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공간의 쓰임, 쓰임의 공간 – 캄보디아의 내전을 극복하려는 두 개의 공간에 대하여 (1)

- 들깨

냉전은 사기였다. 실제로 전쟁을 치루지 않은 전쟁이라는 뜻의 냉전이었지만 어떤 곳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양의 폭탄이 뿌려졌고 근대에 들어 가장 잔인했던 학살이 이뤄졌다. 미국과 소련, 중국 등 열강들이 개입했고 그것은 누구나 알았지만 비밀이라 했다. 이 전쟁엔 한국도 참여했다.

캄보디아의 전쟁은 90년대 초반부터 잦아들었고 98년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79년 베트남을 등에 업은 캄보디아 국민군이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폴포트의 시대는 갔다. 앞서 이뤄졌던 수십만의 학살은 언급되지 않은 채, 폴포트가 저질렀던 일들은 ‘킬링필드’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전쟁박물관. 나무들 사이사이에 전쟁이 끝나고 수거한 무기들이 나열돼있다. 조금씩 부숴지고 녹슨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다. 마침 비가 쏟아졌는데 영화나 책으로 접했던 밀림 사이로 크메르 루주 군이, 베트콩이 다가오는 장면이 연상됐다. 무기들엔 설명이 조금씩 돼있는데 캄보디아 군이 썼던 무기들은 소련제, 폴포트가 썼던 무기는 중국제, 크메르 루주 전정권이 썼던 무기들은 미제가 많다. 대부분 무기는 2차대전 때 사용됐던 무기를 중고로 판매한 무기이며 캄보디아 전쟁이 어떤 대립구도로 이뤄졌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 곳의 가이드도 대부분 지뢰로 다리나 팔을 잃은 전직 군인이다.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전쟁박물관. 나무들 사이사이에 전쟁이 끝나고 수거한 무기들이 나열돼있다. 조금씩 부숴지고 녹슨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다. 마침 비가 쏟아졌는데 영화나 책으로 접했던 밀림 사이로 크메르 루주 군이, 베트콩이 다가오는 장면이 연상됐다. 무기들엔 설명이 조금씩 돼있는데 캄보디아 군이 썼던 무기들은 소련제, 폴포트가 썼던 무기는 중국제, 크메르 루주 전정권이 썼던 무기들은 미제가 많다. 대부분 무기는 2차대전 때 사용됐던 무기를 중고로 판매한 무기이며 캄보디아 전쟁이 어떤 대립구도로 이뤄졌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 곳의 가이드도 대부분 지뢰로 다리나 팔을 잃은 전직 군인이다.

전쟁이 끝난 지 십 수 년이다. 여행을 하며 만난 캄보디아에는 여전히 전쟁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에선 어디서든 팔다리가 없는 지뢰 피해자들을 만날 수 있다. 방문하는 외국인중 한국인이 제일 많다는 앙코르와트에서는 아예 지뢰피해자 악단들이 구성돼서 곳곳에서 연주를 한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장소인 킬링필드는 그 자체로 여행 코스다. 학살됐던 사람들의 유골과 옷가지는 위령탑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쌓여있다. 전쟁박물관이라 해 찾았던 곳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버려진 병기창 느낌이다. 미제, 소련제, 중국제의 무기들은(대부분 2차대전 때 쓴 무기의 재활용이다) 캄보디아 내전의 복잡한 대치관계를 보여주는 듯 했다.
세계최빈국이라는 오명도 긴 내전의 영향 중 하나이다. 덕분에 수많은 NGO가 캄보디아에 진출해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돼 가지만 여전히 캄보디아는 자선과 구호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복잡한 토지 소유권 문제와 정부의 개발 드라이브는 토지문제와 강제철거문제를 만들었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한 때 크메르 루주 소속이었다 베트남으로 망명해서 79년 캄보디아 국민군을 이끌었던 사람 중 하나였던 훈센 총리는 80년대 초부터 정권을 잡아 계속해서 캄보디아의 총리를 하고 있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거의 30초에 한번 꼴로 훈센 사진과 그의 당 간판(Cambodia Peoples Party)이 나와 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경제개발 롤모델은 박정희 대통령이라 한다.

어쨌든 전쟁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왔고 캄보디아는 전쟁을 기억하고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머무는 동안 방문했던 두 공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쓰고자 한다. 뚜얼 슬랭 수용소 박물관과 반띠에이 뿌리웁이라는 학교이다.

수용소가 된 학교, 박물관이 된 수용소

한 공간은 학교였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교육이란 것을 받았다. 75년, 폴포트의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들어선 후 이곳은 수용소가 됐다. 폴포트는 (비록 자신은 프랑스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교육을 증오했고 미국과 도시와 자본주의를 적대했으며 식량은 부족했고 자신들의 신변은 위태로웠다. 복잡하고 열악한 현실 속에서 이념은 갈렸고 이들은 서로를 죽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했고 두려워했다. 지적된 사람들은 프놈펜 시내 남쪽에 있는 ‘뚜얼 슬랭 수용소’ 일명 S-21로 옮겨졌다. 고문을 당했고 자백을 하건 하지 않건 이들은 죽었다. 여기서 10Km 떨어진, 바로 ‘킬링필드’로 알려진 쯔엉엑으로 옮겨져서 총알을 아까워하는 폴포트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한다. 이 수용소에 갇혔던 만 오천명의 사람은 거의 다 고문과 함께 죽었다. 생존자는 십수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수용소로 썼던 학교 건물 앞으로 고문에 사용했던 도구를 그대로 전시해놨다. 항아리에는 분뇨를 채워 머리를 넣는 고문, 그 위로는 밧줄을 매달아 수용자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고문이 행해졌다. 옆에 그 모습이 그림으로 설명돼있다.

수용소로 썼던 학교 건물 앞으로 고문에 사용했던 도구를 그대로 전시해놨다. 항아리에는 분뇨를 채워 머리를 넣는 고문, 그 위로는 밧줄을 매달아 수용자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고문이 행해졌다. 옆에 그 모습이 그림으로 설명돼있다.

학교, 수용소, 그리고 박물관으로 변해갔지만 공간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학교 건물은 쉽게 감옥이 됐다. 교실에 벽돌로 칸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었고 자살을 하지 못하게 쇠창살로 복도를 막으면 감시하기 쉽고 탈출 할 수 없는 감옥이 된다. 입구 쪽에는 명령에 복종할 것, 머뭇거리거나 반항하면 채찍질이나 전기로 벌을 줄 것이라는 규칙이 적혀있고 고문과 벌칙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행해졌다.

이 곳을 발견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고문기구들, 감옥, 쇠창살 등이 그대로 보존 돼 있고 당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는 발견된 시체의 사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옷, 유골, 그리고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과 죽어갈 때의 사진 그리고 폴포트 정권의 정책을 보여주며 악행을 고발한다.

급이 높은 수용자들을 고문하고 가둬놓던 방. 교실 한칸을 다 썼다. 저 침대에 수용자를 묶어놨다. 79년도 프놈펜 수복 당시 크메르 루주군은 마지막 남은 수용자들을 총으로 사살하고 후퇴했다 한다. 발견당시 사진이 방에 걸려있다.

급이 높은 수용자들을 고문하고 가둬놓던 방. 교실 한칸을 다 썼다. 저 침대에 수용자를 묶어놨다. 79년도 프놈펜 수복 당시 크메르 루주군은 마지막 남은 수용자들을 총으로 사살하고 후퇴했다 한다. 발견당시 사진이 방에 걸려있다.

아우슈비츠에 버금가는, 혹은 뛰어넘는 폴포트 정권의 잔인성을 그리고 그로인한 죽음에 대한 슬픔을 여기 오는 이들은 상당한 정도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어떤 맥락 속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돼 있지 않다. 폴포트 정권 이전의 프랑스나 미국의 개입이라든가, 그로 인한 사람들의 증오라든가 폴포트 당시 캄보디아 좌파의 복잡한 내부관계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폴포트를 위시한 당시 정권의 수장들이 나쁜 사람들이었고 잔인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그 정권을 물리친 현 정권을 구세주로 드러내고 있다. 방명록을 메우고 있는 다양한 나라의 글귀들은 공산주의와 폴포트에 대한 잔인함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엔 생존자 몇명이 자신의 체험을 담은 책을 팔고 있다. 웃기도 하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한다. 옆에는 어린 소녀가 설명을 하고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바로 그 사람이에요"같은 말을 한다. 생존자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는데 책을 사라는 말을 해서 그냥 나왔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엔 생존자 몇명이 자신의 체험을 담은 책을 팔고 있다. 웃기도 하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한다. 옆에는 어린 소녀가 설명을 하고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바로 그 사람이에요"같은 말을 한다. 생존자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는데 책을 사라는 말을 해서 그냥 나왔다.

방명록을 읽으며 추모하는 글귀들을 읽어보았다. 사람들은 이토록 비극을 슬퍼하는데 왜 끊임없이 비극은 계속될까. ‘왜’와 ‘어떻게’가 없는 추모란, 그리고 평화란 무력하지 않을까. 슬픔을 느끼는 만큼 내 삶과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가능할까. 변화가 없는 감동이란 얼마나 무력한 지 생각해보며 수용소 박물관을 나섰다. 나서는 길엔 한 때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는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들을 소개하며 슬픈 표정과 웃는 표정을 번갈아 내보이고 있었다. 저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대부분은 침묵하고 혹은 자살했다고 했는데, 내가 아는 어떤 이들은 자신이 일년간 갇혀있던 감옥 근처도 가고싶지 않아하는데 왜 이들은 자신이 수용됐던 곳에서 자신의 비극을 팔고 있을까.

(이어서…)

응답 1개

  1. 미리퐁말하길

    고문으로 죽다 는 언제나 무섭습니다. .변화 없는 감동. 왜와 어떻게를 없앤 현 정권의 권력,역사 놀음,사는것의 비루함. 다 싫다라고 말하는 멀리 있는,들은자의 감동없는 한탄..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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