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B, 다시 쓰는 시설의 역사

- 이영남(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작자 소개

– 임상역사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년부터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과 함께 탈시설장애인을 위한 스토리텔링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내러티브 B, 다시 쓰는 시설의 역사

“엄마가 나에게 ‘여섯 살’이란 걸 가르쳐 주던 날 엄마, 아빠와 함께 공원에 갔어요. 엄마는 먹을 걸 사온다 하셨고 아빠는 잠깐 어디엘 다니러 갔다 오신다 하셨지요. 잠깐은 수 십 번도 더 지났는데 엄마, 아빠는 오시지 않았고, 울었어요. 그리고 낯선 사람의 손에 이끌려 경찰서에 가게 되었고 경찰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어느 아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요. 우리들의 하루 일과는 6시 기상, 7시 30분 아침식사, 12시 점심식사, 5시 30분 저녁식사, 7시 취침. 이것이 500명 규모 시설의 하루 생활입니다. 그 곳은 참 이상한 곳이었어요. 내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내고, 이상한 옷을 입히고, 반찬을 한 그릇에 모두 섞어 주더라고요.” (내러티브 A)

이 이야기는 시설장애인 이야기 중 일부이다. 우리 시대는 장애인의 발바닥이 닿는 곳은 인권유린의 현장이라 말해야 하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시설 이야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달리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만 있을까? 그것이 전부이고 정녕 그것 말고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내러티브 A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역사는 언제나 다시 쓰여진다. ‘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도 시설의 역사를 다시 썼다. 아름다운 꽃은 역경 속에서 피어난다. 참가한 이들이 다시 쓴 역사는 암담한 현실, 인권유린의 역경 속에서 성숙하게 피어났던 들꽃들의 삶이었다. 스토리텔링 프로젝트에는 2011년에 8명, 2012년에 8명이 각각 참여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자명했다. 요컨대, 그것은 ‘시설에 있는 장애인’보다 더 큰 사람이 역사를 써왔다는 점이다.

다시 쓰는 나의 역사에 포개진 많은 이야기 중에는 세상에 기여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기여란, ‘기생하지 않았고 무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면서 동무되어 살아왔던 삶,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삶을 조명한했다. 장애인을 대하는 편견 중에서 가장 지독한 편견은 ‘이야기 편견’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장애인이기에 당연히 그들 이야기도 ‘장애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에서도 휠체어를 탄 모습, 인권을 유린당하는 현장의 모습, 매우 무력했던 모습,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습 등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편견이며 푸코가 말한 규율권력이다. 어찌보면 편견이기보다는 ‘매우 이성적인 편견’이라고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편견이든 이성이든, 우리는 비장애인과 다른 어떤 존재이기에 그이들과 다른 이야기으로 살고 있다는 것부터 불식시켜야 한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불편한 이야기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럴려면 우리는 ‘장애인이야기는 비장애인과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편견’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이들은 단지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을 뿐이고 그로인해 고통을 받은 것도 물론 사실이며, 그것을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사회정의를 세워야 하는 것 역시 자명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이들의 생각과 감정, 삶의 전략 역시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선 이것부터 말해야 한다. 이것을 다시 쓰는 역사의 기원과 텔로스로 삼아야 한다 (내러티브 B)

스토리텔링에 참가했던 한 동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한 것은 무엇일까? 자기 삶에 품고 있는 역사를 풀어나가며,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에서 미래로 한걸음 나가는 힘을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자기 삶에 품고 있는 역사를 말할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인권의 항목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인권의 눈길로 시설의 역사를 다시 쓴다.

응답 1개

  1. 세실말하길

    미처 생각지 못한 걸 깨닫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의 태도에는 도우려는 마음과 연민만 있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알고보면 누구나 조금씩은 장애인인데. 자신의 일그러지고 못난 마음을 알아본 다른 사람들이 언제나 그것만 주시하며 측은한 얼굴을 한다면 결코 기분 좋을 수 없겠죠.

    역사를 바꾸었다는 위인의 극적인 결단만 얘기거리가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다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크고 오래된 나무는 한 번씩 얘기되지만 사방에 펼쳐져 안식과 평온함을 주는 푸르름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풀과 나무들이 이루어내잖아요.

    우리는 지금 언젠가는 이야기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써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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