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우리는 친한 사이끼리는 계산하지 않고 물건을 나눈다.

- 허성학

1.인간, 사회는 무엇으로 조직되는가.

1)인간과 경제에 대해

경제는 재화의 생산, 유통, 분배와 관련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그런데 재화라고 함은 예외 없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반영하며 이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에도 인간 공동체 고유의 방식이 묻어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경제행위가 똑같이 이루어진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재화의 종류와 쓰임새는 지역마다 각양각색이고 여기엔 지역 특유의 생산방식과 생활모습이 녹아들어있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제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구성에 영향을 받는 유기적 일부다. 지금부터 이 점을 분명히 입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통념으로 여겨지는 ‘독립적인 영역의 경제’라는 생각과 그로인해 배척되어버린 공동체와의 관계, 더불어 인간의 다양한 동기가 왜곡된 사태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경제란 사람들의 ‘행동’에 다름 아니며 그 행동은 사회적 동기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공동체의 면면과 인간의 행동양식 속에서 경제행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2)인간관계와 경제적 동기

명백한 사실은, 경제란 사람들 간의 특정 행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한 부족사회를 상상할 때, 사냥을 통해 얻은 고기를 나누고 여러 장식품을 선물하는 일은 노고를 칭찬하고 교우관계를 돈독히 하는 공동체 특유의 활동이 분명하다. 이곳에선 협력과 헌신, 성실함의 가치가 높이 칭송된다. 남자들이 대체로 사냥과 전투에 전념하고 여자들이 양육과 가사를 맡는 것도 저마다의 전통과 문화를 낳는 부족사회의 성격과 구조에 기인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분배와 분업이라고 부르는 경제적 활동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것도 있다. 가령 남녀가 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사랑을 서약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재화가 쓰임새 이상의 상징성을 획득한 경우이다. 곳에 따라 그 물건은 반지일수도 있고 호랑이 가죽일 수도 있고 조가비 목걸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의 재화가, 그리고 재화를 나누는 방식이 한 지역의 특성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며 여기엔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적 요소가 작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재화를 쓰고 서로 나누는 데 인간의 복합적인 요인, 즉 사랑, 우정, 원한, 습관 등의 감정적 기재와, 더불어 신분, 제도, 전통, 문화 등의 고유성이 함께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에 모종의 원칙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776년 <국부론>에서 경제적 기초를 주장한 애덤스미스. 그는 이익을 추구하고 교환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강조했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어떤 성향…물건을 갖고 다니며 유익한 것을 찾아 서로 교환하려는 성향”이 바로 경제생활의 근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인간의 타고난 성향과 욕구는 자연스럽게 물물교환, 화폐발명, 시장형성을 이루어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훗날 이 개념은 ‘교역하는 야만인’, ‘homo economicus’라는 보편적인 인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러한 성향을 지닌 인간들 사이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만약 가족관계에서조차 자식이 부모로부터 가능한 많은 이익을 뽑아내려 한다면, 또 부모가 훗날 자식에게 투자한 양육비, 생활비를 일일이 기록해 상환하길 청구한다면 우리는 가족 간의 유대란 말이 어색해지는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그런 성향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도덕의 모범이 되는 세상을 떠올려보라. 지속적인 친분이란 불가능할 만큼 위태로운 사이들이 넘쳐날 것이다. 나에게서 가능한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은 ‘친구’라기 보단 ‘장사치’ 혹은 ‘사기꾼’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간관계에서 이익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놓는 도덕적 기반의 사회는 찾아볼 수 없다. 전통적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경제적 동기’라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익을 중점에 놓는 인간관계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국한된다. 인간은 실로 여러 가지 도덕적 기질과 천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익추구와 교환성향은 이중 하나에 불과하다. 부족들의 사례에서 발휘되는 협력과 미덕에 대한 칭송은 개인의 이익추구, 교환성향과는 분명 거리가 멀지만 경제활동의 인간본성으로 훌륭한 동기가 되고 있다.

2. 상업적 거래의 관념

1) 물물교환, 원초적 부채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자유시장의 확립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이론은 시장의 원리와 화폐의 효용에서 개인의 이익추구라는 경제적 동기를 진리로 떠받들게 했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이 1776년 <국부론> 이후부터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문명국가차원의 화폐가 발명된 ‘축의시대’에서 이미 이익을 중시하는 성향을 볼 수 있는데, -정부의 군사정책을 관철시키면서 나타났다- 따지고 보면 이익이라는 개념은 훨씬 전부터 우리들의 피부 깊숙이 녹아들었다. 이 생각은 상업적 거래의 관념으로, 시장의 언어로 우리 사고의 곳곳에 파고들어 여러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만들어냈다. ‘물물교환’ 신화와 ‘원초적 부채’의 신화가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물물교환 신화나 원초적 부채의 신화에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거래관계로 여기고, 자신을 세상과 우주에 빚진 채무자로 그리는 시선이 깔려있다.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물물교환’ 신화에 깔려있는 상업적 거래의 관념을 전제로 공동체에 대한 의무, 갚을 수 없는 빚, 원죄의 굴레, 신을 향한 복종 등 원초적 부채신화와 더불어 기독교의 메시지까지 유도하고 풀이하면서 이 두 신화가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동전의 양면임을 보여주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세상을 채권자로, 자신을 채무자로 그려야 하는가. 세상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진 빚은 과연 갚을 수 있는 빚인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 부모 혹은 우주에 대한 은혜가 과연 이런 것인가.

2)부채의 의미

빚을 졌다는 말은 일상적인 면에서 고마움에 대한 보답과 명예의 문제다. 인간은 이처럼 재미있는 존재다.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보답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없을 때 마음이 상하고 의기소침해지거나 누군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불편해한다. 이런 심리를 합리성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이익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효용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의 상호성에서 발휘되는 능력이며 책임감, 정의로움에 대한 민감함이고 공동체 성원에게 기대할 수 있는 도덕성이다. 이 도덕성이야 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관계에 본질적이다. 채권-채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선물한 자-보답하지 못한 자의 관계다. 채무자를 단지 채무자로 보았던 적은 없었다. 채무자에겐 언제나 도덕적 질타가 따라붙었고 채무자는 언제나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평판과 명예의 문제를 걱정했다. 한마디로 빚은 죄였다.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당위성은 경제적 거래관계-“평등한 등가교환의 원칙에 입각한 부채의 상환”-로부터 발생하는 게 아니라 이 같은 도덕적 함의에서 표출된다는 것이다. “채찍이 개를 만들고 선물이 노예를 만든다.” 이 말이 부채라는 도덕적 관계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부채’라는 말은 현실경제의 영역에서 거래가 즉시 체결되지 않은 경우에 쓰인다. 여기엔 두 사람 사이 필요에 의해 성사되는 평등한 자유계약이라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평등을 전제로 한 부채관계를 고수했을 때 과연 평등의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 다소 역설적이다. ‘관계’속의 인간이라는 존재에 주목했을 때 과연 평등한 자유계약의 관념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3)감출 수 없는 것

“만일 공장의 어떤 사람이 보스에게 가서 일자리를 요구했는데 그 보스가 그 사람에게 일자리를 찾아준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돕는 행위의 예일 수 있다. 일자리를 갖게 된 사람은 상관에게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은 상관에게 존경심을 보이거나 상징적 선물로 밭에서 나는 채소를 줄 수 있다. 만일 보답이 요구되는 선물을 받았는데도 어떠한 물질적 보답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 보답은 지지나 존경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이처럼 상호부조의 미덕은 어떤 경우엔 빚을 낳고 빚은 두 사람 사이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불평등의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들 주변에서도 이웃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는 방법이 아닌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그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거나 그 사람의 부탁을 최우선으로 하는 등 동등한 입장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만약 부채를 평등한 거래의 연장에서, 상환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일자리를 얻은 사람의 채소선물은 일자리 제공에 대한 상환일 수 없다. 채소선물은 빚을 갚기에는 너무 약소한 것이다. 그것은 호의에 대한 보답이면서 한편으로는 빚에 대한 이자지급이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상업적 거래의 언어를 유지하려고 해도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힘들다. 결국 위의 경우처럼 보스와 직원은 불평등의 관계에 놓인다. 만약 보스가 운전을 요구했을 때 직원이 “당신과 나는 자유롭고 동등한 조건에서 거래를 체결한 것이다. 일자리를 준 건 감사하지만 내 집에서 나오는 토마토로 이자까지 쳐서 갚고 있으니 나는 지금 매우 떳떳하다”라며 운전을 거부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까. 평등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평등하지 못하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기 때문이다. 상업적 거래의 언어를 고수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간의 입장과 위치와 마음이 있다. ‘부채’는 언제나 구체적인 관계 속에 있다. ‘관계속의 인간.’ 경제는 단지 경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3. 폐해, 그리고 우리

‘부채를 졌다’라는 말과 ‘빚을 졌다’라는 말은 같은 뜻이면서 맥락은 다르다. 경제적 관념을 의식하는 한편 인간적 밀접함을 감각하면서 두 영역은 교차해온 듯하다. 위의 경우처럼 경제적 평등함을 고집한들 ‘관계 속의 인간’이라는 행위의 주체는 감출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상업적 거래의 관념은 얼마나 우리의 세상에 만연한가.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그토록 당연한 얼굴을 하고서. 이 이론적 논의를 조금 더 끌어올려 일상적 차원에서 관찰하려 한다. 여기선 특별히 자유라는 도덕적 개념의 혼동과 물질만능주의의 풍토를 확인해본다.

1)자유

오늘날에도 흔히 들리는 ‘자유’라는 개념은 사실 그 실체가 ‘소유’인 경우가 많다. 내 몸을 내가 맘대로 쓸 ‘자유’, 마약을 하던 매매를 하던 내 맘이라는 식의 ‘자유’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에 대한 ‘재산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치 물건에 대한 소유와 처분을 임의로 결정하듯이 인간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로 소유와 처분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뉘앙스의 주장인 것이다. 이런 뉘앙스의 ‘자유’개념은 경제적 논리와 매우 닮았다. ‘필요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재화를 교환한다. 이 원칙에 모종의 권력이 개입된다면 인간의 경제적 행동은 위축될 것이다. 따라서 우린 경제적 행동에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영역을 가리지 않고 도덕적 차원의 논의에도 적용되며 일상에 깊숙이 침투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저 원칙을 수용한다 해도 과연 인간이 물건처럼 교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시중에 유통되는 재화: 상품들의 경우 사회적 맥락과 분리된 것들이 전부였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또는 친구가 선물한 소중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파는 일은 없다. 시장에 내놓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물건들이다. ‘나’와 ‘관계’하지 않을 대상들인 것이다.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의미를 갖지 않는 대상들이 시장과 어울렸다. 하지만 상업적 거래의 관념과 경제적 소유인지 도덕적 자유인지 모를 ‘자유’개념은 경제행위의 주체인 인간까지 소유의 대상, 재화의 영역으로 구분해버리면서 공동체의 근간을 혼란스럽게 한다. 인간, 자연, 문화, 전통적인 행동양식은 이 새로운 지적폭력에 의해서 해체되고 그 맥락과 분리되어 추상적인 존재로, ‘관계성’과 ‘의미’를 상실한 채 거래될 수 있는 무엇인가로 여겨지고 만다.

2)화폐의 이중성

이런 바탕에서 돈은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존재로 변모한다. 돈의 이중성이란 무엇을 얻게도 하지만 잃게도 하는 이중의 힘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 힘은 한계를 모르고 성역을 가리지 않는다. 설령 그 대상이 한 가정의 아내, 아이일지라도. 실제로 고대에선 이런 소식을 빈번하게 들었다. 빚을 진 자는 대신 상환용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 무능한 가장의 아내와 아이는 채권자에게 노예로 팔려간다. 그러나 한 가정의 구성원이 상환용으로 팔려간다는 발상부터 이 뭔지 모를 ‘자유’ 개념의 바탕에서 가능해진 것이며 화폐가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된 밑그림인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 돈이 그처럼 무분별하게 날뛸 수는 없었다. 강력한 왕국과 신분, 계급에 의해 혹은 종교적 교리에 의해서, 돈의 힘은 적절히 규제되었으니까. 그때까지, 아직 경제는 ‘전체의 품 안’에 있었다. 그러나 만약 강력한 왕국의 통제도 대중적인 종교의 가르침도 없어서 사회의 한 영역에 불과하던 경제가 불현 듯 전면에 등장해 제한 없이 사회를 삼켜버린다면? 더욱이 경제를 ‘전체의 품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모든 이들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져 공동체와 그 조직이 경제 원리에 의해 재편되고 그렇게 우리들의 일상까지 지배하게 된다면, 돈의 물신성은 더욱 강력해지고 우리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인 삶과 관계는 보다 위태로워질지 모른다. 이것이 혹시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

3)우리

6-7개월에 걸쳐 공부하면서, 공부 그 자체보다 공부가 현실감각과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새롭고 극적인 느낌이었다. 현장의 목소리가 책 속의 문장을 생생히 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주변을 살펴본다. 해군기지 건설로 마을이 찢어진 강정이 있다. 4대강 사업으로 터전을 잃은 두물머리와 7년째 송전탑 건설과 맞서는 밀양이 있다. 이 비슷한 모습이 얼마나 많았나.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또 얼마나 일방적이었나.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말하는 이들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보상논리뿐이다. 이 프레임은 얼마나 사람들을 절망케 했는가. 나는 아연했다.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 앞에 그들은 한낱 이익을 말한다. 경제의 주체들이 바로 그 경제의 횡포(이익과 성장의 논리)에 찢어지고 해체되는 광경은 이 세상의 아이러니였다. 40년간 농사지은 농부의 땀방울 가득한 터전은 수치로 계산돼 부동산으로 넘어갈 뿐인 것이다. 자연과 인간과 문화는 다만 거래의 관계, 다만 교환의 집적일 뿐이다, 라고 우리는 말해야 하는 걸까.

물질과 거래로 이루어지는 이 폭력적이고 불안한 ‘관계’가 넘쳐날수록, 경제가 공동체와 그 조직을 도리어 거느리고 있는 이 불편한 광경을 낯설게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소규모 부족집단에게서 발견되는 공산주의, 상호성, 재분배 등의 원칙들은 소규모 경제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소규모 부족처럼 경제행위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그것은 사례에 불과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눈을 기르는 것, 낯선 감각을 키우자고 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인간의 본성을 문명의 기초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고대 시대에도 시장은 엄연히 존재했으며 시장의 효용과 영역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시장은 인간관계의 촉진이라는 연장선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이 출발이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출발을 떠받친 인간의 일상적 도덕감은 변함이 없다. 본래 경제는 문화적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사회’속에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문화적 특성에 의해서 적절한 규제가 이루어진다. 만약 시장으로 대표되는 이익과 계산의 논리가 공동체의 사회적-문화적 특성을 따돌리고 저만치 독자적으로 홀로서기를 시도한다면 그렇게 부수적일뿐이었던 것이 인간관계의 노골적인 행동양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가까이 소중한 이웃과 터전은 언제나 위태로울 것이며 우리의 삶도 피폐해져만 갈 것이다.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시장논리와는 다른 청사진을 구현할 수 있다. 다른 삶을 모색할 수 있다. 현장에서 난 그것을 느꼈다. 활동가란 그런 게 아닐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 반대와 투쟁을 그렇게 이해한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다른 방식을 고민하고 직접 행동하는 사람들. 그것이 경제든 아님 다른 어떤 것이든, 스스로 기획하고 만드는, 현장의 실험가들이 바로 우리가 활동가라고 부르는 이들이 아닐는지. 다른 것을 고민하는 그런 ‘활동’에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부’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채 : 그 첫 5000년>의 힘을 빌려 인간과 경제의 분리가 아닌 유기적 관계를 말했다. 긴 글 끝에 남은 결론은 바람뿐이다. 우리가 거래와 교환의 경제가 아닌 다른 경제를 고민하고 행동할 때 우리의 다른 행위에서 바로 다른 질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의 어떤 사회적 동기에 주목할 것인지. 어떤 전망을 가질 것인지. 어떤 눈으로 세상을 해석할 것인지. 전적으로 우리의 결정에 달린 것 같기 때문이다. 경제란 따로 떨어진 영역이 아니고 우리들의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행위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응답 1개

  1. 말하길

    부채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이야기들, 재밌게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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