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생활복지분과 위원장님!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생활복지분과 위원장님!

지난해와 올해 동네에서 짊어져야 했던 멍에였다. 뭐든지 참여, 민주, 자치, 민관 거버넌스 뭐 이런 게 들어가면 환장을 하고 보는 습성 때문에 지난 해 주민자치위원에 신청서를 내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생긴 것을 보고 단박 신청서를 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제도라 그런지 신청서를 내고 아주 쉽게 위원이 되어 버렸다. 우선 거주 지역인 구로4동 지역회의를 나가보니 10여명 정도 사람들이 주민자치센터에 모여서 위원장 등의 임원과 구청에서 열리는 예산위원회에 대표자로 참석할 위원들을 뽑는 경선의 자리를 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나가보고 느낀 것은 ‘역시 동네에는 동네 정치가 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쫄딱 망해서 저녁때끼리도 없이 구로동으로 굴러들어 온 후 평생을 살고 있으니 거의 토박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동네 정치를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극소수의 말없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미 자기들끼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는 다 친한 모양새여서 하라는 둥, 아유 부담스럽다는 둥 주고받고 한참 흥을 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청에서 열리는 위원회에 지역 대표자로 들어가서 생활복지분과 위원장이 되기까지 나는 시종일관 조용히 일어서서 ‘저 그러시면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저 꼭 좀 할 이유가 있어서 그런데…..’하는 일관된 읍소형으로 스리슬쩍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면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뻔한 속셈이 있어서다. 지역아동센터에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어볼까 하는 속셈 말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통해서는 한 푼의 예산도 만들어내질 못했다. 더 솔직하게는 어영부영하다가 예산안을 올리지도 못했다. 대신 구로구에 만들어지는 혁신교육지구 논의에 들어가서 (구청의 간담회 자리에서 나의 발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다시는 보고 싶지는 않은 광경이었다며 한 마디씩 평을 해주었다) 얼마간의 예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날 지역회의에서 지역 대표로 선출이 되고 나서 다른 분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로 이동을 하고 있는데 앞서 가시던 남자분이 옆의 아주머니께 어째서 지역대표자리를 뺏겼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그분은 ‘그럼 한다는데 어떻게 하냐’며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아마 자기들끼리는 조금 꿍꿍이도 있고 그랬던 모양인데 이렇게 깜찍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나보다. 분명 동네 정치에도 뒷북은 있는 것이다.

주민참여예산제도는 브라질에서 만들어진 제도를 차용해 들어온 것으로 우리나라는 전라도 광주와 울산 등에서 실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도입하긴 하였지만 주민들이 이를 잘 알지 못하므로 처음에는 예산학교라는 것을 열어서 우리나라의 예산제도와 구의 예산현황 및 참여예산제도와 사례 등등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도 마련을 하였다.

첫 해에는 3억원의 예산이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배정이 되었고 위원회에서 한 일은 고작 구청에서 주민들의 의견과 부서의 의견을 받아 가능하다고 이미 판단을 내린 신규 사업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매겨주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올 해는 그나마 12억원으로 예산이 늘었다. 또 서울시가 경복궁 앞에서 주민참여예산한마당을 열어 각 구에서 서울시 주민참여예산 총회로 안건이 상정된 예산요구사업에 대한 홍보를 하도록 하고, 서울시 참여예산위원들이 당일 현장 투표를 통해 예산배정사업을 결정하는 사례를 보여주어, 구로구도 총회에서 내년도 신규 사업을 결정하는 서울시의 사례를 따르는 발전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구로구에서는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열리는 내내 2013년도 예산 사항이 너무 어렵다고 늘 울상이었다. 만약 정부가 내놓은 예산편성지침을 따른다면 구청이 원하는 신규 사업을 하기 위한 가용재원 전체 예산액 3,000억원의 단 1%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하는 보조금 대응사업 비율이 거의 예산에 절반에 육박을 하게 되니, 어차피 쓸 수밖에 없는 경상사업비율이 99%에 이르러 말하자면 주민참여예산제도고 뭐고 조금치의 여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럼 신규 사업이고 뭐고 어디를 어떻게 줄여 써야하나 그거나 논의를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억원이라도 마련해서 주민들 숙원사업을 해결하도록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편성해준 구청에 감사하기만 해야 하나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오늘 2년간의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약간은 이 제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무언가 ‘주민자치예산제도’를 생각하고 들어가서 ‘주민참여신규예산편성제도’(그것도 심의가 아니고 편성!)를 열심히 하고 나온 기분이다. 동네 정치를 그렇게 하고 나왔다.

우치다 다츠루는 그의 책 ‘교사를 춤추게 하라’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기초적 지성훈련의 하나로 조감하는 힘 즉, 맵핑(mapping)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절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우치다 다츠루 선생의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맵핑의 전제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은 무언가를 배우고 있을 때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도 주민참여예산제도에 적극 가담했을 때 실은 이것이 무언지 잘 모르고 돈을 좀 받아내 보겠다는 얄팍한 속셈에서 시작하였다) 그래서 배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잘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배움은 지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역을 향해 나가게 되는 과정이며 그 영역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바뀌는 것이 먼저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주장한다. 자신과는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표현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타자’에 동조하려고 ‘자기 세계의 경계선’ 저쪽 편에 몸을 던져보는 것이 배움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년간의 주민참여예산제도는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참여와 자치를 주장해왔던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경험을 제공했던 귀한 기회가 되었다.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주민의 욕구를 기반으로 하고 등등의 말 뒤에만 숨어서가 아닌 시간을 내어 참여하고, 얼굴과 얼굴을 정면에 대고 합의를 이루고, 구청 사람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서로 마음을 못 맞추어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상대가 뭘 생각하는가 싶어 의심을 피워 올리기도 하는 등 나의 지도는 갈팡질팡하는 나의 행보처럼 어지러운 지형을 보이고 있었다.

2013년 신규 사업을 결정하는 총회 투표 날, 나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잘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올라온 사업들을 놓고 투표를 하면서 확신이 없는 사업에는 절대 손이 가지 않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주민 전체에게 도움이 될까? 꼭 해야 하는 일일까? 선택이 쉽지 않아 몇 번 사업안내판이 걸린 구청강당을 돌아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동네를 좀 가보던지, 좀 진작 물어볼걸 후회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2년 임기는 끝이 났다. 처음 회의를 주재하는 날 위원장이 회의주재 내용이 빼곡히 적힌 구청의 메모장을 힐끗거리며 회의를 주재하던 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물론 이런 감상으로 끝나진 않을 거다. 왜냐하면 어차피 내 꿈은 ‘프로페셔널 주민‘이기 때문이다.

I will be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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