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

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에서 독특했던 점

- 이영남(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우리의 신체성(身體性) 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1960-1970년대 일본의 급진적 장애인운동단체인 푸른잔디회(뇌성마비 장애인단체)가 외쳤던 구호입니다. 중증장애인들은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며, 따라서 속성상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경쟁이 요구하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대다수 장애인은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생산(노동)에서 배제될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교육, 참정, 이동, 주거, 사생활, 일상생활 및 관계 맺음 등 전반에 걸친 권리를 박탈당하고, 수 십 년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도 허용되지 않는 시설과 집을 온 세상 삼아 살아가게 됩니다. 때문에 시설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탈시설-자립생활을 이야기하는데 가난과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의 활동가 두 분이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기고한 글의 일부분이다. 현재 시설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장애인에게 직접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시설관리자에게 지급되어 관리되고 있는데, 이런 구조에서 비리가 생기고 있다. 이 글은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문제제기로 쓴 글이지만, 사실 이 짧은 글에서도 장애의 몸 자체가 갖는 독특함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발바닥 스토리텔링은 중증장애인 워크숍이었고 비장애인 워크숍과 다른 독특한 점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독특함에 대해 말해본다.

(1) 협업체계

스토리텔링 동무들은 중증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증 장애인’은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일상생활에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식사나 잠자리, 용변처리, 외출 등의 신체적 활동을 위해서는 신체적 도움이 있어야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가누기 힘든 환자에게 간병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중증 장애인에게도 활동보조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현행 정부지원으로는 활동보조 시간이 너무도 제한적이어서 자유롭게 생활하기 어렵다. 더구나 거리에는 휠체어가 다니기에는 턱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아무리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더라도 휠체어를 타고 스타벅스에 들어갈 수는 없다. 거기에는 턱이 있기 때문이다. (비단 스타벅스만 그런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세히 보면 다른 곳과 달리 스타벅스에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턱을 없앤 곳이 많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큰 일처럼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매번 워크숍이 열렸던 신촌에 모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마침 여름 장마가 길었고 폭우가 내릴 때가 많았다. 여러 번 모임이 취소가 되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우리는 모였다. 우산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설령 우산이 있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우산을 들고 휠체어를 탈 수는 없었기에 중증 장애인은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한다. 워크숍에 나온 동무들의 몸은 비에 젖었고, 젖은 옷을 입은 몸에서는 김이 모략모략 피어 올라왔다. 모임을 운영하던 발바닥 활동가는 걱정스러운 듯 몸을 닦아 주었다. 발바닥 활동가는 연락하기, 대화내용 기록하기, 커피와 빵 먹는 것 보조하기, 화장실 가는 것 보조하기, 비에 젖은 몸을 닦아주기, 비가 그치지 않으면 돌아갈 장애콜밴을 부르기,… 발바닥 활동가의 헌신과 열정은 빛났다. 이런 아름다운 협업체계가 없었다면 스토리텔링은 불가능했다. 수고한 이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헌사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물리적인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아무개의 헌신과 열정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장애인 워크숍은 이런 협업체계가 없으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발바닥 활동가 몇 분이 활동보조를 위해 참여했으며 장애인 인권활동가의 참여도 있었다)

임상역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임상동무의 협력도 있었다.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는 글을 쓰기가 쉽지 않고 책을 보기도 어렵다. 처음에는 책을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몇 권의 책을 준비했으나 책을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려웠다. 참여한 워크숍 동무들에게 가급적 글의 형태로 발표문을 작성해서 발표할 것을 권했으나, 이것도 쉽지 않았다. 손을 제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써오는 것이 매우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컴퓨터를 이용해서 워드로 글을 쓸 수 있는 분은 직접 써왔다. 그런데 한 페이지 발표문을 가져온 한 동무가 말하기를 그것을 작성하는 데 꼬박 1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쓰고 싶은 것이 많아도 물리적인 시간이 허용하지 않았던 셈이었다. 어떤 동무는 형식을 갖춘 글을 쓰기 어렵다며 하고 싶은 말을 메일로 보내왔다. 임상동무는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는 형태의 발표문으로 만들었다. 어떤 동무들은 아예 글을 쓰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임상동무와 워크숍 동무가 미리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토대로 임상동무가 발표문을 대신 작성했다. 어떤 형식으로 작성되었든 발표문은 출력물로 배포되지 않고 빔프로젝트 화면으로 띄어 모두 같이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글로 된 발표문이 굳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도 들고, 글을 읽기 불편한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도 든다. 더구나 직접 쓰지 않은 글인데 그것을 당사자의 발표문이라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아무리 대화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예를 들어 속기사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라면, 글을 쓰면서 숱하게 다른 문장과 단어를 떠올릴 것이고 애초 생각했던 줄거리를 벗어날 때가 많을 것이다. 대화나 구술이 글보다 취약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월을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글-발표문을 형식으로 해서 접근하면서 생기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들은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바닥 스토리텔링에서는 발표문을 준비하는 데에 임상동무-발표자 사이의 협업체계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중증장애에는 팔과 다리의 불편함 뿐만 아니라 언어장애의 측면도 있다. 스토리텔링 동무들은 비장애인이 말하는 것보다는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발음도 또렷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말하는 것이 힘겨워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과부 심정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 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했던가. 동무들은 매우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어떤 말은 먼저 알아들은 이가 큰 소리로 그것을 다른 동무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해나가자, 속도는 더디었지만 대화를 나누고 역사를 쓰는 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군중이 모였지만 대형 스피커가 있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앞에서 하는 말이 뒤까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앞에서 들은 사람들이 뒷사람에게 전달했고, 뒷 사람은 또 그 뒷사람에게 말을 전해주었다. 스피커가 없었고 앞에서 하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즉시 전달되진 않았지만, 3.1운동이 펼쳐지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워크숍 동무들 상호간의 협력은 특히 언어장애의 측면에서 빛이 났다.

우리는 동무가 느릿하게 말을 하면 마치 느릿하게 움직이는 기차에 오르듯 이야기 도중 이야기에 올라탔다. 우리는 잘 안다.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이나 KTX를 중간에 올라탈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로 보는 1930년대 경성 거리에는, 작은 전차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사람들은 정류장이 아니어도 길거리 어디에서도 그 곳에 올라탈 수 있다. 스토리텔링을 마치고 난 후 그 때를 회상해보면, 느릿하고 불분명하게 나오는 동무의 말을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그 낭만적인 장면에서 감동이 느껴진다. 진화는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업을 통한 상호부조의 길이라는 말이 있다. 러시아의 심리학자였던 비쇼츠키는 어린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연구하면서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협업을 통해 성장한다고 보았는데 이런 이론은 지금 서구의 심리학계나 교육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소하게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설적이게도 느릿하고 불분명하게 발화된 문장들은 서로의 협업을 촉진하는 장이 되었다. 정말 중증장애의 몸은 속도를 더디게 했지만 그로인해 빠른 속도의 사람들이 향유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번 스토리텔링 동무들은 어떤 때는 비를 맞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으며 어떤 때는 서로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다른 동무들이 알아듣지 못할까 큰 소리로 ‘통역’을 해주었다. 중증장애인 워크숍에는 일정한 협력체계가 필요했다. 이번 스토리텔링은 5.18 재단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런 협력체계에 필요한 지원금은 없었다. 이 점은 아쉬웠다. 아무튼 이런 협력체계는 장애의 불편함이기도 하겠지만, 자본주의 속도를 부정한 신체성 자체의 미덕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빠른 경쟁속도보다는 느릿한 협력체계가 보다 가치가 있지 않을까?

(2) 역사작업과 공동체 활동의 병행

임상역사 프로그램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독특한 점이 있었다. 임상역사 프로그램은 ‘내가 쓰는 나의 역사’라는 타이틀로 운영이 되었는데, 이 때 참여하는 분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있고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으로 같이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분들과는 ‘활동’을 같이 하기 힘든 면이 있는 반면, 공동체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분들과는 ‘공동체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보다 개방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이번 스토리텔링은 인권단체인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지역생활을 같이 하는 중증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업이었기에 공동체 워크숍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체 워크숍이 갖는 독특함에 대해 말해본다. 먼저 ‘가가호호 방문’ 사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번 발바닥 스토리텔링이 공동체 워크숍이긴 하나 중증장애인 워크숍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발바닥 스토리텔링 워크숍은 프로그램 성격상 임상동무와 워크숍 동무들이 중간 중간 따로 만나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예를 들어 화요일 밤 7시에 신촌 스타벅스에서 만나요,…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이유는 앞서 말한 활동보조인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처에 턱이 있어 집에서 약속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이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약속장소가 자연스럽게 현재 살고 있는 집이 되었다. 예상되지 않았던 ‘가가호호 방문’ 이었으나, 이 사건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전에는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서 부모도 만나고 가정환경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이 교사의 입장에서는 학생지도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었으나, 학생 입장에서는 교실이 아닌 집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인적 교육의 일환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의사의 왕진이 없어졌다. 그러나 병이란 생활습관이나 가정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사가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를 하는 것과 환자의 집에서 진료를 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심리상담도 마찬가지이다. 심리상담실에서 상담을 하는 것과 햇살이 들어오는 부엌에서 상담을 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가가호호 방문사건’은 워크숍을 이어주는 접착제였다. 집에서 만난다는 것의 의미는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차와 과일을 나눠 먹으며 방문자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이런 환대는 직접적 접촉에 의한 친밀함과 섞이면서 동무의 친밀함을 나누는 장이 되었다.

또 하나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 활동을 같이 했다는 점이다. 발바닥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임상동무는 뜻하지 않게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의 회원이 되었고, 발바다에서 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예를 들어 발바닥 후원행사를 겸하기도 했던 가수 강허달림의 공연에 참여했고 ‘도가니 해결’을 위한 문화제에도 참여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행사에 참여를 했다. 물론 모든 발바닥 행사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행동을 줄곳 같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관단체의 회원이 되고 활동을 같이 하는 방식은 공동체 워크숍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2010년에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임상역사 워크숍도 공동체 워크숍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상황은 비슷했다. 미국에서 공동체 워크숍 형식으로 열린 임상역사 워크숍은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나눔문화학교 교사 워크숍이었고 또 한번은 가주생협 조합원 워크숍이었다. 이 때도 워크숍은 3개월 동안 9번 진행이 되었다. 요컨대, 약속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딱 9번 만나’ 목표로 했던 역사 한 편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사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생협이나 문화학교가 역사 워크숍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별도로 본래의 생협활동이나 교육문화활동을 한다. 임상역사 작업은 이런 본래의 활동이 펼쳐지는 장소도 맥락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에 임상동무는 공동체 활동을 같이 했다. 예를 들어 해당 공동체 내부 토론회,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행사, 교실수업, 농장견학, 녹색평론 읽기, 동무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기… 기회가 되면 공동체 활동을 함께하려고 했었다.

이번 발바닥 스토리텔링도 이런 점에서 구체적인 양상은 달랐지만 공동체 활동이 병행이 되었다는 점은 비슷했다. 이런 점은 역사 워크숍이 공동체 워크숍 형식으로 진행이 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독특함이다.

응답 1개

  1. 말하길

    자신의 역사를 말하고 함께 기록하는 그 단순한 작업도 장애인에겐 수많은 문턱과의 대면을 요구하는 일이군요. 그치만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사회적 문턱들과 공동체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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