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네 엄마가 보고 있다.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밤 10시 퇴근을 준비한다. 몸뚱이는 무감각해져 온다. 뇌의 신경회로는 간간이 접속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들이 부은 커피의 카페인은 끈적하게 들러붙어있는 혈병들 속을 파고들지 못한다. 하나하나 컴퓨터의 전원이 내리면서 마침내 오늘도 전원 오프 중이다. 곧 끝난다.

불쑥 문이 열린다. 집으로 돌려보냈던 아이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인가”를 물을 새도 없이 멈추려했던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의 신원이 재미있다. 공부방 아이가 아닌 것이다. 인근의 중학교에서 학교 폭력으로 폭력자치위원회(이하 폭자위)에서 사회봉사활동을 명령받고, 일주일 동안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예전으로 말하자면 근신 처분을 받고 봉사활동을 하던 친구다. 근신처분임에도 불구하고 명랑 쾌활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이는, 오늘 처음 만난 다른 중학교 아이가 가출을 하기로 해서 이 시간에 공부방 앞에서 만나 가출을 돕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공부방 불이 켜져 있어서 들어와 봤단다. 오늘은 이걸로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요즘 지역아동센터에는 가끔 학교에서 벌을 주라고 보낸 아이들이 오곤 한다. 그런데 파랑새가 이 친구들을 받은 데는 이 아이들을 보낸 ‘학주’에 대한 무한신뢰와 애정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인근 중학교의 국어과 교사로 계시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셔서 학주가 되신 분인데,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분인지라 이렇게 아이들을 좀 돌봐달라고 전화를 하시면 거절않고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는 아이들의 잘못은 다양하지만, 흡연과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 등등의 사소한 교칙 위반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죄명이 무시무시해서 발발 떨며 아이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는데, 막상 만나보면 말간 얼굴을 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정말 네가..’하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학교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친구들을 지역아동센터로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주일 남짓의 짧은 시간동안 절대 개과천선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 잘못을 알고 최소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빌다시피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보낸다. 그러니 어쩌면 학교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좀 쉬고, 실컷 심심해하고, 가끔 재밌게 놀고, 지독하게 말 안 듣는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정말 심하다는 하소연을 늘어놓다 시간은 다 가버리는 것이다. 보낸다. 그러고나면 거기 공부방 절대 가지 말라고 고개를 흔드는 아이들도 나오지만, 때로는 꼭 다시 오고 싶다고 갑자기 열혈팬이 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은 그 모든 일을 철저히 혼자 한다. 가끔 친구들이 곁에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철저히 혼자인 채로다. 그리고 그렇게 어른들의 곁에서 멀어진 아이들일수록 상처와 불신과 외골수의 깊이도 자연히 함께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오고가는 중에도 때로는 황망한 일도 벌어져 쓴웃음을 짓게 한다. 한 번은 외출에서 돌아오니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아이가 와있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아이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 학교에서 왔는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화가 잔뜩 난 한 아주머니와 불만스런 표정의 또 한 명의 여학생이었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봤더니 두 사람은 모자지간으로 어머니가 직접 아이를 데리고 봉사활동을 나오신 것이다. 가해 학생으로 봉사명령을 받은 학생은 중학교 3학년으로 성적도 매우 우수한 모범생인데, 왕따를 했다고 피해자가 학교 측에 진정을 내어 폭자위에 회부가 되었다. 그 결과 본인은 사회봉사활동 명령을 받고 부모와 학생 모두가 상담을 받도록 되어 이렇게 함께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피해자 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를 당해오긴 했지만, 본인도 왕따를 불러일으킬만한 소지가 많아 늘 왕따 문제가 끊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딸 아이는 한 번도 그런 일에 휩쓸린 적도 없이 공부만 열심히 했었는데, 우연찮게 다른 아이들 하는 짓에 휩쓸려 엉겹결에 한 번 일을 친 것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고 보자마자 하소연을 들이 민다. 그러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과학고를 지망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 일이 학생부에 기재될 테니 완전히 앞길을 망치게 되었다고 하소연이 늘어진다.

더욱이 이미 잘못을 뉘우치고 보육원에서 죽자고 청소 등의 봉사활동을 했는데, 이틀이나 더 하라니 성질이 나서 못 살겠다는 것이다. 그런 일로 아이 앞날을 망친 것도 원통해 죽겠는데, 봉사활동을 했던 보육원의 담당자까지 그런 태도라면 사회봉사활동을 인정해줄 수 없다고 신경을 긁어대더니, 급기야는 다 했다고 생각한 봉사활동을 이제 와서 이틀이나 더 하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내며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폭포같이 쏟아지는 신경질 밑에 서서 ‘허걱! 제가 안 그랬는데……’하고 살포시 눈을 들어 둘의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났다. 딸의 과학고 입학이 물 날라 같다는 생각에 이미 앞뒤 볼 것 없다는 자포자기가 넘쳐나고, 다른 아이들 그러는데 잠시 침만 발랐다 인생 종치게 되었다는 원망은 하늘을 찌르고, 무엇보다 상담이니 교육이니 청소니 시킨 건 다 했는데 이제 와 남은 빚이 뭐냐며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데 사납기가 그지없다. 다시금 ‘제가 왜 괜히……’하고 살며시 발을 빼려다 아줌마 얼굴을 보고 얼른 다시 주저 않았다.

음. 그러고 보니 남다르기는 한 것 같다. 폭자위에서 오는 언니들은 보통 일단 짧게 자른 교복치마에 기본적으로 짙은 화장을 하시고 보통 친구들을 대동하거나 스마트폰에 의지해서 오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러고 보니 엄마와 함께 오는 아이를 처음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더욱이 건강하게 빛나는 입술을 보니 담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는 모양이시다. ‘아우 이 언니를 어찌 손을 봐주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한다.

엄마의 신경질이 한참 된 후에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잠시 생겼다. 어머니가 속상하시겠고 너도 많이 놀랐겠다고 잠시 위로의 말을 했더니 조금 분이 사그라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어쨌든 네가 한 일로 무엇보다 네가 제일 힘들겠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힘들어진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 짧게 덧붙였더니 어째 생각을 좀 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할 일을 안 할 수 없으니 그러면 이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처리를 하겠다고 말을 꺼내니 네 개의 눈동자가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이틀 동안 학생은 명령을 받은 데로 봉사활동을 실시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 조건으로 어머니와 반드시 함께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센터에서 청소나 허드렛일을 하는 대신 인근의 도서관에 가서 할당된 시간 동안 공부를 하다 가도록 했다. 대신 반드시 엄마를 대동할 것과 그리고 반드시 엄마가 앞자리에 않아서 학생이 공부를 하는 동안 함께 있도록 했다. 공부방에 있다면 어머니는 함께 안 오셔도 되지만, 아이가 공부방이 아닌 도서관에서 이틀의 봉사명령을 수행할 것이고 이 아이만을 돌보러 다른 교사들이 시간을 내기도 어려우니 대신 보호자가 그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잠시 설명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엄마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제안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눈치다.

물론 잘못을 저지르고 벌을 받으러 오는 아이에게 그러면 어쩌냐고 나무랄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그런 일로 마음을 돌리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란 불가능하겠다 싶은 나름의 판단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를 갈며 하는 일이 무슨 깨달음을 줄 것이며 성난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 아무리 아이들인 듯 눈에 들어오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너무 뻔한 일에 되지도 않을 애를 쓰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엄마랑 공부를 하라고 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바로 네 엄마의 코앞에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것으로 네가 받을 벌은 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환하게 빛나는 엄마와 딸아이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지는 않지만, 나는 그것이 그 둘에게 주어질 수 있는 적절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사슬에 너무 꽁꽁 묶여 이제 그 무게감이 없으면 실존마저 의심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으면 그 또한 어쩌랴 싶은 잔인한 생각도 잠시 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엄마의 이글거리는 눈앞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일만큼 지금 이시대의 솔직한 형벌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엄마가 악몽이 되는 현실은 서글프다. 그 엄마를 그렇게 만든 것들을 넘어서는 욕망을 스스로 꿈꾸는 엄마들을 보는 일은 더욱 끔찍하기도 하다. 그러니 어떤 교실의 급훈은 이렇게 정해진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엄마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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