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4)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3. 선순환하는 경험체계

홍아야, 전번에는 바람직한 조건반사체계의 특징을 찾을 때 무조건반사체계가 늙어서 죽을 때가지 조건반사체계는 스스로를 수정하여 새로워질 수 있다는 신비를 발견했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반사체계를 바람직하게 수정하는 방법을 찾을 때야. 하버지가 앞에서 그 방법이 자문자답하라고 하셨잖아. 그랬었지. 자아가 초자아에게 문제 상황에 알맞게 질문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그런데 이번에는 자문자답으로 경험체계의 조직 원리가 되는 분류기준을 바로 세워서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을 바로잡는 방법을 찾아보자.

하버지가 반사체계, 경험체계를 해석체계라고 했던 말 생각나니? 응. 그래서 그 해석체계를 마음의 무엇으로 빗대었지? 음, 마음의 안경으로. 그러면 눈이 좋은 사람에게는 어떤 안경이 좋은 안경이지. 그야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이지. 이번에는 경험체계의 분류기준을 바람직하게 수정하는 방법을 좋은 안경을 고르는 방법에 빗대어 찾아보자.

사람마다 누구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본댔지? 자기의 안경. 왜 그럴 수밖에 없댔지? 그야, 사람마다 자기의 경험체계라는 렌즈로 안경을 만들어 쓸 수밖에 없으니까 빌리거나 빌려줄 수가 없잖아. 그렇지. 그런데 안경의 어떤 특징이 안경 구실을 하게 하지? 안경의 본질이 뭐니? 투명해야 되고 굴절과 색깔이 있다는 거. 그래. 그런데 사람마다 안경의 굴절이 다르다면 똑같은 사물이라도 어떻게 비칠까? 볼록렌즈 안경을 쓴 사람에게 크게, 오목렌즈 안경을 쓴 사람에게는 작게 보이고 또 굴절이 불규칙한 렌즈의 안경을 쓴 사람에게는 비뚤어지게 보이겠지. 만약 색깔이 다르다면? 색안경에 따라 붉게 또는 푸르게 보이겠지.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의 안경은 여러 색깔이 뒤섞여서 아주 어둡고 칙칙하니까 사물의 형체가 잘 안보일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눈이 아주 좋은 사람에게는 굴절이 큰 것과 작은 것 중에 어떤 안경이 좋은 안경이겠니? 당연히 작은 거지. 왜지? 볼록굴절이든 오목굴절이든 굴절이 작을수록 사물의 참모습에 가깝게 보이니까. 그렇구나. 그러면 굴절이 규칙적인 것과 불규칙한 것 중에는 어떤 게 더 잘 보이겠니? 굴절이 불규칙한 게 최악이야. 사물이 일그러지게 보이니까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어. 아마 헝클어지거나 비뚤어진 경험체계를 가리킬 거야. 그렇구나. 불룩굴절이나 오목굴절이 사물을 크게 또는 작게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불규칙한 것은 경험들이 헝크러져 있고 체계는 비뚤어져 있어서 사물의 진선미를 알아보기 어려우니 더 큰 문제구나.

그렇다면 홍아야, 하버지가 안경의 굴절과 색깔로 경험체계의 무엇을 빗댔겠니? 글쌔, …… 굴절과 색깔로 경험체계의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을 빗댔단다. 인간이 쓴 마음의 안경에 굴절과 색깔이 없는 안경이 있을까? 완전한 인간이 없다면 당연히 없지. 그렇단다. 굴절과 색깔이 전혀 없는 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안경을 벗고 보는 것과 같아. 안경을 안 쓰고도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는 전지자(全知者)인데 인간은 아니거든. 알고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나서 안다는 거지. 그 말은 경험체계에 비추어 봐야 안다는 뜻이야. 그런데 인간이 경험을 축적하고 조직하는 데는 시간과 능력에 한계가 있어. 그러니 누구의 경험체계든지 굴절과 색깔 즉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이 없을 수 없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홍아야, 눈이 좋은 사람은 어떤 색안경을 골라야 할지 설명해 줄래. 색깔도 옅을수록 본래의 색깔에 가깝게 볼 수 있으니까 좋을 거야. 그러나 한 가지 색깔만 있으면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보는 거니까 색깔은 정확하게 못 봐도 사물의 형체는 알아볼 수 있어. 하지만 여러 색깔이 뒤섞이면 색깔이 어둡고 칙칙해져서 사물의 색깔은 말할 것도 없고 형체조차 보이지 않게 될 거야. 그야말로 고정관념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사물의 진선미를 경험하기 어려운 경험체계를 가리킬 거야. 굴절이 불규칙한 안경만큼이나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에 뒤범벅된 경험체계지. 따라서 눈이 좋은 사람에는 할 수만 있다면 색깔은 단일할수록 좋고 그것도 옅을수록 더 좋은 거지.

홍아야, 너는 나의 사랑이고 나의 자랑이야. 눈이 좋은 사람에게 알맞은 안경의 굴절과 비교하면서 눈이 좋은 사람에게 알맞은 안경의 색깔을 정말 잘 정리했다. 자 이제 굴절과 색깔이 경험체계의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볼래? 하버지가 이미 말씀하셨잖아.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이라고. 그래.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을 가리키지. 그런데 그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은 잘못된 한두 가지 경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잘못된 수많은 경험 끝에 생긴 거라 더 문제야.

그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이 경험체계에서 무엇으로 작용하기에 안경의 색깔이나 굴절로 빗댔겠니?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너도 알 수 있어. 체계는 선택지들의 분류로 얻어지는 전체야. 분류도와 같은 거지. 체계를 세우려면 같은 선택지를 묶고 다른 선택지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뮈가 필요하니? 기준이 필요하겠지. 바로 그거야.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이 경험체계에서 분류기준으로 작용하기에 경험들은 헝클어지고 체계는 일그러지고 비뚤어지고 뒤틀어지게 돼. 아, 그렇네. 그러고 보니 체계에서 잘못된 조직 원리로 작용하는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이 문제네. 그거야 그거. 엉뚱한 존재단위의 엉뚱한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을 조직 원리로 작용하는 분류기준으로 삼으면 경험체계는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으로 뒤범벅되지.

누구나 진선미를 민감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경험체계를 가지고 환경조건에 적절하게 반사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지. 그러나 잘못된 경험들이 쌓이고 그 공통특징으로 잘못된 분류기준이 생기면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의 악순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면 어리석고 추악한 반사행동으로 점점 더 불행에 빠지게 되지. 이러한 악순환을 진선미를 경험하는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야.

그런데 그 분류 기준이 어떻게 만들지는 거고 또 왜 잘못 만들어져?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자연과 사회 속에는 온갖 것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어. 그러나 인간의 지성 즉 경험체계는 무질서한 것들 가운데 어떤 공통특징을 찾고 이를 기준 삼아서 같은 것들을 묶어서 한 다발이나 한 자루로, 즉 하나의 집합으로 파악하려고 한단다. 진리를 찾기 위한 지성의 작용은 흩어지고 뒤섞여 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묶어 하나의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으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하고 단순화하여 파악하는 거야.

자연법칙이나 수학의 공리도 이러한 공통특징을 찾아서 묶다가 발견한 거지. 그게 바로 진리 경험이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연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싶다면 거꾸로 그 현상을 배후에서 규정하거나 지배하고 있는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을 찾아야 되고 수학 문제를 풀려면 그러한 종류의 문제들의 공통된 형식(틀)인 공식을 찾아야 돼. 그러나 잘못된 경험들 즉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들이 축적되면 그것들의 공통특징으로 분류기준을 삼게 마련이야. 이 엉터리 기준에 따르면 경험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여 헝클어지고 체계는 뒤틀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지. 뒤틀린 체계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기고 고정관념 때문에 엉터리 기준이 만들어지니까 악순환이야. 마치 점점 더 불규칙한 굴절에 칙칙한 색깔의 안경을 쓰게 되는 것처럼.

그런데 차이점을 다 버리고 남는 공통특징으로 묶어서 하나로 본다는 것은 경험의 조직 방법에서 수목형이야 리좀형이야? 아, 그건 잔뿌리에서 밑동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거니까 뭐겠니? 수목형, 아니지. 홍아야, 앞에서 살펴본 경험 조직 과정이 추상적으로 묶어가는 귀납적 전개니, 구체적으로 나눠가는 연역적 전개이니? 예를 들어서 다시 한 번 설명해줘. 이를테면 고양이와 같은 위계에 놓인 선택지들인 사자나 치타나 호랑이 삵 등의 공통속성을 묶으면 고양이과가 나오고 고양이과와 같은 위계의 선택지들의 공통속성을 묶으면 식육목이 나와. 또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공통속성을 묶으면 포유강, 척추동물문, 동물계, 생물이 나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경험을 계속하여 추상화 일반화 단순화하게 되면 결국 최상위 단위존재까지 밝혀지겠지. 그러면 그 생물이라는 개념을 정점에 둔 하나의 거대한 인식론적인 체계를 이루게 돼. 인간은 빅뱅 때의 에너지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무생물까지를 포함시킨 모든 진화과정에서 생성된 모든 실재들로, 진화과정이 드러나도록 경험체계를 만들려고 했어. 이를테면 경험체계의 아주 작은 일부이지만 원소의 주기율표에서도 원소의 진화과정이 잘 드러나 있듯이. 우리의 지성은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계로써 어떤 인식 대상의 의미나 가치를 인식하고 평가하려 하므로 우리는 모든 실재를 품는 경험체계를 만들지 않을 수가 없어. 이와 같은 경험 조직 방법은 마치 같은 위계의 선택지들을 뜻하는 그물조직인 잔뿌리에서 뿌리와 가지가 하나로 통하는 대나무의 밑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이 연동경로가 하나의 계통경로로 귀납되는 방법이니까 리좀형이야.

그런데 인간의 지성은 경험체계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계의 정점인 궁극적인 대상까지 찾아내려고 해. 그래서 생물과 무생물을 묶어서 존재를 추상하고 다시 존재와 비존재를 묶어서 그 너머에 무엇이 있나를 추리·상상해 보는 거야. 아직은 인간의 과학이 궁극적인 최하위 단위 존재를, 철학이 궁극적인 최상위 단위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체계는 미완의 상태지.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지적 호기심 때문에 인간은 그 궁극적인 자리를 신념으로 채우게 돼. 그래서 종교나 사상이라는 신념체계가 생겨나고 이를 따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그러면 수목형 경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이 악순환 될 수 있어? 추상화 작업으로 일단 체계가 서면 경험체계가 이번에는 거꾸로 상위 단위존재의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을 적용하여 하위 단위존재의 빈자리를 찾거나 헝크러진 경험을 재조직하기 위해 구체화 특수화 복잡화 작업을 하게 돼. 구체화 작업은 밑동에서 가지로 계통경로를 따라 잎에까지 가는 과정을 가리켜. 각 상위 존재단위의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을 이용하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선택지들 즉 하위 존재단위를 찾아내는 작업은 연역적인 논리이므로 수목형 관계 맺기 방식이지.

이를테면 우리가 세계관 즉 인식체계를 새울 때는 가장 궁극적인 실재를, 그리고 가치관 즉 가치체계를 세울 때는 가장 궁극적인 가치를 체계의 정점에 두게 마련이야. 그러면 궁극적인 실재에서 모든 존재가 파생되고 그 궁극적인 가치에서 모든 가치가 파생되지. 그러니까 정점에 놓인 그 궁극적인 대상의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이 조직 원리가 되는 거야. 그것이 첫 번째 분류 기준이 되어 그 궁극적인 실재나 가치의 개념이나 법칙이나 이론의 범주 안에 드는 것만을 선택하여 그 개념이나 법칙 또는 이론에 따라 체계를 조직하고 아닌 것은 배제해 버리지. 물론 2차 3차 그 이하의 모든 분류도 첫 번째 갈래의 아래에 놓이게 되니까 정점에 가까운 분류기준일수록 그 영향 범위가 넓어져.

하버지 말씀이 너무 어려워. 수목형 경험 조직에서 분류기준을 잘못 찾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의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를 예를 들어서 설명해 줘.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모든 경험 끝에 세상을 움직여서 지신의 욕구를 실현하는데 돈이 가장 큰 힘을 가졌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는 돈을 가치체계의 정점에 둘 거야. 그리고 그가 경험한 사건이나 물건 가운데 돈이 안 되는 쪽은 버리고 돈이 되는 쪽 경험만 골라서 그의 경험체계에 배치할 거야. 액면가라는 분류기준에 따라 진열대에 상품을 늘어놓는 것처럼 그는 경험한 사물 중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시장의 교환가치로 환산해서 액면가를 정하고 그 액면가에 따라 배치할 거야. 돈벌이가 자아실현이라고 믿는 그에게 그의 경험체계가 돈벌이를 구상하거나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조직할 거야.

그러나 사랑이나 건강 자연환경 등 돈으로 교환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의 가치를 무시하고 돈만 섬기는 경험체계라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지. 그가 그런 이유로 낭패를 당했다면 그건 그가 시장의 교환가치만으로 가치를 재는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의 악순환에 빠져 있기 때문이야. 물론 돈 말고도 권력이나 인기(명예) 또는 지식이나 어떤 신, 또는 사랑하는 대상을 궁극적인 실재나 가치라고 믿고 섬길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무엇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믿고 그것과 관련된 경험들을 조직했든지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 능력과 시간에는 한계가 있어. 그래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험체계는 있을 수 없어.

그런데 하버지, 하나의 궁극적인 대상이 아니라 다원적인 실재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다원적인 중심을 지닌 경험체계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 사람도 많겠지만 다원적인 여러 중심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지는 살펴보고 따져봐야 할 문제야.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믿어지는 궁극적인 대상에 의지하려는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종교적인 본성이 있게 마련이야. 하나의 통합된 신념체계인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가지려면 그 정점인 궁극적인 대상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게 종교적인 삶이야.

이를테면 돈을 추구하는 삶도 종교적인 삶이야. 그래서 자신이 믿는 궁극적인 대상과 합일된 자기 모습에서, 이를테면 재산 소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아성취를 느끼며 만족하게 마련이야. 예수의 말씀대로 돈을 섬기든 하느님을 섬기든 한 주인을 섬기는 경험체계라야 ‘나’라고 말할 수 있지. 한 쪽을 섬기려면 다른 쪽에 소홀할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오늘날 돈과 하느님을 아니 돈으로 축복을 내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분열된 듯한 인격을 가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 그러나 그건 얘깃거리가 못 돼. 그들의 자아 즉 경험체계가 분열된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이 섬기는 것은 사실 오직 하나야. 그것은 그들의 욕망이 만들어 내고 또 닮고 싶어하는 돈이라는 낸 신이야. 돈이라는 맘몬을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거지. 하느님이란 개념은 그들의 돈 욕심에 가득 차있는 마음을 덮는 포장지이고 벌거벗은 몸을 덮는 겉옷에 지나지 않아.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내 경험체계의 조직 원리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다원적인 것이 아니야. 내 맘에 드는 것은 단 하나로 통합된 ‘나’이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분열된 ‘나’가 결코 아니야.

그러나 그건 하버지의 믿음일 거야. 하버지의 믿음을 절대화한다면 여러 궁극적인 실재나 가치를 믿는 사람들과 공존하기 어려울 걸. 아니, 그렇지 않아. 하버지는 스스로의 신념체계가 정리되어 있다고 믿기에 소중히 여겨. 똑같이 남들의 신념체계가 그 체계 안에서 상하전후좌우로 정합성이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체계를 소중히 여기듯이 나도 그들의 신념체계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가 있어. 어쩌면 나의 궁극적인 대상을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지도 몰라. 하버지는 불가지론자나 회의론자의 주장도 존중하고 있어. 그러나 자신이 무얼 믿고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나, 어떤 궁극적인 실재나 가치도 믿지 못하기에 다른 모든 사람의 믿음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에게는 존중할 만한 믿음 자체가 없다고 생각해.

하버지 신념은 그렇다 치고, 하던 얘기로 되돌아가야겠어. 하버지 말씀은 경험체계라는 안경의 굴절이 크거나 색깔이 짙은 것은 경험체계가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으로 가득 차있는 거니까 합리적인 사고활동으로 적절한 반사행동을 할 수 없다는 거잖아. 그러한 악순환이 점점 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거지? 그렇고말고.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돼. 그러니까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굴절과 색깔을 줄여나가자는 거야. 어떻게?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으로 돌려야지. 어떻게? 하나의 진선미 경험이라도 선순환의 시작이야. 그 선순환의 방법을 찾고 이를 수행으로 실천해야지. 선순환의 방법이 뭔데. 선순환의 수행 방법은 많겠지만 하버지의 방법은 이미 말했어. 자문자답이라고.

앞에서 자문자답으로 수행하는 방법은 들었어. 그런데 자문자답이 선순환하게 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돼? 자문자답은 어떤 경험이 제자리에 놓였는지를 경험체계(자아)가 스스로(초자아)에게 되묻는 거야. 그건 그 경험의 분류기준이 분명하고 정확한지를 되묻는 거지. 그 기준은 두 가지야. 하나는 좌우로 같은 수준의 선택지가 놓였는지를 묻는 거야. 다른 하나는 분류 기준이 위로는 차상위 단위존재의 개념이 그리고 아래로는 차하위 단위존재의 개념이 놓였는지를 묻는 거고. 만약에 어떤 선택지들을 좌우로 교체해도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 경험은 제자리를 잡은 거지. 또 위아래로는 그 경험의 차상위 단위존재와 차하위 단위존재가 놓여있다면 이 경우도 그 경험이 제자리를 잡은 거야.

자문자답은 마치 거대한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기호에 따라 꽂고 빼듯이 경험들을 정합성에 따라 배치하여 경험체계를 정리할 수 있게 해줘. 사서직원은 열람자의 말만 듣고도 아주 빠르고 쉽게 원하는 책을 빼주거나 또 열람자가 가져온 책을 제자리에 꽂을 수가 있어. 분류기준이 정확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분류기준이 분명하고 정확하지 않다면 그 서가에서 같은 잘못이 반복되니까 잘못된 기준을 발견하고 이를 바꾼 다음 그에 따라 책들을 다시 꽂게 돼.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체계도 자문자답으로 잘 정리된 거대한 도서관 같아야 돼.

그러나 누구도 거대한 도서관처럼 잘 정리된 경험체계를 가진 사람은 없었잖아. 그리고 하버지 말씀대로 경험체계를 쉽게 정리하여 지혜로워진 사람도 없었고. 현대문명은 도서관에서 나오고 다시 도서관에 축적돼. 도서관은 한 언어권이나 문명권의 눈에 보이는 경험체계랄 수 있지. 그러나 능력과 시간이 제한된 한 개인이 도서관처럼 방대하고 정리된 경험체계를 가질 수는 없어. 다만 도서관에 빗대어서 인간의 경험 체계의 조직의 방법을 유추해보고 또 경험의 선순환의 방법을 찾아보았을 뿐이야. 도서관에서 분류기준을 수정하듯이 우리도 자문자답으로 우리 경험체계의 분류기준을 수정하면 더 많은 진선미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면 우리가 늙어서 죽는 그 순간까지 안경의 굴절과 색깔을 줄여나가는 선순환을 계속할 수 있겠지.

도서관이 한 언어나 문명권의 경험체계라지만 그것도 결국 인간의 경험 체계가 만들어낸 거야.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문명의 경험체계로 미루어 거꾸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경험체계를 엿볼 수 있어. 마찬가지로 오늘날 인터넷은 접속하고 있는 모든 개인과 문명이 함께 만든 경험체계 즉 집단 지능이니까 현재로는 인간의 경험체계를 가장 잘 닮아 있을 거야. 그렇다고 개인이 도서관이나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경험체계가 저절로 확충되거나 정리되는 건 아니야. 또 도서관과 인터넷의 운영체계를 안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정보를 다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야. 인간은 자기 경험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고 경험체계를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으니까. 다만 우리는 이러한 집단 지능들이 어떻게 수정되는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우리의 경험체계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던 거야.

경험의 선순환은 선순환이니까 선순환을 낳고 악순환은 악순환이니까 악순환을 낳을 수밖에 없어. 만약에 하나라도 진선미를 경험했다면 그것이 선순환의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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