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먹을 것에 대한 예의

- 최요왕

20대 때 서울에서 자취를 했었다.
뭐 자취야 지방 소도시에서 재수시절에도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집도 가깝고 누나 동생이랑 같이 있었기 때문에 ‘주부’노릇까지는 하지 않았었는데 서울에서의 자취는 ‘주부’가 되어야 했다. 시장을 직접 봐야 했다. 헌데 생선을 사면 손질해준다며 대가리를 떼 내어 버리고 무를 사면 무청을 잘라내 버리고 뿌리만 주는 거다. 울 엄니가 보면 욕먹을 짓들이었다. 그냥 다 달래서 반찬을 해먹었었다. 고등어 대가리만으로도 밥 반 그릇은 먹을 수 있고 무청은 조금 질겨도 된장국 한번 끓여 먹을거리가 된다. 군 제대했던 때니까 벌써 20년 전이라 뭐 ‘예의“니 뭐니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먹을 수 있는 걸 안 먹고 버리니 아까웠고 찬거리에 드는 비용도 그만큼 줄어들 거라는 생각에 그랬었다. 어렸을 때 집에서는 다 먹던 것들이라 자연스럽게 그랬으리라 본다.
세상을 살면서 먹거리를 대할 때도 예의가 있어야 되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적잖이 웃기게 들릴 수도 있다. 뭐 요즘 세상이 그렇긴 하다. 먹기 편하게, 맛있게, 영양 많게, 거기에다 ‘안전!’하게 먹으려고들 하는 게 대세다. 먹기에 거칠고 조리에 세월이 걸리고 약간이라도 찝찝한 것들은 보통 ‘음식물쓰레기‘가 되거나 그 이전에 ’폐기물‘로 버려진다. 소위 상품화 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기냥 다 버려진다.
8년 전 귀농했을 때 제일 먼저 날 놀라게 했던 건 무를 출하할 때 무청을 잘라내 버리고 출하하는 걸 봤을 때다. 배추겉잎도 무쟈게 벗겨 내버리더구만. 도시 주부들이 안먹으니 그런다는 데야 할 말이 없었다. 무청이나 배추겉잎을 말려서 시래깃국 끓여 먹거나 데쳐서 나물 무쳐 먹으면 좋은데 도시 생활조건이 시래기 말린달지 하기가 어려운 걸 이해하면서도 뭔가 아닌데 싶은 생각은 안버려졌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야채는 거의 완벽하게 다듬어야 출하를 할 수가 있다. 파 껍질까지도 벗겨서 이쁘게 포장해야 된다니! 시금치랑 얼갈이는 또 어떻고…. 물론 파 껍질까지 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인이 먹는 식재료를 대하는 태도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뭔가를 먹을 때 기본적으로 본인의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요리하는 데 드는 수고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솔직히 야채 출하하면서 다듬고 포장하는데 인력이 너무 많이 드는데도 그 인건비가 채소 가격에 충분히 반영되지는 않기에 이 문제에 더 민감해지는 입장이라는 건 인정한다.
요새 세상이 그런 세상이니 어쩔 수 없지 투덜대면서도 열쒸미 다듬고 이쁘게 포장해서 출하하고 있다.
일단 채소는 그렇고 생선이나 고기들은 어떨까.

소, 돼지 등 대형 동물들은 그냥 먹을 수 있게 발라진 살코기를 유통시키거나 뼈, 내장, 대가기 등은 따로 유통을 하니까 일단 논외로 치고 편한 예로 닭고기를 보자. 특히 소위 말해 치킨. 뭐 백숙용 닭도 마찬가지다. 먹을 걸 버리는 게 꽤 많다. 모가지는 살 발라 먹기 힘들어 대충 입을 대다 버린다. 삼국지에도 나오는 계륵을 정성껏 말라먹는 사람은 거의 없고 관절에 있는 연골은 그 주의 살과 더불어 기냥 버려지기 일쑤다. 심지어 날개 끝부분이 그냥 버려지는 것도 본적이 있다. 이건 예의가 아니다. 기왕에 살아 있는 닭이란 놈을 사람이 먹기 위해 일부러 ‘살해’했다면 먹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먹어 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그러니까 먹기 좋은 살만 먹으면 10마리 죽일 거 최대한 먹어주면 8마리만 죽여도 되지 않냐는 이야기다. 요즘에야 닭고기 먹으려면 마트에 가서 모든 게 완벽히 정리된 누드닭, 통닭을 기냥 사서 요리 해먹거나 치킨집에 후라이드 반 양념 반으로 시켜먹으면 되지만 그게 뭔지 아는가. 내가 먹을 닭 남이 대신 죽여주는 거다. 그러면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손쉽게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살생의 양심 찔림, 손질의 번거로움 등이 없어진다. 닭들이 마구 죽어갈 수 있는 훌룡한 조건이다.
중 2때 모친께서 내게 닭 모가지를 비틀게 하셨다. “닭고기 얻어먹으려면 그 값을 해야 된다!”는 말에 반항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손에는 쥐가 나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닭을 보면서 미안하고 두렵고 징그럽고……. 그걸로 끝이 아니고 닭털도 아버지를 도와 같이 뽑아야 했다. 뜨거운 물에 죽은 닭을 담궜을 때 나는 특유의 냄새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먹기 불편한 부위라고 버리기가 미안하게 된다. 물론 그 시절에야 고기가 귀하긴 했다. 요즘은 고기가 아주 흔해졌지만 대부분 수입곡물로 키운 것들이라는 게 고기 먹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제 생선.
생선도 버려지는 비율이 아주 많다. 대가리 내장은 거의 안 먹는다. 머나먼 바다에서 잡혀 와서 기껏 살만 발려지고 나머지는 버려지는 신세라니…. 생선들도 억울할 거 같다. 모든 생선이 대가리 내장까지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고향에서 흔히 먹는 양태라는 생선은 개도 그 대가리를 안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먹을 게 없다. 다만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생선들도 흔히들 버려지는 게 아까워서 하는 이야기다. 저녁상에 조기가 올라오면 대가리 내장은 내가 먹고 살은 애들과 애들 할아버지를 먹게 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러면 세 마리 먹을 거 두 마리만 있어도 저녁 반찬으로 충분하다. 애들이 크면서 지들 아빠가 왜 그랬을까를 차츰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뭐 이런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이 먹을 거에 대한 예의라는 데에 동의들 하실랑가?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자신과 가족들이 먹는 식재료를 다루는데 자신의 손길이 최대한 많이 가게 하는 게 맘이 편하지 않냐는 이야기다. 몸은 불편해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명히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둘째는 최대한 먹어주자. 나는 살기위해 먹지만 식재료들은 어쨌든 죽임을 당한다. 내 살자고 기왕에 다른 생명을 죽였으면 그 생명한테 미안해서도 그렇고 또 다른 생명들 덜 죽이게 먹을 수 있는 거 최대한 먹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다.
첫째는 식물 쪽에, 둘째는 동물 쪽에 무게 중심이 가는 생각들이다. 뭐 뚜렷이 양분되는 게 아니고…….

내가 그렇게 살고 있냐고?
궁금들 하신가? 궁금하면 오백원!

응답 1개

  1. 말하길

    이번에도 뒤통수 멍 때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재배하고 살생하는 자와 날름날름 먹는 자가 분리될 때 먹거리 생명체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해법도 거기에 있을 터…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