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줄리엣 비노쉬의 <엘르>.

- 황진미

88만원 세대와 성노동에 대한 동시대 여성주의의 고민들

<엘르>는 시작과 동시에 섹슈얼한 장면이 펼쳐진다. 잠시 몰입이 될 만할 즈음 화면은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섹슈얼한 장면은 주인공 안느(줄리엣 비노쉬)가 밤새 책상 앞에서 글을 쓰느라 머릿속으로 상상한 장면이었고, 잠에서 깬 아이가 엄마 곁에 오면서 영화가 안느의 현실을 비춘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유명잡지 ‘엘르’의 에디터이자 남편과 두 아들을 둔 중산층 여성이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성매매를 하는 두 여대생을 인터뷰하여 기획기사를 쓰고 있다. 또한 학교를 빼먹는 사춘기 큰아들과 게임에 빠져 사는 작은아들을 챙겨야 하고, 남편직장의 상사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대접을 해야 한다.

안느는 성매매하는 여대생들의 실태를 고발기사의 논조로 접근하지만, 차츰 그녀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파리의 방값은 너무 비싸고, 아르바이트로 받는 급료는 턱없이 적다. 동유럽에서 유학 온 학생은 더 막막하다. 그녀들은 성매매의 역겨움보다 싸구려 임대아파트의 냄새가 더 참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성구매자인 중년유부남들이 자기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나, 성매매를 하며 가장 힘든 일이 항상 거짓말을 해야 하는 점이란 대답은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안느는 그녀들에게 여성으로서의 연대감과 기성세대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또한 자신의 가정과 삶이 공허하고 피상적이라고 느껴진다. 남편상사의 식사대접 자리에서 안느는 그들이 모두 성구매자들로 보이는 환영을 접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남편과의 성적 결합 시도는 무참하게 무산된다. 그러나 <엘르>는 60-70년대 유럽영화들처럼 상처를 터뜨리거나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틈을 벌였던 안느의 일상은 다시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봉합된다. 영화는 이렇게 봉합된 일상의 표면 아래 용암처럼 꿈틀대는 파괴적 충동이 언제든 일상을 집어삼킬 틈새를 쩍 벌릴 것이라는 긴장을 묘한 여운 속에 담아낸다.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라는 국내 처음 소개되는 여성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줄리엣 비노쉬의 절제된 연기가 돋보이며, 88만원세대와 성노동에 대한 동시대 여성주의의 고민을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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