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사고패턴 바꾸기

- 유일환(수유너머N 회원)

1.
지난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가지고 장애인성폭력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음』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분들이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친구를 배반하고 연인을 얻었지만, 친구의 자살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세상을 등진 채로,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소설의 줄거리를 들려주고 나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죄를 짊어진 채 세상을 등지고 죽은 듯이 사는 주인공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물론 주인공이 살던 시대적 맥락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이런 조건들은 없다고 가정 해봐요. 만일 여러분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친구의 자살이라는 사건 이후에 어떠한 태도로 살았을 것 같아요?”

예상과 달리, 사람들의 입에서는 너무도 쉽게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왜 그러나고 재차 질문했더니, 아예 소설 밖으로 나와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들의 힘든 상황을 터지듯 털어놓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니,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병원에 다니고 있고,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하더군요.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분들에게는 큰 외상으로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어찌됐든 저는 그분들을 심리 치료하러 간 것은 아니어서 개인적인 울분이나 하소연을 말하는 것을 적당한 선에서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화재를 전환하여, 자신이 겪은 사건과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전에 정화스님께 들은 이야기로, 탁월한 삶의 지혜라고 판단해서 그분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 얘기는 이렇습니다.

사건은 수많은 우발성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일단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원인을 따지는 것은 크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사건은 해석 방식에 따라 ‘무식’과 ‘유식’으로 나뉜다. 사건을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식한 방식’이다. 모든 걸 내 탓으로 여기고, 책임의식 속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이것이다. 반면, 스스로를 기쁘게 만들거나 고요하게 만들도록 해석하는 것은 ‘유식한 방식’이다. 이 경우에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다. 불가에서는 이를 ‘부처의 지혜로운 판단’이라 부른다.

그런데도 사람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사고패턴’ 때문이다. 사람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언어화해서 기억하는데, 이때 반드시 사건을 일정한 사고패턴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사고패턴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되면 이와 유사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그 사고패턴이 작동하게 된다.

만일 나에게 일어난 어떠한 사건을 무의식중에 고통을 주는 무식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면, 당장 고통을 주는 무식한 방식의 사고패턴을 버려야 한다. 물론 사고패턴은 굳어진 습관과 같기 때문에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단지 정신적인 노력만으로는 힘들다. 몸을 수고스럽게 하는 일종의 수련을 해야만 효과가 있다. 이러한 수련을 통해 고통을 주는 사고 패턴을 버리고,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만들 때, 우리는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건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이 얘기가 그분들한테 어떻게 다가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제 얘기보다 자신들의 힘든 얘기를 털어놓고 싶은 욕구가 더 큰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 번의 만남으로 무언가를 촉발해내기에는 제 역량이 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찌됐든 다음 주에 또 그분들을 만나러 갑니다. 이번에는 어떤 만남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2.
이번 주 동시대반시대에서는 똥과 생리혈의 순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똥과 생리혈이 더럽고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순환되어 우리의 몸과 관계를 맺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도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헉.. 그걸 집에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보다 더 좋은 유기농 재배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박정수의 [수세식 변기로 똥거름 만들기]에서 언급된 것처럼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배설한 똥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마치 내가 생산해낸 산물이고, 내 몸의 일부의 것인 양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런데 점점 커가면서 우리는 똥을 비위생적이라고 여기고, 협오스러워 하게 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아마도 그건 사회화의 결과이며, 학습된 결과일 겁니다. 그리고 이게 습관처럼 자리를 잡아서 (마치 앞서 얘기한) 사고패턴처럼 작동하는 걸 겁니다. 배설물하면 무조건적으로 불쾌하고 비위생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사고패턴이 작동하는 거지요.

이러한 점을 고려하건데, 이번 주 동시대반시대 [밑에서 입으로]에서는 배설물을 불쾌함과 연결시키는 사고패턴에 균열을 내줄 흥미롭고 중요한 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감성을 갖게 해줄 이 글들을 통해, 위생이란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몸에 이로운 새로운 사고체계를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쓸모없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쓸모를 찾고, 배설물 또한 소중한 내 몸의 일부라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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