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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밥상의 근거 – 목요밥상 기획자 인터뷰

- 백납(수유너머R)

수유너머R에서는 매달 둘째, 넷째주 목요일 저녁이 되면 목요 밥상이 진행된다. 이제 2회 진행했지만, 감이 좋다. 주방매니저 죠스에게 인터뷰좀 하자고 하니, 자기가 기획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공동 주방매니저 중 한 사람인 덤쌤이 해보자고 했단다. 덤쌤에게 인터뷰 좀 해보자고 했다. 연구실에서 만났는데, 시작부터 반응이 냉랭하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위클리에서 기획을 할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 잘 되고 있는 다른 곳 알아보라고 한다.

하지만, 이분. 나름 밥상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밥 꽤나 하셨다. 살살 질문을 하니,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살살 들어보자.

● 목요밥상 어쩌다 기획하게 됐나

연구원 기픈옹달이 함께 술을 마시며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연구실에 오는 젊은 친구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미래가 불안정할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과 속해있다는 느낌이라고.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 어딘가에 가면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런게 필요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혼자 식당에서 밥먹을 때의 서러움, 그 고립감, 쓸쓸함, 외로움, 그런 감정들이 있다. 자주는 할 수 없더라도, 그런 것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밥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는 잘 못먹으니까, 함께 먹으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가난하니까, 덜비참하게 먹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것에 기왕에 그렇게 든든하게 먹는 것을 평상시에 못먹는걸 좀 맛난걸 먹자. 그리고 만나서 생존 확인 정도. 그렇게 모여있을때, 혼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 누군가가 있다는 것. 다들 고립되고, 가족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측면도 있겠지만, 무리속에 있다는 것,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애초에 시작하는 것은 그런 취지였다.

● 생존을 위한 밥상과는 다른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이미 밥상기획을 다룬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밥상 기획의 주요 내용은 생존을 위한 밥상이었다. 매끼 밥 사먹는 것이 비싸니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한 밥상이었다. 그런데, 이 목요밥상의 촛점은 그것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외로움을 치유하는, 그런, 치유의 밥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막달레나 공동체 같은 경우를 이야기 해보자. 박옥정 대표가 막달레나 공동체를 만들게 된 계기는 그 친구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이었다. 따뜻하게 밥만해주는 것이 막달레나 공동체의 힘이었다. 그 이후에 그 사람들의 삶에 깊이 같이 관여하고 고민하고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었다. 밥을 해준다는 것은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막달레나 공동체 이름으로 식당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내 생각에는 목요밥상보다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더 내용이 좋을것 같다.

딱, 그때는 박옥정 대표는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그 생활에서 겪는 폭력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 무엇보다 거기서 느끼는 정서노동의 핵심은 외로움이라는 점을 포착했던 것 같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밥이 한 인간의 영혼에 깊이 영혼을 잠식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치유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래서 밥을 계기로 그들과의 관계가 만들어지는것이거든, 여기서 밥상모임을 하자는건 딱 그거다.

● 예외적인 일부 사람들이 필요했던 밥상,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밥상

성매매 여성, 사회의 예외적인 일부 사람들이 그런 밥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런 걸 필요로 하는 저변이 넓다. 성매매 여성들이 아닌 그냥 젊은이들도 그런 밥상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에게 조차 그런 밥이 무언가 외로움을 한시라도 든든하게 해줄 수 있게 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느낀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좋아졌다는 방증은 아닐까.

그런데, 생존을 위한 밥상 같은경우에 길거리에서 하는것을 살펴보자면, 외로움을 없애주는 기능이 사라졌다. 살기 위해서 밥을 주고 얻어먹는다. 그 외로움을 치유하는 힘이 없어졌다. 그 밥을 얻어먹으면서 말그대로 얻어먹는 느낌이 있다. 밥을 해주는 사람과 얻어먹는 사람의 관계. 밥을 먹는 사람들은 서럽게 먹고 있다. 길거리에 줄을 서서. 어쩔 수 없고,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또 새로운 형태의 밥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밥상과는 또 다른 형태의, 영혼을 배불리는 밥상도 있어야 한다는 것.

● 좋은 먹거리 와도 다른

유기농 밥상을 위한 목적의식이나 생협과도 상관없다. 내가 감지하는 밥상은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니다. 무공해 무농약 밥상? 아직 그런 걸 생각할 여력도 없고, 지금 내가 필요한 밥상은 그런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밥상도, 생존을 위한 밥상도 아니다. 목적성 없는 밥상, 희미함,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밥상, 아주 나이브하다. 지속성도 불투명하고 상업화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크게 왜 필요하냐고 대들면, 답할것도 없다. 근거없는 밥상이다. 그런데, 뭔가를 느끼겠다는 것,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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