예술가적 직업의 특수한 여건을 고려하여 노동자의 지위에 관계되는 일체의 법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 ‘고용 예술가이든 자영 예술가이든 관계없이 그들의 사회보장, 노동 및 세제상의 여건들을 향상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국제노동기준 가운데는, 예술가의 전문성을 훼손하거나 예술활동의 특수한 여건 때문에 예술가를 그 보호대상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들 기준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거나 예술가의 적합한 새로운 기준을 제정하여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권고가 회원국에 정책과 법안으로 바로 연결된 예는 캐나다의 ‘예술가지위법’이 유일하지만 중요한 점은 정책적으로 예술가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술관, 박물관이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을 후대 세대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하는 임무와도 연결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건 풍미하지 못했건 예술가의 작품은 사회의 산물이며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공동체의 자산으로 보고 작품의 생산자인 예술가의 기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와 복지에 대한 논의는 이 지점에 대한 합의와 예술가의 특수한 노동조건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예술가의 노동은 노동시장의 규격에 맞는 노동은 아니다. 예술가의 노동은 누군가를 위해, 혹 누군가에 종속되어 타의에 의해 조종되는 노동이 아니다. 예술가의 노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으로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들의 노동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간다. 파는 노동을 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고용주에게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임금노동자가 사회적으로 받는 복지혜택에서 제외된다. 또한 그런 이유로 임금노동자에게 적용시키는 사회보장제도를 예술가를 위한 보장제도로 바로 적용하기도 곤란하다. 예술가들의 빈곤은 자율성의 확보를 위한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창작은 자율성의 확보를 전제하고 있다. 예술인 복지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는 유럽 또한 단속적이면서 어딘가에 소속되기 힘든 창작 작업의 특수한 노동조건과 예술가의 노동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몇 년간 선행되었다. 이 과정은 합의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설득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가 빠져버린 우리의 ‘예술인 복지법’을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확보와 그에 상응하는 권리쟁취를 위한 법안으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있어, 공동체가 누리는 삶의 질적 향상에 있어 예술가의 기여와 역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 속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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