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

의미에 대한 짧막한 글(1) – 짧은 외출

- 이영남(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회의를 품게 한 것이 장기간의 시설경험이었다면, 내가 어떤 느낌으로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는지를 나눴던 동무경험(워크숍에서 어울렸던 경험)은 존엄성의 자양분이 되었다. “시설에서 나와 지금은 지역에서 살고 계신데요, 뭐가 제일 좋으세요?” 이런 물음에 공통의 대답이 돌아왔다. “자유죠. 외출하고 싶을 때 외출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어디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다는 것, 이런 자유가 좋아요.” 물론 중증장애인은 외출하고 싶다고 무작정 길을 나설 수도 없고 어디에나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길을 한번 나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대로 외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외출해본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자유는 있다. 탈-시설이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거시적 인권항목에 속한다면, 지역에서 누리는 잠시잠깐의 외출은 미시적 인권항목에 속할 것 같다.

이번 워크숍은 독특한 외출이었다. 모임이 있는 날 모임장소까지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오는 것 자체가 그리 간단치 않은 모험일 수 밖에 없으나 (길을 잃을 위험과 중간에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 등), 같이 모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나눴던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 이유는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성장기에 학교를 다니며 또래들과 이런 경험을 한다. 그러나 시설에서 장기간 생활한 중증장애인에게는 이런 또래경험도 없었다. 이번 외출은 3개월, 9회의 만남이었기에 짧은 외출이었다. 짧고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고 그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리고 인정과 지지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구체적인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이 진실했다는 점을 증언할 수 있었다. 나 혼자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이런 자각에서 용기도 솟아올랐다. 그것은 봄날의 아지랭이처럼 느릿하지만 따뜻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쉼없이 고민했고 움직였구나, 이런 무궁동의 삶에서 우리는 존엄성을 사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다에서 하천으로 역류하는 연어들의 장엄함처럼 장엄한 운명 이야기였다. 결국 시설의 장기경험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면, 비록 워크숍의 단기경험은 우리에게 약간의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 같다.

1980년대 초 미국 LA 한 유대공동체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작업에서 외부증인(Outer Witness)이라는 개념이 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민생활을 함께 견디지만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일종의 유대교 전통의례인 ‘증언’을 채택함으로써 고비를 넘겼다. 이민자로서 자신들의 과거, 문화를 증언해줄 증인들이 없었으나 그들은 상호 ‘인정의식’을 도입했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자신만의 특별한 정체성을 모으고 이해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는 매우 간단한 의례였으나 이를 통해 얻은 것은 컸다. 자신이 보여지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증거를 모으고 상호 인정하는 것이 이들의 정체성 회복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번 워크숍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의 삶을 이야기로 나누면서 서로의 삶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외출에서 우리가 향유했던 것은 ‘상호인정의 기쁨’이었다. 심리상담실의 증언이 전문가의 증언이라면 이번 외출에서의 증언은 ‘동무증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잠깐의 외출이었지만, 우리는 휠체어의 한쪽 바퀴에는 내 경험을, 그리고 다른 쪽 바퀴에는 동무들의 경험을 윤활유로 칠했다. 그것은 홀로 상처를 어루만지던 세상의 후미진 구석에서 어딘가 믿는 구석으로의 외출이었다. 결국, 외출과 그 외출에서 나눈 상호인정의 공동체적 경험은 인간다움이었고, 미시적 인권이었다. 이번에 참여한 동무 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분이 있었다. 그이는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 이유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덧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이는 워크숍을 하면서 천사를 그렸다. “천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는 답했다. “천사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에요.” 우리는 그이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나무나 꽃보다는 천사가 사람이 되는 데에는 더 수월할 것이라 믿었다.

응답 1개

  1. 말하길

    “휠체어의 한쪽 바퀴에는 내 경험을, 그리고 다른 쪽 바퀴에는 동무들의 경험을 윤활유로 칠했다. 그것은 홀로 상처를 어루만지던 세상의 후미진 구석에서 어딘가 믿는 구석으로의 외출이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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