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의 공공공(公共空)

공공공 매니페스토

- 이솔

나는 반 년 남짓 격주로 연재될 이 코너에서 한국 당대 미술이 사회적, 문화적, 인식론적 역할, 즉 공공(public)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파고 들어갈 것이다. 또한 미술 이외에도, 미술의 영역과 근접해 있는 시각문화 활동이 어떻게 공공성을 띠고 정치적인 영역을 매만지는지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이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발품을 팔아 참관하고 참여하게 될 전시, 학술 이벤트, 그리고 요즘 자주 언급되는 담론에 대한 미학적, 예술 지식사적, 문화 연구적, 정치적 탐구를 조심스레 몇몇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대화를 추구하고 싶다. 때로는 공감과 동료애를 이끌어내는 소통을 통해서, 때로는 무페(Chantal Mouffe)와 라클로우(Ernesto Laclau)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인 적대적인(antagonistic) 논쟁을 통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현대 미술의 공공성을 탐구하면서, 공공성이 미술이라는 장을 통해 사회적 발언과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지점들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다. 다시 말해, 미술관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와 자유스런 실험실을 가장한 블랙박스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난 공공(公共)의 공간(空間)을 통해 미술의 전시성과 수용성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코너의 제목으로 쓰이는 <공공공 (公共空)>의 마지막 음절은 미술실천의 물리적인 장소를 뜻하는 접미어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공공공(公共空)’은 단순히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공공의 공간(public space)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며, 또한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가 정의하는 공공의 영역(public sphere)이라는 개념에 관한 미학적 탐구와도 거리가 있다. 오히려 미국 영문학자 및 쿼어이론가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의 다수의 대항적 공중(counterpublics)의 개념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워너는 주류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공중들이 부상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구성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공동의 언어—즉, 시각적, 감각적, 정념적으로 새롭게 창출된 이들을 엮어주는 매개체—를 꼽는다. 나는 미술실천이 이러한 새로운 소통의 언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다감각적 감수성에 대한 가능성을 지칭하는 텅 빈—그래서 더 격동적인 움직임과 제스처가 가능한—여백에 대한 사유를 하고 싶어 이 코너를 ‘공공공(公共空)’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한국 미술계에서 공공성에 대한 담론은 주로 공공미술(public art)에 치중해 있다. 미술 비평가이며 큐레이터인 김장언의 말을 빌리자면,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와 비평은 2000년대 들어서 증폭한 정권의 공공 미술 도용으로 인해 정치적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공공 미술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입과 적용 그리고 시장 권력의 확대가 야기한 다양한 경제 사회의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봉합”하기 시작하면서, 이때 미술과 문화예술 활동이 “사회통합을 유지시킬 수 있는 … 비정치적 결속 장치”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1 그래서 2000년대에 이르면, ‘공공 미술’이란 개념은 단순히 건축물미술장식제도의 굴레에 속한 기념비적 야외 조각을 지시하는 용어가 아니라, 도시 미화 프로젝트 및 시민 생활 개선과 관광객 유치 전략의 일부로 전락한 홍보성 조형물 및 예술 이벤트까지도 포함하게 된다.2 서울 광화문 광장에 파시스트 제국의 잔여물처럼 우뚝 서 있는 세종대왕 상(2009)과 청계광장의 괴물 소라 <스프링>(2006) 이외에도 광주 비엔날레의 시민참여 프로그램, 2005년 시작한 안양시의 공공예술프로젝트 등으로 그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나는 공공미술을 바라보는 이러한 냉소적 비판에 전적으로 동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이라는 장이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헤게모니의 지형을 바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의 공공성에 관한 탐구를 공공미술보다 더 폭넓은 범위에서 생각하고자 한다. 담론의 확장은 한국 시각문화의 역사적인 맥락에서(즉 종적의 지도그리기를 통해) 가능하고, 전지구적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즉 횡적 지도그리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한국 미술의 공공성에 관한 탐구는 2000년대 이전의 역사에 주목하고, 동시에 1980년대 현장미술을 공공미술의 한 현상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깊이가 더해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외에서 최근 십 년 동안 활발하게 발전한 담론도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 및 서유럽에서 미술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즐비하기 시작한 때 역시 1990년 중반부터이다. 여러 실천가들과 학자들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사회 참여의 미술(socially engaged art), 미술의 사회적 실천(art as social practice), 대화의 미학(dialogical aesthetics) 등의 이론을 펼치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통일 독일이 야기한 역사적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즉 포스트-1989 체재 안에서) 발발한 미술과 사회, 혹은 미술과 일상에 관한 탐구가 미술의 공공성을 재조명하는 기회로 확장했다고 주장한다.3 나는 한국이라는 공간과 세계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예술 지식사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며 에세이를 집필할 것이다.

이상으로 <공공공 (公共空)>의 서문, 즉 나의 매니페스토 (manifesto)를 끝맺고자 한다. 이 매니페스토를 지금부터 몇 달 동안 연재될 글에 대한 여행 지도그리기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마치 로드 트립의 계획처럼 매니페스토도 시작의 포부를 알리면서 그 결말에 대한 의미를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행이나 혁명에서 결말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즉 온 더 로드(on the road)에 대한 믿음,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사회의 출현에 대한 정념(passion)이다.

※ Who is 이솔(Sohl Lee)? 지난 십여 년 동안 미국에서 미술사와 시각문화 공부를 했으며, 지금은 한국 현대미술과 정치성에 대한 박사논문 집필을 위해 1년간의 체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 김장언 「상징과 소통 – 지금 한국에서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Visual, Vol. 7, 2010 []
  2. 예술 작품이나 프로젝트의 장소 특수성이 그 장소의 진실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기만 하며 악용되는 경우가 있다. Miwon Kwon, “One Place After Another: Notes on Site Specificity,” October, Vol. 80. (Spring, 1997), 108. []
  3. 참고할 서적 중 다음을 추천한다. 한국어로는 그랜트 케스터의 저서 일부가 번역되었다. 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110 (Fall 2004): 51-79; Nic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Dijon: les presses du réel, 2002); Grant H. Kester, Conversation Pieces: Community+Communication in Modern Art. (Berkeley: UC Press, 2004); Collectivism after Modernism: The Art of Social Imagination after 1945, ed. Gregory Sholette and Black Stimson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7); Nato Thompson, et al. Interventionists: Users’ Manual for the Creative Disruption of Everyday Life (North Adams: MASS MoCA,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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