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2)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1. 갈등과 화해 그리고 통합

인간은 자신이 부딪친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조건에 알맞게 반사할 수 있댔어. 그리고 무조건반사체계라는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자아와 함께, 조건에 알맞게 반사했던 성공한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조건반사체계라는 후천적이고 경험적인 또 하나의 자아를 만들어 가지게 되었댔어. 그리하여 인간은 생리활동을 본능적이고 선천적 자아인 무조건반사체계에게 맡기고, 경험적 후천적 자아인 조건반사체계로 진선미를 경험하는 창조적인 활동을 반사할 수 있게 되었댔어. 특히 조건반사체계라는 경험적인 자아는 스스로의 운영체계를 수정할 수 있는 운영체계이기 때문에 더욱 더 창조적인 삶이 가능하댔어.

그리고 인간의 운영체계는 컴퓨터와 달라 스스로를 수정할 수는 있으나 복사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개체성과 현실성은 있을 수가 없댔어. 일란성 쌍생아라도 무조건반사체계가 하나의 수정체에서 갈라질 때는 똑같았을 테지만 자궁에서부터 자라는 환경조건이 달라서 다르게 반사한 경험들이 축적되었으므로 내적인 생리나 외적인 생태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댔어. 더구나 조건반사체계는 백지 상태의 여백으로 가능성만 주어졌기 때문에 환경조건에 따라 다른 경험으로 각각 다른 인간을 그려간댔어. 그래서 일란성 쌍둥이라도 전혀 다른 사회화 과정 때문에 서로 다른 사상이나 감정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댔어.

그리고 한 개인도 서로 다른 지층이 쌓이듯이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이다보면 내적 갈등을 겪을 수 있댔어. 과거에 형성된 자아를 내적자아 최근에 형성된 자아를 외적자아라 한다면 두 자아의 타협이 언제나 성공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야. 자아가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때는 내적 자아를 따르다가 어떤 때는 외적 자아를 따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원초적인 자아를 따르다가 갑자기 초자아를 따르기도 하면서 갈팡질팡한다면 자아가 분열된 상태이지. 사회적인 갈등과 분열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개인적이고 내적인 갈등과 분열도 격렬한 스트레스로 시달리게 될 거야.

그래서 홍아야, 오늘은 우리가 앞에서 나눈 이런 얘기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행복해지는데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화제를 하나 꺼내보자. 한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이나 남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외면적인 갈등을 어떻게 풀어서 자아와 사회를 통합해야 하는지 얘기해보자. 그러려면 갈등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어디 가서 찾지?

얽힌 대로 풀라는 하버지 말씀대로 갈등을 푸는 방법은 갈등이 생긴 이유나 원인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지. 그렇지. 얽힌 대로 풀 수밖에 없으니까. 조금 전에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서로 다른 환경조건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되고 그것이 쌓여서 서로 다른 반사체계를 만들고 그 반사체계로 서로 다르게 반사하다보니까 그렇다고 하셨잖아. 그래. 그렇다면 푸는 방법은? 갈등을 푸는 방법은…… 거꾸로, 풀려고 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같은 경험을 쌓게 하여 경험체계가 같아지도록 해야 하는 건데…… 그게 가능할까?

우리가 어떤 사람의 반사체계를 다 바꿀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어.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도록 바꿀 수도 없거니와 바꿀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다만 그 자신이나 남의 삶을 해치는 반사행동만을 문제 삼고 있으며 그러한 반사체계를 설득하려는 거야. 그의 반사체계로 만든 안경의 굴절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그리고 색깔이 얼마나 칙칙한지를. 그래서 그의 어리석고 악한 반사행동이 그 자신이나 남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를. 그리고 진선미를 따르는 행동이 우리 모두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설득하려는 거야.

하버지, 설득할 대상과 내용은 알겠는데 하버지의 설득하는 방법은 반드시 실패할 거야. 평생 동안 옳다고 믿고 그렇게 얽어 짠 반사체계와 그에 따른 사고방식과 반사행동을 먼저 잘못된 거라고 규정한 다음 고치려들면 누가 귀담아 듣고 상대해주겠어. 오히려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네 말이 맞다. 누구나 자기 존재를 부정하면 저항하게 마련이지. 그러니 내 방식을 당장 고쳐야겠다.

네 말대로 누가 이치나 양심에 어긋나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도 어떻든 그 상황에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반사체계가 그렇기 때문이고. 그리고 반사체계가 그런 것은 그런 반사경험들로 얽어 짰기 때문이고. 조건반사체계는 이렇게 되먹임을 계속해서 항상성을 유지하려 해. 조건반사체계와 무조건반사체계, 협력하고 있는 두 운영체계, 두 자아는 스스로의 항상성 지키고 또 서로의 항상성을 지켜주고 있지. 그런데 지켜내려는 항상성을 잘못된 거라고 부정한 다음 바꾸려들면 오히려 자신의 항상성을 더 단단히 지키려고 경계하고 저항하기 때문에 실패하게 마련이지. 그래서 내 방식을 고칠게.

그런데 하버지, 조건반사체계에도 항상성이 있다고? 그럼 변하는 않는 거야? 조건반사체계의 항상성은 태어날 때 없던 것이고 경험으로 만들어진 거야. 게다가 일생동안 조금씩 계속 바뀌게 마련인 조건반사체계니까 거기에 변함없는 항상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조건반사체계는 무조건반사체계를 보좌하여 무조건반사체계의 항상성 즉 생명을 지키고 생명의 가능성을 꽃피우려고 경험을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만들었어. 그러니까 환경조건이 바뀌면 바뀐 대로 거기에 맞추어 반사방식 즉 항상성도 바뀌어야 더 잘 살 수 있지. 그리고 진선미를 경험한 만큼 더 성숙한 운영체계를 가져야 행복할 수 있고.

그러나 인간이 믿고 의지할 것은 자신의 경험밖에 없지. 인간은 주어진 환경조건에서 성공했던 과거 경험을 보다 빨리 검색하려고, 그리고 새로운 사물을 보다 더 잘 비추어 보려고 일생동안 끊임없이 경험체계를 확장하고 정리해왔어. 그리고 누구나 그렇게 정리한 경험체계라는 렌즈로 안경을 만들어 쓰고 사물을 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해석하고 반사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새로운 길을 찾다가 헤매느니보다는 그 경험의 안경의 굴절과 색깔로 잘 보이는, 아는 길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에 조건반사체계의 항상성이 생겼을 거야.

그러나 밖에서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본 남들은 그가 길을 가는 방향이 자꾸 바뀐 것으로 보아 그의 조건반사체계도 여러 번 바뀌었음을 알고 있어. 그런데도 무조건반사체계 속에 갇혀 있는 동물에게는 언제나 현재 상황만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조건반사체계 속에 갇혀 있는 본인도 마치 현재 상황에 갇힌 동물처럼 일시적인 연속성을 항상성이라고 믿고 있지. 자신을 객관화하기 어려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항상성 즉 동일성을 확신하며 살고 있어.

우리가 남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그의 반사체계를 존중하는 것인데 빗나간 언행을 계속반사하는 반사체계도 존중해야 하나? 주어진 환경조건에서 빗나간 의견들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의 반사체계가 좁고 엉성하고 헝클어져서 아직 덜 성숙하다는 뜻이지. 그러나 남 보기에 어떠하든 그것은 살아온 동안의 모든 경험을 축적해서 최선을 다하여 조직한, 그에게 가장 소중한 단 하나의 반사체계이고, 그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눈이야. 누구라도 훨씬 더 똑똑하게 반사할 수 있는 반사체계, 운영체계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어. 그도 행복하고 싶었기에 최선을 다하여 만든 조건반사체계야.

그런데 네가 앞서 말한 대로 누가 네게 반사체계가 잘못되어 있으니 고치자고 하면 너도 화를 내지 않겠니. 또 어느 나라 대사가 잘못했다고 타국에서 모욕을 당하면 자국이 모욕당한 것으로 느낀 그 나라가 가만있겠니. 마찬가지로 누가 너의 의견이나 행동을 무시하면 네 언행이 대표하고 있는 네 존재 즉 네 반사체계를 무시하는 거로 받아들이고 저항하지 않겠니. 그러니까 내가 최선을 다한 어떤 결과를 소중히 여기듯이 우리도 남이 최선을 다한 결과를 소중하게 여겨야 돼.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의 반사체계 즉 인격을 존중한다면 그는 더욱 존중받으려고 더 폭넓고도 잘 정리된 반사체계를 가지려고 애쓸 거야.

하버지가 남을 존중한다는 말씀은 남의 반사체계 즉 인격을 어떻게 대한다는 거야. 남의 반사체계를 존중한다는 말은 그의 반사체계를 대표하고 있는 그의 언행을 특히 그의 의견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야. 그가 그런 경험들 때문에 그런 반사체계를 가지고 그런 언행을 반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는 거야. 우리가 남들의 환경조건에 태어나서 살아왔다면 그들보다 더 나은 반사체계를 가지리라고 누가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겠어.

남의 인격 즉 그의 반사체계를 존중해야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 잘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여 만든 내 경험체계의 현실성을 존중한다면 최선을 다하여 만든 남들의 경험체계의 현실성도 존중해야 돼. 둘째, 진선미에 대하여 인간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남들의 경험가능성을 존중해야 돼. 셋째 경험의 가능성과 현실성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서로를 도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남들의 다름을 존중해야 돼.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존경은 서로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롭고도 적절한 반사행동 방식을 제안하고 함께 검토하는 거야.

하버지는 인간의 더 나은 변화가능성을 확신하는 것 같아. 나는 모든 인간이 언제나 성숙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아. 시행착오가 계속되면 인간은 자신의 반사 방식인 경험체계를 점검하게 마련이야. 한편으로는 조건반사체계의 항상성을 지키려하고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행복하려고 더 나은 반사 방식을 찾고 있는 중이야. 그가 현실성을 고집하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 더 나은 방식들을 모르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우리가 설득하려는 방식은 ‘이러면 어떨까’ ‘이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하고 새로운 반사 방식을 제안하는 거야. 그리고 제안한 방식에 대하여 함께 검토하는 거야. 우리가 진심으로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 거야. 만약에 새로운 방식이 더 나은 반사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면 누구나 반드시 나은 걸로 바꿀 거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겨우 하나의 반사행동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에 비한다면, 인간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반사행동을 단번에 해낼 수 있어. 그러니 홍아야,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믿고 더 나은 반사방식을 꾸준히 제안하고 추천하자.

그런데 살아온 환경조건이 달라서 반사체계가 다르게 형성되었더라도 하버지 말씀대로 서로의 반사체계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더 나은 반사방식을 함께 찾는다면 갈등하지 않아도 되지. 오히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기 위해서 서로 다른 환경조건에서 서로 다른 반사체계를 가다듬어 나가는 게 더 좋아.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서로의 삶이 다 같이 풍성해질 테니까. 그런데도 갈등이 있다면 거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자기의 반사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게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 같은데. 그래, 맞아. 네 말대로 다르다는 것이 갈등의 간접적인 이유일지 몰라도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지. 그러나 다른 것을 못 봐 주고 못 견디는 것이 문제야. 상대방의 반사방식을 무시하고 자기의 반사방식만 옳고 좋으니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이 갈등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일 거야.

그러면 하버지 사회적인 갈등 중에 가장 큰 갈등이 뮈야? 그리고 그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야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어? 뭐니 해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가장 큰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내. 현재의 사회 질서와 공동 생산물에 대한 분배 규칙이 불공평하니 바꾸자는 쪽이 진보적인 반사체계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라면 현재가 공평하니 그대로 두자는 쪽이 보수적인 반사체계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지. 어느 사회든 같은 반사체계를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힘을 모아 자기 쪽에 유리한 지배 질서와 분배 규칙을 결정하는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어.

그래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설득하여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타협안으로 그 사회를 통합시키는 정치라는 제도적 장치 속에 이 경제적인 갈등을 집어넣게 돼. 아니 오히려 경제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로 정치 제도가 생겼다고 보는 쪽이 사실에 더 가까울 거야. 어떻든 경제적인 갈등의 해결 장치인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여 경제 공동체에게 차츰 정치적인 자유를 넓히고 경제적인 평등을 뒷받침해나간다면 어느 정도 그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어. 그럴 수만 있다면 더디지만 한걸음씩 최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으니까 더 바랄 것이 없지. 그러나 하나의 지배자나 한쪽의 지배세력이 나타나서 상대방의 반사방식을 무시하고 자기를 따르라고 독재하거나 독점하거나 독선하게 되면 또다시 사회적인 갈등이 생기겠지.

사회에도 항상성이라는 게 있을까? 있다면 변화가 없을까? 한 인간의 항상성은 무조건반사체계와 조건반사체계에 있다고 했어. 한 개체의 반사체계와 같은 것이 한 사회의 전통문화야. 한 사회는 그 사회적인 경험을 체계적으로 축적한 전통문화로 새로운 사물을 해석하고, 전통문화를 기준 삼아 판단하며, 전통문화의 규범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 따라서 유일한 눈이며 판단기준이고 행동양식인 전통문화의 항상성을 지키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그러나 먼 뒷날에 보면 과거의 항상성이라 것이 사실은 일시적인 연속성에 불과했던 것이 많았어. 그래도 한 자아의 한쪽은 반사체계의 항상성을, 그리고 한 사회의 한쪽은 문화 전통의 항상성을 한사코 지키려 하지.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험의 전 재산이고 삶의 지혜의 축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떤 자아나 사회든지 자신의 생명인 항상성을 지키려고 하지만 한 개체의 반사체계나 사회적인 반사체계인 문화전통이 계속 바뀌는 환경조건에 알맞은 반사행동 양식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버려지고 결국은 사라져 버려. 그래서 다른 반쪽은 인간의 환경조건이 끝없이 바뀌기 때문에 거기에 알맞게 반사하도록 반사체계도 바꾸려고 노력하게 돼.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여 타협하고 통합에 이를 때까지 바꾸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이 힘겨루기로 갈등할 수밖에 없지. 연속성을 주장하는 쪽과 새로움을 주장하려는 쪽의 반사체계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반사체계끼리 갈라져 딴 살림을 차리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되겠지. 그러나 공동운명체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라 갈라설 수가 없는데다 어떻든 하나의 반사행동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갈등하게 돼.

자, 홍아야, 오늘 대화에서 화제가 뭐였지? 갈등과 통합. 우리는 갈등의 원인을 두 가지 찾았는데 그게 뭐더라? 직접적인 원인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반사방식을 강요하는 것이고 간접적인 원인은 환경조건이 달라지니까 반사체계가 달라지는 거. 그러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자아나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을까. 나의 자아의 일부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우리가 진심으로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믿게 하여 우리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돼. 그리고 새로운 반사 방식을 제안하고 그 제안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그의 반사체계와 의견을 존중하는 거랬어. 그러면 분열된 자아나 사회가 통합될 수 있겠니? 만약 설득할 수만 있다면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는 서로 협력하지 않을까? 아,그렇구나. 내 사랑, 홍아야. 너는 똑똑해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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