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아름다운 세상 체험 나들이.

- 김융희

외출을 쉬이 잘 안하신 이웃 아주머니께서 오늘 아침 모처럼의 나들이시다. 교사로 정년 퇴임해 노후를 산촌에서 조용히 지내신 이웃이시다. 가정에서도 항상 깔끔하고 정갈하신 분의 나들잇 벌이 오늘따라 왠지 좀 그분 답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평상복으로 손에는 보따리까지 들려 완전 ‘보따리 장수’ 차림이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한 저녁 나절 후반에야 돌아오신다. 나가실 때 들었던 보따리는 보이지 않았다. 좋은 일이 있었는지, 표정만은 아주 밝아 보이신다. 어쩐지 궁금해 돌아오시면 여쭤 볼려 했었는데,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잘하고 오는 길이라’며 웃으시며 먼저 말을 거신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붉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포근한 햇살이며, 영근 생명들이 주렁 주렁 매달린 산촌의 가을이다. 계절 탓인지, 요즘 들어 들뜬 마음에 어쩐지 좀 답답했다. 장포에는 여름 내내 즐겨 먹었던 비름이 씨앗을 가득 메달고, 바로 그 곁에는 또 가을비름이 쫙 깔려 자라고 있다. 이른 봄 우리의 입맛을 돋우는 가을냉이도 벌써 지천으로 깔려있다. 이걸 좀 더 많은 이들이 나눠 먹었음 싶은 마음이다. 정성껏 곱게 뜯고 다듬어 보따리에 싸들고 아침부터 나들이를 나섰다. 서울이 가까운 의정부의 큰 시장엘 갔다. 몇 바퀴를 돌다가 겨우 한가한 골목 초입에 자리를 잡아, 가져온 야채 좌판을 폈다. 마침 그곳엔 늙으신 할머니가 풋고추며 고구마순, 호박잎순, 등을 펼쳐 놓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며 양해를 구해, 그 곁에 보따리를 풀고 나란히 편 것이다.

벌써 한 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팔리긴 커녕 값을 묻는 이도 없다. 물론 할머니께서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파는데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고구마 순이며, 호박잎 순의 껍질을 벗기느라 손놀림만 열심히 바쁘시다. 나는 할머니의 작업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예기 저 예기를 묻고 나누며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팔리기는 커녕 아직도 묻는이가 없다. 할머니께서는 점심을 거르실 모양이다. 점심이야기가 나오니 오히려 으아해 하신다. 맛있는 것을 먹자고 했더니 아주 난감한 표정이다. 들고 싶은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가시자고 했다. 펄쩍하시며 오히려, 지켜줄 터이니 어서 다녀오라는 말만 계속하신다. 그냥 놓아둔 채 다녀와도 괸찮을 것 같다. 억지를 써서 함께 인근 식당엘 갔다.

할머니는 토지도, 가진 것도 없이 변두리 시골에서 영감님과 함께 사신다고 했다. 버려둔 빈 공터가 인근에 있어서, 약간을 개간해 손수 드실 먹짜거리를 조금 가꾸고 있지만, 당신의 먹거리도 안 된다고 한다. 다른 벌이는 한 푼도 없다. 그런데도 조그만 용돈이라도 마련해 볼려고 이처럼 거둬 들고 오신 것이다. 동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때도 가끔씩 있다고 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팔릴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차비도 부족하다고 한다. 시외버스를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답답해 이렇게라도 하면 마음은 편하다는 이야기이다. 영감님이 술을 좋와 하시지만, 소주 한 병을 제대로 사드리지 못해 늘 미안하다고도 하신다. 이야기를 듣자니 가슴이 찡해온다. 말씀이라도 많이 하시라고 했다.
할머니께서 “보자하니 귀하신 분 같은데 이렇게 오셔서 큰 돈(5000원 짜리 밥값)을 쓰셔도 되느냐”며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하신다. 나는 웃으면서 내가 가져온 채소를 가져가시어 영감님과 함께 드시라고 했다. 오늘은 영감님께 소주를 꼭 사들고 가시라며, 약간의 돈을 쥐어 드렸더니 놀라 어쩔 줄을 모르신다. 더 말씀도 듣고 함께 있고도 싶지만 할머니께서 부담을 갖는 것 같다. 오래 오래 늘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한참을 걷다가 돌아보니 할머니께서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계셨고, 눈물을 닦으신 것도 같았다. 짠한 마음에 나는 그냥 돌아서서 총총 걸음을 쳤다. 열차에서도 내내 눈물을 훔치며 서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먼 산만 바라보았다. 책을 펴보지만 글씨가 어른거렸다.
다시 창밖을 본다. 파란 하늘이 빨릴 듯 푸르다. 열차는 덜커덩 거리며 벼이삭이 영근 황금빛 연천 들판을 달린다. 뉘엿 저녁 해가 서산을 비추고 있다. 자연은 이처럼 아름다운데, 도대체가 돈이 무었이길레 우리의 삶을 이렇게도 힘들게 하는가? 우리는 이같은 고닮픈 삶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나온 일을 회고하면서, 새삼 내 삶의 생각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온 길이다. 어쩜 앞으로 나들이가 더 있을 것 같다며 총총 걸음이시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도시에서 젊음을 바쳤고, 지금은 한적한 산촌에서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며 조용한 일상을 지내신 팔십을 바라보는 황혼의 아주머니가 오랜만에 세상 구경으로 나들이를 하셨다. 단촐한 가족에, 가까운 친척도 많지 않으신지, 가끔씩 찾아온 손님은 옛 제자들이 대부분이라 하셨다. 평소에 너무 조용하신 분이라 이웃과의 만남도 별로 없다. 다만 길초에 우리집이 있어 지나는 길이면 가벼운 인사이거나 눈인사로 지낸다. 그렇지만 교유가 많지 않아도 우리는 알 것은 안다. 세상을 살만큼 살았기에, 어림 짐작도 하고, 눈치도 있으며, 이심이면 전심인 독(讀)심도 있다. 그런데 어쩐지 아침의 거동이 수상쩍었기로, 이런 나들이임을 나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물론 평소의 아주머니를 보면 그럴 만큼의 기량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다분한 역량이래도 참아 시장 골목에서 야채장수로 실천까지 했으리라고는……..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도 찡해온다. 망팔의 나이 탓들은 아닐 것이다. 어떻든 오늘 아주머니의 나들이는 대단하셨다.

응답 2개

  1. 지나가다말하길

    황순원 소설 읽는 줄 알았습니다. 전관는 좀 다른 서정적인 문체에 애잔한 스토리까지…그 황혼의 아주머니 때문인가요?.. 눈앞에 서늘한 가을 풍경이 그려집니다. 가을에도 냉이가 나는군요..

  2. 콩콩말하길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저희 할머니도 생전에 마실삼아 시장에 자주 나가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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