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결국, 마침내 금서령이 떨어졌다. 앞에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한 까닭은 사실 머지않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도 아닌데 웬 금서령이냐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금구매서령(禁購買書令)이라 해야겠다. 이런 상황이 닥친 것은,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아들 녀석의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지난 달 카드 사용 내역서를 봐 버렸기 때문이다.
오해마시라. 그렇다고 내가 남편의 손아귀에 쥐여 사는 그런 마누라도 아니고, 남편이 진시황제 같은 지독한 독재자도 아니니. 그러나 나는 그 명령 아닌 명령에 순순히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카드 사용 내역서를 아들 책상 위에 나보란 듯이 올려놓은 내가 잘못이고(평소에는 잘 숨겼었는데, 그만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난달에 정말 책을 많이 사긴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
굳이 변명이라도 하자면, 지난달에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다. 예컨대 겨울방학 특기적성 수업 시간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들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했고, 곧 중학생이 되는 조카들에게 책을 좀 선물했다는 것. 하지만 이것도 변명에 불과한 이유는 그 책값을 제하고도 내가 지출한 책값이 객관적으로(보통 우리나라 국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또는 우리나라 독서 실태 조사에서 나오는 과학적 통계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은 아들을 구슬려, 엄마가 만일 책을 사는 것을 목격한 경우에 아빠에게 신고하면, 포상금 5만원을 주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그래도 역시 아들은 내 편이었다. 적잖이 낙심한 나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그냥 2천원짜리 <좋은 생각> 한 권 사. 그럼 내가 아빠한테 신고해서 5만원 받은 다음에 그 중 만원을 줄 테니 그걸로 책 사면 되잖아.”
아무래도 우리 남편은 감시 대상을 잘못 매수한 것 같다. 가끔 아빠 몰래 책을 사도 아빠한테 이르겠다고 하고선 아직까지 한 번도 실제로 이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행여나 책 포장 박스가 아빠에게 들킬세라 얼른 쓰레기장에 미리 갖다 버리라고 충고를 해 주기도 하는 아들인 걸.
그럼, 내가 이렇게 많은 책을 사는 이유가 뭐냐고? 글쎄, 나도 모르겠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사람이 어떤 일에 몰입을 할 때 인생이 행복으로 충만해진다는데, 나의 경우에는 마음이 시끄럽고 고단할 때 대형 서점 몇 시간을 돌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대형 서점을 가면 외국어 코너와 학습서 코너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책들을 두루 구경하고 나오는 편이다. 몇 시간을 걸어 다니며 책을 보는데도, 다리도 아프지 않고 눈도 침침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지루하지가 않다. 그 와중에 읽고 싶은 책 이름은 휴대폰에 메모해서 저장해 놓고(바로 그 날이나 다음날 학교에서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다), 그냥 나오기엔 서점에 미안하니까 책 몇 권을 사 들고 나온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여유롭고 왠지 모를 삶에 대한 의욕이 솟을 뿐 아니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가끔은 내 자신이 거의 중독 수준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예컨대 집에 있는 서가에 빈자리가 생기면(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책을 더 사서 꽂을 수 있다는 기대에 행복해진다. 학교에서도 책상과 사물함에 책을 잔뜩 꽂아놓고 학생들이나 교사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일이 가르치는 본업보다 더 즐겁다. 어떤 책을 읽다가도, ‘앗 이건 아무개가 읽으면 딱 좋겠구나’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물론 그 아무개에게 문자로 알려주는 일까지 즐겨한다. 읽고 싶은 책이 나오면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다가 언제 돈이 생겨서 그 책을 사나 노심초사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담배나 도박을 못 끊는 사람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문제는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쌓아놓고도, 그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휴직을 했다. 독서휴직은 아니고 육아휴직이다. 하지만 이제야 책들을 읽을 시간이 생길 거라 생각하니, 올 한 휴직하기로 한 일이 스스로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 그러다 이런 나를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떻든 이즈음에 만난 저자들이 있다. 자칭 책 매니아라는 이들이 쓴 책들이다. 책들을 조금 펼쳐보니 곳곳에 내가 그은 밑줄이 보이는데, 아마도 나와 비슷한 부류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앞서서 그랬을 것이다. ‘독서광’하면 뭐니뭐니해도 다치바나 다카시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었을 때, 나보다 몇 배나 더 지독한 독서광을 만난 기쁨에 들떴던 기억이 생생하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 표정훈의 <탐서주의자의 책>, 이권우의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니콜라스 A. 바스베이스의 <젠틀 매드니스>, 사라 스튜어트의 <도서관>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어떤 위로를 받는 책들이다.
그러니 남편이 내린 금서령이 수긍은 가지만 실천하려니 영 자신이 없다. 사실 지금 고백하는 건데, 며칠 전에도 어떤 책 한 권이 너무 읽고 싶어서 아들 딸에게 잠깐 나갔다 오마고 말하고는(이런 엄마가 있나?) 교보문고에 가서 덥석 사가지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 밥 먹는 남편에게 슬쩍 물어봤다. “여보, 이번 달 월급 나왔는데, 정말 책 한 권도 사면 안 돼?” 그러자 우리 남편, “아니, 어떻게 책을 한 권도 안 살 수가 있어. 몇 권 정도는 사서 읽어야지.” 어? 열흘 전이랑 말이 다르네. 흐음, 남편도 마누라의 책 중독증에 전염되었음에 틀림없다.
– 김대경(고등학교 교사)
이런이런, 제 증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환자(앗, 초면에 죄송합니다 ^^)를 만나다니….
마치 제가 쓴 글을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저도 기분이 우울할 때 책방을 다녀오거나 주문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말끔히 정리되고,
쌓아놓은 책은 많은데 읽을 시간이 없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책만 주구장창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는 일반 직장인이라 휴직이 안되네요. 그냥 바로 퇴직이 되서리..
게다가 책값 때문에 남편 눈치를 흘끔흘끔 본다는 것도..ㅋㅋㅋ…저는 다행히도 올해부터 회사에서 몇몇 우수사원들에게 책값을 지원해주는 혜택을 받아 요즘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 이거 회사에서 지원받아 사는 거라구!!! 아, 그리고 저도 ‘서재 결혼시키기’ 좋아합니다.
요즘 저에게 누가 취미를 물을때 말합니다.
“북쇼핑” 이라고….’독서’보다는 이게 더 정확한 표현같아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