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공부하고, 놀고, 이야기하자 (1)

- 박카스(수유너머R)

2년전에 위클리 수유너머에 서평코너 무한독전을 진행했다. 그때, 서평코너에서 함께 했던 무주에 사는 정현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1년정도가 지나 그때 만나뵈었던 정현의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올해초 가정연대 홈스쿨링 친구들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서로의 소개를 나누고, 6명의 친구들이 수유너머R에서 만났다. 공부를 시작하며 모임이름도 만들었다. 무주에 사는 규현이가 ‘공부하고, 놀고, 이해하자’ 라는 이름이 어떻냐고 제안을 했고, 내가 우겨서 ‘이해하자’를 ‘이야기하자!’ 로 바꾸어 불렀다. 책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전태일 평전, 그리스 비극 중 <아이스퀼로스의 작품>등을 읽기로 했다. 그리고 6개월 뒤에는 에세이 한편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대로 무언가를 발표하기로 했다.

1. 니체, 투쟁으로의 공부!

첫 모임 시작 후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도덕의 계보>를 일 년 전쯤 수유너머R의 루니라는 공부모임에서 읽고 강의를 들었다.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에 아픔과 동시에 기쁨으로 다가온 경험이 있어서 친구들도 <도덕의 계보>를 읽고 ‘철학공부에 대한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것’이라고 상상을 했다. 그러나 요약문을 미리 올려놨음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어렵다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 역시 책을 다시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스스로 다시 책을 이해하고자 했고, 다시 요약문을 썼다. 해석들을 가지고 니체의 말을 잘 전하고자 니체가 살로메에게 연애편지를 쓴다고 가정하여 편지글을 써보기도 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람 중에는 더 높은 것을 행하는 사람이 있소.’
이 말을 듣고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럼, 더 착하고 선한 사람이 있지.’ 혹시 당신은 이렇게 말하시려나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 한 행동, 주변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면 당신은 ‘사람이라면 응당 이래야지’라는 말을 줄곧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때로 어떤 사람이 방화와 폭력을 행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때, ‘어쩜, 저게 저게 사람이니. 저게 악마지! 저건 사람도 아니야! 라고 쉽게 말하고 사건의 맥락을 들어보지 않는다면 상황은 꽤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한 누군가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매몰차지냐는 말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자.’ 이렇게 당신이 말하고 있다면 나는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대 부디 사람이라는 것에 괴로워하며 일찍 지쳐버리지 말라고요.
선과 악의 구분. 나는 이것 대신에 좋음과 나쁨이 있다고 당신께 전합니다. 선한사람, 악한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고 말입니다.
(…중략)
친구들은 조금 이해하기가 쉽다고는 했으나 편지를 읽으면 굉장히 ‘오글거리게 된다’(^^)고 답을 보내왔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는 갸우뚱이었다. 수유너머R 연구실에 모여 <도덕의 계보>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에서야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R 세미나실에 모여서는 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에 대해서 거침없는 질문을 할 줄! 아는 규현군의 물음과 답으로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먼저, 줄곧 이야기되던 문체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니체는 지금 술을 먹고 글을 쓰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보세요. 여기 이 부분, 스스로 말한 것을 번복까지 하면서 갑자기 느낌표를 세 번 찍었다구요.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내뱉은 말을 이렇게 귀기울이면서까지 들어야할 이유가 아니.. 이유를 따지기 전에 전 못 듣겠어요.’

박카스 : 다른 친구들은 어때요?

오름 : ‘난 좋은데? 솔직해보이잖아. 난 구어체가 좋아. 그 사람이 그 말을 할 때 상태를 알 수 있잖아? 왜 우리도 막 급 흥분할때도 있고, 너무 중요하고 절실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도 하잖아.’

수경 : 나도. 오히려 술 먹고 쓴 게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박카스 : 나도 좋아. 여기서 느낌표는 의도적으로 찍힌 것 같애요. 니체가 찍은 느낌표는 급흥분하여 마구 찍은 느낌표가 아니라, 그 말에서 행해지는 감각도 잘 전하기 위해 말의 뉘앙스까지 담아 보내려는 의도로 찍힌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요.

성학 : ‘어.. 문체가 나에게는 어떤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나는 어떤 글을 쓸 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말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니체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감성적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요. 19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평가 받는 것에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도 그 문체가 뭔가 나를 흔드는 부분이 있어요.’

규현 : 나도 어느 부분 감성을 섞어 표현하는 것은 좋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느낌표 세 개는 너무!! 아무튼 문체는 그렇고요. 도덕의 계보에서 죄라는 개념에 기원은 부채라는 말은 독일만 벗어나면 아무 근거가 없어집니다. 왜냐면 일단 한자 罪(죄)와 負債(부채)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발음, 뜻, 모양까지 말이죠. 그리고 영어에서 죄를 뜻하는 crime, guilt, sin과 부채를 뜻하는 debt, liabilities, loan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니체가 라틴어나 그리스어에서 저런 증거를 찾아서 가지고 왔다면 저도 부분적으로는 납득했을 겁니다. 동양에는 무슨 소용이 있어 하면서 툴툴대긴 했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니체는 많고 많은 언어 중에 서양 언어사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독일어를 증거로 들고 나왔습니다. 애초에 언어를 가져다가 증인으로 내세우는 건 간접적인 근거밖에 안되지만 그 근거마저도 독일만 벗어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박카스 : 음 그렇게 볼 수 도 있군요. 그렇다고 꼭 그 우연성이나 흐름을 부정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어요. 요즘 한국에서 쓰는 말 중에 함께 먹은 음식값을 낼 때 ‘쏜다’ 라는 말을 하잖아요. 이때 좀더 공격적인 뉘앙스가 담겨있지 않나요? 낸다와 쏜다로 어휘의 사용이 바뀔때 서로 간의 우위에 있는 사람을 확인시키는 느낌을 더 강하게 가지고 가지 않나요? 이걸두고, 명확한 근거를 확인할 수는 없겠죠.

규현 :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니체가 설마 초인, 혹은 초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 세상은 제가 꿈꾸는 미래와 전혀 다른 것이거든요.
물론 결국 니체가 꿈꾼 미래나 제가 꿈꾼 미래나 둘 다 일반 시민은 비슷한 삶을 사는 미래였을 겁니다. 하지만 계급 순환이 잘 되고 일반 시민에 권리와 주장이 강한 힘을 발휘하던 로마도 절대 권력이 되자 차츰 타락해서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부패한 귀족들의 나라>같은 식으로 선입견이 박혀버렸습니다.
만약 절대 자리에 오른 초인, 혹은 초인들이라면 그들이 타락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게 초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초인이 타락해 버리면 그 나라는 시리아와 같은 나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소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그 소수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나라를 위한다는 전제만 깔면 완벽한 세상이에요. 에너지를 다투는데 소비하지 않고 좋은 곳에 모두 돌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 전제가 영원하길 바란다면… 니체는 차암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겠군요.

성학 : 니체가 독재권력을 바란다기 보다는 그런 ‘초인’성을 회복하자는, 가치전도의 그 때가 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한 말들 같은데? 하지만 저도 좀 아리송한 부분이 있는데요. 니체는 동정이나 연민은 없애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 살다보면 힘들어하는 사람이나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게 있는데 그게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너무 잔인한 세상이 되는 거 아니예요?

박카스 : 나도 그 대목들을 잘 읽어나가고 싶어요. 니체는 민중과 엘리트라는 구분으로 강자와 약자를 말하는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나를 들여다보며 다르게 또 다르게 만남으로 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의 강자와 보여지는 나에 종속된 사람으로 약자들을 구분하려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다르게 느낄 수 있는 함을 시도하는 자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불려지는 좋음을 취해가려는 자들을 구분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수 엘리트들의 지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니체는 그런 ‘나’를 다루려는 건강하고 천진난만한 친구들이 함께 하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동정은 오히려 나를 다루지 못하는 자들, 못하게 된 자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의 상태’에 머물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또 니체는 아마도 ‘나’를 다루고자 하지 않는 다른 친구의 이상한 점을 발견할 때 눈감는 무력감을 못 견디지 않았을까 싶어요. ‘너 왜 그래? 너 요즘 이상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자기 만의 방식으로 힘을 북돋아 줄 수도 있고요. 아무쪼록 이 부분에 대해 나도 더 알아가고 싶어요. 그리고 니체가 말하는 위번멘쉬 ’상태‘의 사람들은 다수를 지배하고 싶어할까? 그건 의문이예요. 누가 자기에게 순종하면 토하거나 어지러움 증에 빠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있어요.

(어우, 그래도 니체 너무 어려워요!)

이렇게 3개월간 니체의 텍스트를 두고 머리를 싸매가며, 만나며, 투쟁하며 지냈다. 공부를 준비하고 친구들과 말을 나누는, (투쟁하는^^) 과정에서 공부거리들이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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