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누구에겐가 진실하게 말하는 법, 엄이불박(嚴而不薄)

- 오항녕


1. 유감

“극심한 가뭄 끝에 단비가 흠뻑 내렸는데, 형의 정리(靜履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의 안부)가 어떠하신지요? 지난번 춘장(春長 친구 이만영(李晩榮)의 자)을 통해서 제가 형을 남에게 비방했다고 하여 형이 자못 언짢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대개 형의 지난번 일은 특히 저와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제가 과연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배척하였으니, 이른바 비방했다는 것은 빈말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면전에서 바로잡지 않고 남에게 비난을 했으니, 형이 언짢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 마땅히 저의 간곡한 진심을 모두 말하여 우리 형의 의혹을 떨어냈으면 합니다.”

2. 사건

현종, 숙종 연간에 대제학을 지냈던 김수항이 친구인 홍위(洪葳)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이다. 대략 1650년(효종1) 홍위가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 설서(設書 아마 강의 전에 책 준비하는 관원인 듯)로 있었고 김수항이 성균관 재생(齋生)이었을 때 벌어진 사건으로 보인다.(참고로, 김수항은 이 해에 율곡 문묘종사를 반대하며 율곡을 깎아내렸던 영남 유생 유직(柳稷)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에 앞장섰다가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짤린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풀려나 장원급제한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성균관 문묘 관리를 담당하던 서리인 전복(典僕)을 붙잡아간 모양이다. 시강원 서리가 잘못한 일을 성균관 서리가 치죄(治罪 벌을 줌)했고, 그러자 시강원에서 성균관 서리를 잡아간 듯하다. 시쳇말로 끗발로 밀어붙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 인해 태학(太學 성균관)과 시강원 사이에 장차 서로 편치 않을 사단이 있으리라는 우려가 높아졌다.

그런데 김수항은 이런 분위기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사리를 생각하지 않고 더러 함부로 행동하더라도, 두 관청 사이를 조정할 책임을 분명 군실(君實 홍위의 자)이 맡을 것이니, 우려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까닭은 “평소 무게감으로는 군실 형(당시에는 같은 또래도 형이라고 불렀다.)만한 사람이 없고 동류들과 정이 통하는 것도 형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 오해

그런데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홍위는 나서서 성균관의 무책임을 비난했고, 두 관청 사이의 감정이 나빠졌고 사건은 꼬였다.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양쪽 서로 잘못이다’라고 양비론을 폈다. 이때 김수항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김수항은 어느 자리에선가 홍위의 일처리가 그르다고 말했던 듯하고, 이 얘기를 듣고 친구인 홍위가 서운해서 전화는 아니고 편지를 했나 보다. 김수항의 말은 이어진다.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유학을 중시한 조선에서 학자의 전범은 공자였다.)를 지키는 하인을 조사하려고 잡아간 행동은 실로 3백 년 동안 없었던 변고이지만, 시강원에서 처음 사람 인형을 만들었으니 성균관 재생의 도리에서 어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말겠습니까. 시강원 서리가 중하다고 말하지만 강관(講官)을 수행하는 자에 불과하고 항상 시강원에서도 임의로 치죄할 수 있으니, 문묘를 지키는 서리는 사유(師儒 대사성) 이하가 감히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것과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현격히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성균관에서 시강원 서리를 조사하여 치죄한 데 대해서 저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령 재생들의 처사가 혹시 과격했더라도 시강원에서 먼저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일러바쳤으니 이 무슨 거조입니까?”

조선은 신분사회였다. 관직은 지식인이 맡았다. 즉 나랏일은 지식인, 즉 유생(儒生), 선비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담당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들을 ‘나라의 으뜸가는 기운[元氣]’라고 했다. 그리고 시강원 서리를 조사하여 치죄한 조치는 성균관 재생들의 공공(公共) 논의에서 나왔고 애당초 성균관 서리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시강원에서 성균관 서리를 가두라고 청한 것은 기실 유생(儒生 성균관 재생)을 죄 주라고 청한 것이고, 이는 나라의 원기를 능멸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4. 충언

나라의 원기가 선비에게 있는지 노동자에게 있는지는 시대의 차이이기 때문에, ‘나라의 원기가 선비에게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건 조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나 도덕적 명제가 아니라, 사실적 경험적 명제라는 것이다. 김수항은 계속 한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선비를 배양하는 도리를 가지고 임금을 이끌지는 못할지언정, 업신여기고 모욕하여 임금이 선비들을 박하게 낮추어보는 마음을 조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진실로 말할 것도 못되지만, 형처럼 생각이 깊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이에 사려가 미치지 못한 것은 왜입니까? 형이 알고도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바르지 않은 것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밝지 않은 것입니다.”

화가 났으되 엄정한 느낌이 있다. 김수항의 글이나 편지는 이런 느낌이 있다. 그러나 박하지는 않다. 엄이불박(嚴而不薄), 엄정하되 야박하지 않다는 말. 언젠가 어디선가 어떤 인물을 평가하던 역사가의 말로 기억하는데, 지금까지 그 경계가 어딘지 늘 궁금하였다. 김수항의 다음 말을 보자.

“형께서는 고요한 가운데 평정심으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전후 처사가 옳습니까, 그릅니까? 저희들의 오늘 말이 공정합니까, 사사롭습니까? 형의 일처리에 과연 조금치의 잘못도 없다면 저희들의 말이 망령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저희들의 말이 타당한 것입니다. 저희들이 망령되다면 형으로서는 잃는 것이 없고, 저희들의 말이 타당하다면 저희들에 대한 서운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쓸데없는 말로 변론하지 않더라도 자연 마음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쿨한 느낌? 내가 잘못했다면 형은 잃는 것이 없고, 내가 옳다면 형은 반성하면 되지 서운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쿨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만, 나는 그래도 이 말이 가슴에 닿는다.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 아마 이 쿨함을 느끼기 위해서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러하다. 이 느낌이 있기에 엄이불박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맞을 듯하다. 모처럼 내기를 걸만한 대선 게임을 보면서, 누군가 양보를 한 듯한데 여전히 찝찝한 12월 4일 오후에, 문득 생각이 나서 이 편지를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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