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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칼럼

귀속-귀향 없는 ‘자기 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오키나와 “복귀” 40년과 야숙자 추방을 생각하며-

- 신지영

* 타테가와 공원 야숙자 추방에 항의/저지하는 서명에 동참해 주세요. 한글서명 페이지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권을!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권을!

* 독립 혹은 자치- 푸에르토리코114년, 카탈로니아72년, 오키나와40년.

정권이란 어느 쪽이든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서인지, 선거가 몰고 오는 열띤 희망들이 풍기는 냄새가 싫어서인지, 도무지 선거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는 나도, 이번 선거에는 유독 신경을 쓰인다. 특별히 훌륭한 정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특별히 나쁜 정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별로 없는 세대인 나로서는 일종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선거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건 오랜 차별 속에서 자치의 길을 모색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하기 위해 치룬 선거들이다.

12월 6일에는 미국 내 자치령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이 투표를 실시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는 것을 선택했다. 전문가들은 51번째 주가 되면 미국 정부로부터 한해 20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지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랜 경기 침체 속에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박은하 기자, <미국·중남미푸에르토리코 미국 51번째 주로 편입 결정> <<경향신문>>, 2012년 11월8일) 미국정부는 푸에르토리코에 해군과 육군기지를 두고 인근 비에케스 섬 대부분을 군사훈련과 무기 저장고로 사용해 주민들과 갈등을 빚어 왔다.

11월 25일에는 스페인 카탈루냐 주 총선에서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정파들(카탈루냐통합당 50석, 카탈루냐공화좌파당 21석 등)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자했다. 카탈루냐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역사를 지녔고, 스페인 총생산의 20%에 달하는 경제력과 750만의 인구를 지닌 주다. 이번 선거에서 독립을 지지하는 정파가 과반수를 차지한 것도 스페인 중앙정부에게 내는 세금이 많은 반면 얻는 혜택이 없다는 불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스페인 중앙 정부는 1934년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카탈루냐 혁명군을 유혈 진압한 바 있고, 1939년 이후 프랑코 독재 정부는 카탈루냐어를 금지하고 자치권을 박탈했던 역사가 있다.

이 두 선거의 결과는 한쪽은 미국으로의 귀속을 다른 한쪽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상반된 듯이 보인다. 반대로 독립이건 자치이건 귀속이건 경제적 이득이 주민들을 움직인 듯이 보인다는 점에서 동일한 선택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자치, 독립, 귀속을 둘러싼 역학은 체제의 선택이나 경제적 이유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오키나와의 <복귀>이후 40년 역사는 역으로 비춰준다.

푸에르토리코와 카턀루냐의 선거는 다수결을 기반으로 한 직접 선거가 한 나라의 체제를 결정짓는 힘을 여전히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선거가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것, 혹은 선거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푸에르토리코의 5%의 독립지지자들의 의견이라든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카탈로니아 시위대들의 자긍심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중앙정부와의 갈등양상은 그 지역의 사상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등을 생각하게 한다. 만약 푸에르토리코가 51번째 주가 되는 것이 단지 아메리카로의 귀속만을 의미한다면,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이 “국가”가 지닌 폭력성을 그대로 반복하는 귀향으로 귀결된다면, 이 선거/선택이 과연 무엇인가를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까?

올해는 오키나와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복귀”된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점령을 경험하고, 1972년 일본으로 “복귀”되었으나, 그것은 일본 내 미군기지의 75%를 오키나와에 두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오키나와인들은 긴 시간 동안 동화, 자치, 독립 사이에서 갈등을 반복해 왔고, 현재 대통령 선거 앞에 선 우리에게 이 각각의 체제가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 ‘독립’이라는 사상적 상상력, ‘자치’라는 비폭력주의

11월 25일에는 <“복귀” 40년, 앞으로의 40년(『復帰』40年、これからの40年)>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에는 오키나와 현대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강연을 했다. 강연자들은 오키나와의 자치, 독립 등에 대해서 결코 같은 의견을 지녔다고 할 수 없었고 찬성하기 어려운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역사와 삶을 함께 해온 그들의 말은 모두 어떤 강렬함을 지니고 있었다.

심포지엄<“복귀” 40년, 앞으로의 40년>의 종합토론. 순서대로 사회자, 이나미네씨, 아라사키씨, 아라카와씨, 오다씨

심포지엄<“복귀” 40년, 앞으로의 40년>의 종합토론. 순서대로 사회자, 이나미네씨, 아라사키씨, 아라카와씨, 오다씨

첫 강연자는 오다 마사히데(大田昌秀). 1925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오키나와 전쟁을 경험하고 제 4대 오키나와현 지사를 지낸 분이다. 늦어서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없애기 위해서, 자세한 현장조사 및 자료를 통해 어떻게 행정적 압박을 가해 왔는가 하는 경험을 들려 주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내 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있는 반면, 700명 국회의원 중 오키나와인은 오직 1명 뿐이라고 하면서 오키나와인은 구조적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 발언자는 이나미네 케이이치(稲嶺惠一)로 1933년 관동주 대련에서 태어나 제 5대 오키나와현 지사를 지낸 분이었다. 오키나와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만한 역량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그의 이야기에는 다소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없으면 오키나와의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신화를 구체적인 통계를 통해서 깨뜨려 준 것은 일격과 같았다. 오키나와현 총소득 중 미군기지 소득의 비율은 5.2%정도다. 많은 양이지만 미군기지가 없다고 오키나와 경제가 붕괴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좌중을 사로잡은 것은 아라카와 아키라와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발언, 즉 서로 다르면서도 오랜 세월 서로 부딪기며 오키나와를 독려해 왔던 사상가들의 발언들이었다. 아라카와 아키라(新川明)는 1931년 오키나와 현에서 태어나 류큐대학 국문과를 중퇴하고 『오키나와 타임즈(沖縄タイムス)』에 입사해 저널리스트로 활동한다. 『신오키나와 문학』의 편집장이자 『반국가의 흉악지역(反国家の兇区)』(現代評論社, 1971)『신남도풍토기(新南島風土記)』 (大和書房, 1978)의 저작이기도 한 그는 1972년 오키나와 “복귀운동”이 일어나던 당시부터 강렬한 필치로 “반복귀론”을 전개했던 전설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전후 오키나와 정신사의 특질 중 하나는 일본국에 귀속되는 것을 의심치 않는 동화사상의 주박을 끊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보충자료였던 「스스로 만들어 낸 모순과 마주한다- 40년째의 감상(みずからつくり出した矛盾に向き合うー四〇年目の感概)」(『世界ー沖縄「復帰」とは何だったのか』2012.6)에서 그는 “조국으로의 복귀”란 이중의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복귀’를 ‘재병합’이라고 보는 것이 모든 오키나와 운동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복귀운동”이라는 말은 사실 “일본국으로의 동화(沒入)을 지향했던 오키나와인 스스로가 만들어 정착 시켰던 말”이며,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이 40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극복하여 “자기 결정권의 확보를 지향하는 운동”을 구축하고 “‘복귀’이래 오키나와 운동의 이념을 탈구축해 가는 것이 ‘복귀40년’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며, ‘앞으로의 40년’을 향해서 추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 오키나와의 ‘독립’이라는 사상적 상상력은 한 마디 한 마디 마치 결단을 내리듯 내뱉는 그의 말 속에서 날카로움을 더했다. 특히 그의 ‘독립’론은 ‘자기결정권’이라는 지평을 통해 근대 민족 국가의 폭력성과 다른 가치를 시사해줬다.

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暉)는 아시아 속에서 오키나와의 역사가 갖는 의미를 비폭력 운동과 ‘생활권의 공유’라는 말로 풀어냈다. 그는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나 오키나와 대학(沖縄大学)에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오키나와에 대한 중요한 발언을 지속해 왔다. 그의 『오키나와 현대사(沖縄現代史)』(岩波新書, 1996)은 고전으로 꼽히며 2008년에는 한국에 2010년에는 중국에 번역되기도 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만난 동아시아 지식인들과의 논의(한국에서는 백낙청/백영서, 중국에서는 손가 등 참여)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영토분쟁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고유의 국가영토”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센카쿠 열도 근지에서 타이완인들과 생활권을 공유해 온 오키나와 어민들에게 “고유의 영토”란 관념적인 선긋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유의 영토’는 국가 간 대립을 부채질하지만, 민중들은 타인종이나 타국인과 생활권을 공유하는 지혜를 축적해 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민중의 시점에서 보면 영유권보다 어떻게 전쟁 가능성을 줄일까가 소중”하기 때문이다.(「生活圏として共存指摘ー新崎さんが上海で講演、尖閣解決へ提言」『沖縄タイムス』2012.10.17) 따라서 센카쿠 열도를 생활권으로서 공유해 왔을 뿐 아니라 비폭력 저항운동의 전통을 지닌 오키나와인은 센가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에서 스스로 의지표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異論抗論-尖閣問題をどう見るか, 沖縄の生活圏」主張を」,『沖縄タイムス』2012.10.9)/「沖縄の民衆運動,「非暴力が特徴」「生活圏として共存指摘ー新崎さんが上海で講演、尖閣解決へ提言」『沖縄タイムス』2012.10.16)

걸죽한 오키나와 사상가인 아라카와와 아라사키는 오키나와에 필요한 것이 독립인가 자치권의 획득인가를 두고 의견을 달리한다. 간단히 말해 아라카와가 독립론을 주장한다면 아라사키는 자치권의 획득을 중시한다. 그러나 종합 토론 시간에 들은 이들의 독립론과 자치권의 획득이란 사실은 “자기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라는 사상적 지평 속에서 서로를 지탱하면서 겹쳐졌다고 나는 믿는다.

아라카와는 자치권도 독립론도 핵심은 ‘자기 결정권의 확보’라고 말한다. ‘독립’의 길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리 자치를 주장해도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독립에 이념을 두고” 자기 결정권을 확보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든다. 80년대 잡지 『현대사상』에서 자기 결정권을 둘러싼 대담을 했을 때, 선주민 활동가들의 발언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선주민들은 선언문 속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문안에 대해 “민주주의란 인종주의에 근거한 다수결주의”라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아라카와는 이 에피소드가 일본과 오키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지닌 허점을 뚫고 들어가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듯이, 아라카와의 ‘독립’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민국가의 성립이거나 허명뿐인 민주주의 제도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란 점은 명확해 보인다. 그는 “자기 결정권”을 체제/제도를 넘어서 오키나와인 내면의 역사적 심층구조로부터 제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라사키는 아라카와의 이 발언에 이어, “독립”이건 “자치”이건 그 무엇이건 그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목적은 오키나와인이 평화적으로 스스로의 의지를 결정하는 권리를 확보해 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발언은 아라카와의 “자기 결정권”과 겹쳐진다. 그러나 아라사키는 유고 슬라비아의 예를 들면서 ‘독립’을 겉으로 드러내면 그것이 국가나 민족간의 전쟁을 불러와 민중의 삶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만약 오키나와가 독립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대국”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면서 그 속에서 자치와 자기 결정권을 확보해 감으로써 국가 권력을 내부로부터 조금씩 붕괴시켜 가자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지금 해야 논의할 것은 자치인가 독립인가가 아니라 “오키나와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스스로 대답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오키나와 내부의 구체적인 생활과, 오키나와를 둘러싼 외부의 국제정세 속에서 오키나와인이 평화적으로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국민국가 모델을 뛰어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발언이 더해 갈수록 아라카와의 자기 결정권과 아라사키의 생활권의 공유는 서로의 논의를 깊이 파고들면서 새로워졌고 오키나와의 내외부를 동시에 조명해 주었다. 우리는 ‘자기 결정권’이란 결국 ‘자기’를 둘러싼 “생활권”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변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획득된다는 것, 따라서 “자기결정권”이란 곧 “생활권의 공유”임을 느끼게 되었다.

* 오키나와 현재 속 ‘자기 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

자기 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라는 사상은 오키나와의 현재 속에서 그 의미를 더한다. 9월 10일 오키나와와 도쿄에서는 동시에 대규모 시위가 열린다. 오키나와 주민 10만명은 미국신형 군용헬기 오스프리의 오키나와 배치에 반대하고 후텐마 미군기지의 폐쇄/철거를 외쳤다. 이날은 “복귀” 이후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고 일컬어지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유래없는 규모의 점거 농성이 계속되었다. 도쿄에서도 같은 날 오키나와와 연대하여 약 1만명이 국회 포위 행동을 했다. 오스프리는 추락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온 헬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1일 주일 미군은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에 오스프리 6대를 배치했고 2일까지 6대가 추가될 예정이며 2014년까지 24대가 배치될 예정이다. 주택지에 둘러싸인 후텐마 기지에 헬기가 배치되면, 추락위험 뿐 아니라 소음도 주민들의 삶에 큰 고통을 줄 것이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는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에 큰 의미가 있는 만큼 아무쪼록 이해해 달라”고 발표했다. 오키나와인들의 분노는 더욱 하늘을 찔렀다.

미군기지의 폭력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0월 17일에는 오스프리 배치 지역의 긴장 상태 속에서 미 해병 2명이 귀가하는 여성을 성폭행한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가 들끓자 일본정부는 미국에 유감을 표명한다.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주일 미군 사령관은 사과하고 19일부로 미군들의 야간 외출 금지령을 발령하지만 11월 2일 또다시 미군이 술에 취한 상태로 민간에 침입하여 13세의 소년을 (성)폭행하고 기물을 파손한다. 오키나와의 반미감정은 극도에 달하자 미군은 27일부로 미군 장병에 대한 금주령까지 발령한다.

이 와중에 중국은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尖閣) 열도) 해역 주변, 보다 구체적인 표현을 쓰자면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의 해협에서 군함을 띄우는 등의 군사적 과시 행동을 지속했다. 이는 오키나와 주변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 상황 속에서 ‘자기 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라는 말은 어떤 울림을 지닐까? 오스프리의 강제 배치, 후테마 기지의 존속,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들은 오키나와에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진실을 폭로한다. 오키나와 내부 속에 있는 “전쟁지역=미군기지”에서 발생하는 폭력들은, 오키나와 외부에서 센가쿠 열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거나 하면 미군기지가 당연히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로 진전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오키나와 내부의 구체적인 생활과 오키나와 외부에서 생활권을 공유하고 있는 지역들과의 논의를 통해서 오키나와의 의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VS중국, 혹은 미국VS일본 이라는 국가관계 속에서 오키나와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 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가 갖는 구체적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키나와가 놓여 있는 자율적이지 못한 관계성의 혁신을 통해 오키나와 내부에 자율적인 질서를 만들고 외부에 평화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 선거 이후에 오는 것

그러나 “자기결정권”이나 “생활권의 공유”가 표현하는 가치는 단지 오키나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 가치는 오키나와 이외의 삶 속에도 제대로 주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주변의 폭력은, 일본 전역에, 세계전체에, 내 삶의 매 순간들에 깃들어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후쿠시마의 원전부근의 삶이며, 도쿄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야숙자(=노숙자, 홈리스)에 대한 추방이다. 현재 도쿄 고토구 타테가와 하천 부지 공원이 행정대집행의 위기에 처해 있다. 2010년 9월 미야시타 공원, 2012년 6월 미타케 공원에서 야숙자를 추방한 데 이어, 12월 3일~7일 사이 타테가와 하천 부지 공원에서도 행정대집행을 실시하겠다는 계고장이 발령된 상태다. (타테가와 한글 페이지. http://www.jca.apc.org/nojukusha/san-ya/)

이 앞 공원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 고토구 토목과.

이 앞 공원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 고토구 토목과.

타테가와 하천 부지 공원에 대한 탄압은 1월 27일부터 시작되었다. 공원 여기저기에 펜스나 강판 등이 설치되어 야숙자 텐트들은 마치 그 속에 갇힌 듯이 되었고, 잇따른 경고 속에서 야숙자들은 주거지인 ‘다목적 광장’에서 계고장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근처로 이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야숙자 추방과정은 변명 기회 부여 통지 -> 퇴각 명령 -> 계고장 ->행정대집행 순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마다 수십 명의 직원과 경찰관이 야숙자들 거주지로 와서 고압적인 자세로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며칠 전에 들린 타테가와는 대책 회의로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이 긴장감은 단지 적에게 맞서는 자들의 긴장감이 아니라, 누구든지 스스로의 삶의 장소를 결정할 “자기 결정권”이 있고 자기를 둘러싼 “생활권”을 만들고 공유해 갈 권리/의무가 있음을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12월 3일부터가 싸움의 절정이 될 것이다.

타테가와 하천 부지 공원의 블루텐트들

타테가와 하천 부지 공원의 블루텐트들

이처럼 오키나와에서 발신된 “자기결정권”이나 “생활권의 공유”가 표현하고 있는 삶의 가치는 단지 오키나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 가치는 선거의 순간에만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선거에 대한 관심은 정권교체에 집중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오키나와의 전설적인 두 명의 사상가는 선거 앞에 선 우리에게 “자기 결정권”과 “생활권의 공유”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삶 속에서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고 “생활권의 공유”를 통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할까? 선거도 정권교체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순 없다. 목적은 선거 이전이 아니라 오히려 선거 이후에 우리 스스로가 질문하고 만들어가야 할 무엇이다. 선거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만 삶의 변화는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오키나와의 “복귀” 40년의 시간이 이후의 40년에 거는 우려 섞인 희망이다. 또한 이것이 내가 선거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애써 관심을 갖으려고 노력하는 이유이다. 아라카와는 자신이 앞으로 40년을 더 사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지금의 20대가 40년 후 자기 무덤에 와서 그때의 상황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신의 죽음도 저렇게 당당한 실천의 역사와 날카로운 사상적 지평 속에서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자기 결정권”을 지닌 삶이며 또 세대를 초월한 “생활권의 공유”일까 생각하면서, 나는 선거 이후 오키나와와 더욱 친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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