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5호] 누가 대학을 점거했는가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유시버클리 대학생들의 등록금 투쟁-

누가 대학을 점거했는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유시버클리(UC Berkeley), 유시엘에이(UCLA) 등 ‘유시(UC)’ 계열이 모두 여기 소속이다. 그런데 작년 11월 유시버클리와 유시산타크루즈에서 미국 대학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학생들의 건물 점거 투쟁이 일어났다. 등록금 인상이 그 발단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대학지원 예산을 6억3천7백만 달러나 삭감했다. ‘터미네이터’ 슈워츠제네거가 이끄는 주정부의 재정이 정말 ‘끝장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대학은 재정난을 이유로 등록금을 32% 인상했다. 주정부의 위기가 대학으로, 대학의 위기가 학생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익이 이런 식으로 내려오는 일은 결코 없지만 손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떠넘겨진다.

예산 문제에 봉착한 학과나 연구소들은 기업 펀드를 끌어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상황이 주립대학과 공교육의 사유화(privatization) 논란을 불러왔다. 등록금이 사립대에 가까워지고, 사적 자본의 대학 지배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교육의 공공성은 무엇인지, 공교육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학은 과연 어떤 곳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이든 사람이든 위기 시에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하지 않던가. 예외적 사태는 일상의 중단이지만 그것은 또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성실한 고발이기도 하다. 고등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방기’로 인해 대학의 기업화와 사유화는 이제 역사를 말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한편으로는 대학이 취업준비 학원이 되었고 교육이 신입사원 연수와 다를 바 없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 자체가 이윤에 혈안이 된 기업으로, 소위 ‘아카데미 캐피탈리즘’의 시대를 열어나가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니고, 미국 일본만의 것도 아니다. 세계의 대학들은 이제 서로에게 일어난 일의 정체를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공통적이 되었다.

대학기업

다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사태로 가보자. 등록금 인상안이 작년 9월 예고되자 학생과 교직원 수천 명이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들을 가로지르며 행진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연대동맹(Solidarity Alliance)’이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그리고 10월말 버클리 학생들은 ‘공교육을 구하기 위한 회합(Mobilizing Conference to Save Public Education)’을 열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을 구하자(Save the University)’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11월 말 등록금 인상안이 결국 대학평의회를 통과하자마자 40여명의 학생들이 유시버클리의 휠러홀(Wheeler Hall)을 점거했다. 아래 동영상은 이때의 상황을 독립다큐 작가 브랜든 조단이 촬영한 것이다. 점거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지만, 장대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이 건물을 에워싸고 점거 학생들을 응원했다. 12월 초에도 또다른 60여 명의 학생들이 휠러홀을 4일간 점거했고 다시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런 점거는 유시산타크루즈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에서 대학 점거는 반전시위가 절정에 이른 6-70년대 이후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문제 삼은 전쟁은 저 멀리 베트남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 전쟁터는 자신의 대학이다. 버클리 학생들의 등록금 투쟁이 약소민족을 침략한 자기 나라를 비판했던 선배들의 투쟁만큼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자기 스스로를 해방되어야 할 약소민족, 차별인종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거라면, 이는 선배들의 도덕적 투쟁보다 더 절실하고 더 진실한 투쟁일지도 모른다. 해방의 당사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인민을 위해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베트남 인민으로서 싸우는 일은 더 중요하다.

일어나자!

이 점에서 유시버클리와 유시산타크루즈 대학생들의 휠러홀의 점거는 아주 시사적이다. 대학이 기업제국에 의해 식민화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잠시 고지 하나를 상징적으로 탈환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했다며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 대학은 오래 전에 점거되었고, 대학당국이 총독부 행사를 한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 않은가. 언어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말해 두자면, 지금 관건은 ‘점거’가 아니라 ‘탈환’이다. 대학이라는 배움의 공동체를 어떻게 탈환할 것인가.

– 글 / 동영상 자막 : 고병권(수유너머 R)

응답 2개

  1. BD말하길

    한국에서도 new movement가 가능한지에 대한 매우 어두운 소견.

    필자는 이제 매우 어두운 우리 학번을 말하려고 한다. 바로 0으로 시작하는 학번이다. 그리고 필자는 01학번이라고 불리운다.

    학번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20대, 그 또래의 나이에는 분명히 대학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위험하지만 이것을 전제로 해서 나는 논의를 진행하겠다.

    우선 이전 학번 세대들의 특징들을 개괄하도록 하자. 공통점은 이것이다. 학번들은 언제나 이전 학번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극복은 또 다른 싸움이고 투쟁이었다.

    7로 시작하는 학번. 어두운 시대에서 어두운 대학을 다녔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오직 문학이었다. 이 때에 문학잡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8로 시작하는 학번. 7은 너무 조용했다. 7을 극복하기 위해 8은 싸우기 시작했다. 처절하게 터지면서도 싸웠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이든 반의 성공이든, 실패이든 87을 맞이 했다. 어쨌든 그들은 화염병의 학번이었다.

    9로 시작하는 학번. 8은 만나기만 하면 운동을 얘기 했다. 그러면서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마초가 많았다. 9는 이것을 극복해야 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 큐어이론의 담론이 수입되었고, 수많은 종류의 갖가지 동아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0으로 시작하는 학번. 극복은 없었다. 그냥 있었다. 8처럼 사회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9처럼 다양성과 이론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그들에게 관심과 고민은 세 가지다. 토익과 학점과 인턴. 7,8,9,는 초중등교육을 스스로 극복하려 했다. 0은 그 업악적 교육의 성격을 거부하지 않았다. 국영수가 곧 토익과 학점과 인턴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등록금문제를 가지고 정부와 재단과 싸웠다. 등록금이 매년 오른 것은 사실이었다. 등록금 반대 서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서명이 끝이었다.

    토익이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토익의 높은 전형료는 정부가 나서서 한국형 영어시험을 도입함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토익의 인플레가 나타나자 기업들이 나서서 토익스피킹을 도입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발표했다. 0은 토익 900을 찍고, 토익스피킹 학원을 다녔다. 토익 같은 영어시험 제도 자체를 없애자고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복도를 청소하시는 분들과 수위아저씨들이 해마다 바뀌었다. 그들의 작업복 한쪽 가슴에는 학교 이름이, 다른 한쪽에는 이름 모를 용역회사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비정규직 직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0은 도서관에서 행정실에서 불편하다고 짜증을 늘어놓았다. 대신 재단과 본부가 대기업 이름이 박힌 건물을 세워주고, 화장실 비데를 설치해 준다고 감동했다.

    비정규직 강사들이 말 그대로 보따리 싸들고 밖으로 나앉았다. 0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학점 올려 달라고,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했다.

    0은 취업을 위해 경제지와 일간지를 보았다. 학교신문 따윈 보지 않았다. 4년 동안 교지를 열어 본 적은 없다. 학교언론은 학교홍보실로 자리를 내주었다.

    대학에서 0은 이렇게 서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그런 0은 순수한 습성을 알고, 이들을 차례로 하나씩 입에 삼키는 늑대들이 그들 앞에 서있었다.

    청년인턴의 도입.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일자리가 생겼다. 정부가 만들어 준 청년인턴! 이제 지하철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턴을 갈아탄다. 100만원에서 110만원으로. 6개월짜리 일자리.

    이런 제도 자체가 치사했다. 그리고 묵묵히 다녔다.

    공무원, 임용고시, 공기업등의 일자리를 정부가 솔선수범으로 줄이고 있다. 그래도 묵묵히 그 좁은 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다닐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늘려달라고 주장하지 못했다. 싸우지 못했다. 그런 말은 고귀하게 대학 나온 0이 할일이 아니다. 데모 같은 것은 교통 불편을 야기하며, 자칫하면 법을 어기기도 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80년대나 있었던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0은 이렇게 10년을 보냈고, 졸업 할 때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가만히 서 있었던 그 결과를.
    극복은 없었다.

    UC의 영상을 보며, 느꼈다.
    0도 싸울수 있을까?
    파업에 그렇게 차갑던 0이 저들처럼 연대할 수 있을까?
    회장님의 명예학위와 뭇 국회의원의 강연에 반대하면, 학습권 침해라고 그렇게 말하던 0에게 연대를 제안 할 수 있을까?
    지금 인턴으로 일하는 0은 싸울 수 있을까?
    학교에 남아있는 0들은 싸울 수 있을까?
    왜 이렇게 궁상맞게도 살아왔을까?
    0은 너무 묵묵하다. 그래서 너무 바보 같다. 그들은 시키는 데로 행동한다. 따라서 시키는 사람은 굳이 불편할 것이 없다.

    0은 실패했다. 실패한 학번이다. 그리고 실패한 세대이다. 점거와 투쟁은 0의 사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순응과 복종만이 그들의 사전을 지배할 뿐이다.

    매우 어둡다.

  2. 행인 3말하길

    그래선지 대학 건물을 점거, 아니 ‘탈환’한 학생들을 테러리스트처럼 진압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소름까칩니다. 더욱 슬픈 건 화염병 하나 던지지 않고, 각목 한번 휘두르지 않고, 한 사람씩 포박당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아, 미국 경찰은 정말 모섭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여차하면 총 쏴대니…미국 대학엔 무장 경찰이 상주한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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