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민주주의를 불온한 것으로 만들라” — 저들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가는 초극의 행진

- 조희연(‘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이 글은 11월 4일 <프레시안>에 실린 글을 가필한 것임을 밝혀둔다.

10월 4일 제주 강정을 출발한 생명평화대행진이 11월 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폐,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 강제철거 금지, 4대강 원상회복과 핵발전소 폐기, 강원도 난개발 중단 등의 요구를 내걸며, 이 땅에서 배제된 자들,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표출해내는 2012생명평화대행진이 한달 동안 진행되었으며, 어제 12일에는 대한문 쌍용자동차 텐트 옆에 ‘함께 살자 촌’텐트를 세웠다. 지리산, 평택 등에서 ‘민회’를 개최하고 전국의 고통의 현장과 투쟁현장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진 대행진은, 전국에 산재해서 전개되고 있는 아픔과 분노, 투쟁의 현장을 연결하는 ‘흐름의 투쟁’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생명평화대행진이 점거투쟁으로 전환된 셈이다. 점거는 주류의 질서에 의해서 점유된 공간을 탈환하여 주류에서 배제된 목소리, 요구와 주장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청앞의 ‘점거’는 생명평화대행진의 투쟁에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행진의 과정에, 문정현 신부와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중심에 서서 헌신과 희생으로 이 대행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모습이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나는 생명평화대행진이 갖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평화대행진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운동, 우리를 사회를 바꾸어가는 깊은 의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들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

첫째, 이 대행진은, 우리 사회 속에 내재화된 ‘저들의 불가피성’, 즉 저들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한 ‘초극(超克)의 행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단적으로 쌍용(S), 강정(K), 용산(Y)은 ‘저들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항하여 그것을 깨뜨리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쌍용자동차의 현장을 보자. 저들은 무자비한 경찰폭력과 자본폭력으로 진압하고 정리해고를 하면서 말한다. 치열한 국제경쟁의 와중에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 그리고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의 회생을 위해서, 쌍용 노동자의 해고는 불가피하다고. 23명의 쌍용 노동자가 죽어가도, 김정우 위원장이 죽음을 무릅쓴 단식을 24일째 이어가도, 그들은 ‘마힌드라’라고 하는 외국계 기업에 대해 정부가 왈가왈가할 수 없어 불가피하니 참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국민경제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유재산과 경영권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저들의 불가피성이다.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는 어떤가. 국가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남방해상으로 진출하는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저들은 해군기지가 ‘미항(美港)’으로 건설하게 되므로‘ 제주의 관광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바로 강정에서 저들의 불가피함에 의문을 제기한다.

용산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저들은 도시 개발을 위해서, 그리고 용산을 국제도시화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세입자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보면 정책집행을 할 수 없으므로,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불법점거 농성이므로 폭력진압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의 이해를 위한 불가피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탈식민주의적 여성학자 G. 스피박은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적인 물음과 논문을 제기한 바 있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약자와 하위주체들이 ‘서발턴(subaltern)’이라고 할 때, 스피박은 ‘저들의 불가피성’에 근거한 지배의 언어로 구조화된 지식공간 내에서 서발턴들이 스스로의 요구와 목소리를 드러낼 수 없음을 도전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언어가 없고, 담론이 없는 서발턴의 요구와 목소리는 그냥 ‘신음’이 된다. 그리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그냥 ‘주어진’ 것으로 밟고 지나가야 하는 어떤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발턴의 목소리가 그냥 신음이고 그냥 소음이지는 않는다. 나는 생명평화대행진이야말로 서발턴의 목소리를 신음과 소음에서 공론의 공간에서 정당한 주장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저들이 말하는 불가피성의 신화를 넘어서는 과정이고, 우리 속에 내재한 그러한 불가피성의 논리를 우리 스스로가 초극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근대화와 성장이라고 하는 과거의 불가피성의 신화

어느 시대에나 우리 모두는 국가와 민족, 사회, 사유재산, 경영권, 안보, 질서를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하는 어떤 전제들 위에 살아간다. 사실 박정희시대에도 그러했다. 조국근대화를 위해서, 수출증대를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 노동자, 농민, 빈민은 희생을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말했다. 노동자와 민중의 기본권은 불가피하게 희생되어야 한다고 저들은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발전은 그러한 불가피성의 신화를 깨뜨리는 과정이었다. 노동자와 민중, 국민들이 박정희가 말하는 그 불가피성이, 사실은 박정희정권의 거대한 지원을 받으면 성장하는 재벌들을 위한 불가피성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그리고 남침을 막고 안보를 지키기 위해 유신과 긴급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하는 그들의 불가피성이 사실은 박정희와 박정희세력을 위한 불가피성임을 알고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부마항쟁이 탄생했고 87년 6월 항쟁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왕 저들이 공동체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불가피성을 말하는 저들 집단을 위해서, 미국을 위해서, 우리 사회의 가진 자들을 위해서, 재벌을 위해서, 기득권집단의 이해를 위해서 불가피했던 것이었다. 그 불가피성 속에 재가발로 쫓겨난 자, 정리해고로 생명의 기로에 선 사람, 비정규직화로 인해 삶의 고통에 처절히 노출된 자들의 목소리와 요구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불가피성의 신화와 논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있다. 심지어 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제주 해군기지는 참여정부에서도 진행되었고 이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서 출발한 민주정부 집권세력의 마음에도 이 불가피성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평화대행진은 바로 저들의 불가피성에 도전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불가피성의 신화를 초극해가는 행진이다.

국가와 자본에 ‘인간의 얼굴’을 요구하는 행진

둘째, 저들의 불가피성에 도전하여 저항했을 때 어김없이 거기에는 국가폭력과 자본폭력(그것의 변형된 용역폭력)이 주어졌다. 저들이 불가피하다고 하고 우리는 불가피성을 넘어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저들에게 요구했을 때 그들은 폭력으로 응대했다. 그들의 불가피 논리에 의해 강정에서 행사된 국가폭력, 평택에서 행사된 국가폭력과 자본폭력, 용산에서 행사된 국가폭력과 도시개발 자본의 폭력에 맞서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고 노동자가 싸우는 것이고, 아름다운 강정의 자연에서 살 수 있는 주민과 공동체의 권리를 위해 강정주민들이 싸우는 것이며, 세입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용산세입자들이 싸웠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명평화대행진이야말로 저들의 불가피성을 지키기 위해 행한 국가폭력과 자본폭력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국가와 자본에게 ‘최소한의 인간의 얼굴’을 부여해가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적으로 국가는 ‘폭력의 합법적 독점체’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근대국가에서는 국가권력의 담당자들이 국가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이 상정하는 불가피성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되어져왔다. 그 불가피성에는 자본의 경영권과 ‘합법적인 소유자들’의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성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존재론적 근거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의 입장에 서지 않는 시각에서 보더라도, 근대사회에서 국가와 자본의 불가피성은 민중들의 요구와 이해를 고려하지 않고 가진 자들의 요구와 이해를 중심에 놓는 ‘불가피성의 논리’ 위에서 행사되었다. 특히 초기산업화 과정 및 근대 초기국가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 비인간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 폭력이 행사되었다. 초기산업화 단계인 박정희 시대에 국가의 폭력이 국가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가진 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비인간적으로 행사되어져 온 기억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약자들의 투쟁, 그리고 오늘 전개되는 생명평화대행진은 그러한 국가폭력과 자본폭력의 비인간성에 도전하여, 국가와 자본에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논리를 요구하는 과정이고 희생을 통해서 그것을 강제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국가와 자본에 인간의 얼굴을 갖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소외된 존재들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생명평화대행진은 바로 국가폭력과 자본폭력에 의해 ‘밀려난 존재들’이 다시 거대한 행렬을 이루어 그 폭력의 논리,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과정이며, 이것이 성공하게 될 때—그것은 국가와 자본의 논리를 궁극적으로 바꾸지 못할 지라도–국가와 자본에 이전과는 다른 최소한의 인간적 얼굴을 만들어주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소외된 자들, 국가폭력과 자본폭력에 의해 밀려난 ‘분노한 자’들이 행진인 생명평화대행진이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최소한의 ‘윤리성’, 인간성을 강제해 가는 행진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해가는 행진

셋째, 나는 생명평화대행진이야말로, 우리들이 쟁취했던 ‘87년 식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확장해가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87년 이전의 민주주의운동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고 한다면,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의 민주주의운동은 ‘회복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독재의 유산을 척결하기 위한 ‘민주개혁’ 운동이었다. 여기서 민주개혁은 주로 독재적인 국가와 독재 시대의 부패한 대자본(재벌)을 민주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에는 선거의 공정성, 절차적 합리성, 투명성 들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민주개혁을 통해 확립하고자 하는 민주주의는–강정과 쌍용, 용산투쟁이 대항하는—국가안보의 논리, 국제경쟁력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 재개발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는 그러한 저들의 논리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구성적 외부’를 만들면서 문제적으로 작동한다

사실 돌이켜 보면 독재 하에서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모든 것(everything)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민주주의는 ‘문제의 대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않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다시 보아야 한다. 사실 “현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독점권력은 민주주의를 부단히 자기 방식으로 ‘식민화’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이해와 권력을 ‘영토화’해 지키고자 한다. 이렇게 현실 민주주의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독점적 지배권력에 의해 식민화되고 포획됨으로써 민주주의는 허구화된다. 이러한 포획과 식민화는 다양한 약자 집단이 비록 민주주의 내부에 위치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의 이해와 요구가 대의되지 못하고 배제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급진민주주의연구모임 데모스 편. <데모스-급진민주주의리뷰> 제1호. 도서출판 데모스미디어). 모든 국가는 자신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타자를 갖고 있다는 말도 이런 의미이다.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의 ‘구성적 외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부단히 국가권력, 관료권력, 대표자권력, 자본권력, 시장권력,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인 다수자권력에 의해서 포획·식민화되면서 민주주의 내부에서 배제되는 ‘내부에 있으나 외부화된 존재’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억압적 관계 및 불평등관계를 은폐하는 기제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다. 아감벤의 표현을 빌어보면, “구성적 외부는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전히 예외 형태로, 즉 배제를 통해서만 포함되는 어떤 것으로서 정치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평화대행진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재구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살리기 위한 운동이다. 현실권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식민화가 확장되어 민주주의의 일부로서의 (제도)정치와 사회의 괴리가 확장되어 배제된 존재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인)민의 요구와 이해를 실현시키는 통로로서의 기능이 소진된 상황이 될 때, 우리는 형식적으로는 선거민주주의가 작동하지만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의 위기’가 내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쌍용이 상징하는 정리해고자들과 비정규직노동자들, 강정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국가안보의 논리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자신의 대지’로부터 추방되어지는 자들, 용산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고 주변으로 주변으로 밀려나야 하는 존재들이 바로 현 시기 한국민주주의의 ‘구성적 외부’이다.

민주주의를 불온한 것으로 만들라

2012년 대선에서의 화려한 경쟁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화려한 선거민주주의 속에 있으나 민주주의적 통로를 통해 목소리가 들려지지 않고 배제되는 구성적 외부가 있을 때 그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민주주의(민주개혁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급진화시켜 외부화되어 있는 목소리를 내부에서 들려지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저들의 불가피성의 논리를 넘어 우리의 민주의를 더욱 불온한 것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중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해갈 수 있어야 하며, ‘일제고사를 보지 않을’ ‘급진적 자유권’을 확보해가야 하며, 각종 사회적 차별을 획기적으로 극복해가야 하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가야 할 여정이 아직도 멀다면 그 여정 기간 내내 민주주의를 여전히 ‘불온한 언어’, ‘급진적 언어’로 남아 있게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흘러간 옛노래’가 되지 않게 하려면 이를 부단히 불온하게 하고 급진화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평화대행진은 우리의 민주주의운동과 사회진보운동의 내용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거대한 행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불가피성의 신화 속에서 배제된 자들의 요구와 이해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보장되도록 하는 그런 민주주의의 재구성운동이다.

하늘(SKY)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

12일 ‘함께살자촌’에 ‘입촌(入村)’하면서 발표된 기자회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2생명평화 대행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외양이 다르고, 우리 각자가 경험하는 질곡의 양상이 다를지라도 우리의 처지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우리를 내어쫓는 힘의 질서가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염원합니다.함께 사는 세상을! 우리는 열망합니다. 함께 사는 나라를! 우리는 만들 것입니다.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그렇다 이 생명평화대행진은 새로운 사회와 국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행진이다.

생명평화대행진의 주체들은 스스로를 SKY라 명명했다. 쌍용(S), 강정(K), 용산(Y)의 앞자를 따 SKY라고, 그리고 하늘이라고 명명했다. 그렇다 우리 사회의 다수의 소외된 존재들, 배제된 존재들, 저들의 불가피성의 신화 속에서 자신의 요구가 가리워지는 존재들이 진정으로 이 시대의 하늘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인내천(人乃天)’의 주장은 우리의 전통 속에도 있다. 이제 그 하늘된 존재들의 행진이 곧 대한민국을 종단하여 이제 서울에 닿는다. 서울은 저들의 자본과 권력이 집중된 곳이다. 바로 그 서울에서 이제 하늘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던 존재들은 이제 귀를 열어야 한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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