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소리연대 단상: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쁨

- 심보선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첫눈부터가 폭설이었고 기온은 유래 없는 한파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날씨에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철탑과 다리에 매달린 채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평택에서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아산에서는 유성기업 노동자가, 울산에서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칼바람과 눈보라와 싸우며 목숨을 담보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IMF 사태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해고자 복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기업의 부당노동행위 근절, 노조탄압 중단… 한국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 그들은 벼랑 아래로 하나 둘 밀려 떨어지는 동료와 동지들을 속수무책 바라보며, 혹시 다음 차례는 내가 아닌가하는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불안의 노예로만 살지 않기로 맘먹고 행동에 돌입했다. 그 불안을 야기한 구조와 책임자들의 불의에 저항하고 그들에게 온당한 책임을 묻고 다시금 예전의 삶을 되찾고자, 아니 그들이 잃어버린 삶보다 더 존엄한 삶을 요구하고자 철탑과 다리에 올랐다.

지난달 문화연대는 평택을 방문하여 고공농성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지지를 표명하는 문화예술인의 하루농성을 제안한 바 있었다. 나는 그 제안을 듣고 하루뿐만 아니라 고공농성 노동자들과 계속해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생각 끝에 나는 ‘소리연대’라는 기획을 트위터 상에서 내놓았다. ‘소리연대’는 트위터리안들에게 고공농성 노동자들에게 트위터를 통해 소설, 시, 에세이, 혹은 개인적인 지지 메세지를 녹음하여 육성으로 들려주자는 제안이었다. Soundcloud라는 앱을 사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음성 트윗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을 하였다.

왜 육성이어야 하는가? 작품 낭독, 혹은 음성 지지 메시지는 트위터를 사용하는 동시에 트위터의 조건-140자-을 넘어서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트위터리안들에게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사실 육성을 고집한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나는 소셜 미디어의 한계인 ‘좋아요!’ 풍의 커뮤니케이션을 소셜 미디어 자체를 통해 극복해보고 싶었다. 고공농성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소셜 미디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레퍼토리를 취하지 않고 보다 인격적이고 내밀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일까 궁리했다. 그리고 동시에 텍스트를 개인적 취향이나 입장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우리라는 공통성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일까 궁리했다. 이 단순한 궁리의 결과가 ‘소리연대’였다.

그런데 나는 소리연대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소리연대 참여자들의 육성에서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나의 경우는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한 구절을 선택했다. 나는 고공농성 노동자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첫 번째로 움직여 신호를 보내는 대담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의 평범한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어떤 참여자에게 그들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타고 있는 배보다 훨씬 큰 물고기, 상어떼 들과 싸우는 노인”이었다. 어떤 참여자에게 그들은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일하러 갈 때 생각하는 내 일상과 미래, 쓰라린 시간과 행복한 시간들의 동지”였다. 어떤 이에게 그들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을 없애고 죽음마저 죽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높은 곳에 오르는 짜라투스트라”였다. 어떤 이의 지지 메시지에서 그들은 “내 인생에 등장한 새로운 주인공”이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아저씨 힘내세요”라고 개사를 해서 불렀다. 어떤 이는 <파브르 식물기>에 나오는 산호초의 폴립이 서로 공생하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어떤 이는 헤어진 애인에게 썼던 이별의 통고를 연대의 선언으로 바꿔 읽었다. 그 외에도 <어린 왕자>, <걸리버 여행기>, <별>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텍스트들이 소리연대를 통해, 고공농성자들의 투쟁과 이 시대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재해석 속에서 고공농성 노동자들은 단순히 희생자나 피해자가 아니었다. 혹은 사회학적이고 경제학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적 행위자가 아니었다. 소리연대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평소에 쓰거나 읽은 글 속의 등장인물들, 혹은 일상적 상상 속의 등장인물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떤 고유한 싸움을 수행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고공농성 노동자들을 연결시켰다. 텍스트의 선택과 그것의 낭독을 통해 고공농성 노동자들은 다양한 주인공들로 재탄생해서 등장했다. 나아가 이때의 텍스트는 그저 텍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육성으로 고공농성 노동자들에게 낭독되는 순간, 다시금 피드백되어 낭독자들의 현실을 바꾸는 텍스트였다. 나는 육성으로 누군가에게 읽어준 텍스트, 즉 목소리로 육화된 상상력의 효과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타인을 향하는 동시에 ‘나의 삶’을 향한다. 그것은 나의 삶에 현실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어떤 참여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요즘 계속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고공농성자분들을 위한 소리연대에 메시지 녹음을 보낸 후로 내가 매일 보고 느끼고 행동하던 것들이 너무 벅차고 괜히 계속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눈 펑펑 내리는 거 보고 신나하다가도, 춥다고 발 구르다가도 그분들 생각이 나서…” 이 참여자는 이를 두고 “부끄러운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낭독이 ‘객체로서의 타인’에 대한 ‘동정(sympathy)’에 그쳤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죄책감의 해소, 혹은 보다 일반적인 해결책-이를테면 위로와 보상-에의 호소로 귀결했을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는 ‘낭독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 후유증이란 바로 자신이 스스로의 목소리로 상상하고 육화한 고공농성 노동자들의 감각이 역으로 자신의 일상감각에 끼어드는 증상으로서의 ‘공감(empathy)’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참여자에게 눈은 예전의 눈이 아니었다. 그가 맞는 눈에는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맞는 눈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가 느끼는 부끄러움 깨달음이란 두 눈 사이의 거리를 아프게 확인하는 동시에 그것을 소멸시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다.

나는 ‘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연대란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누군가의 정체성에 나의 이해관계를, 정체성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연대는 어떤 동일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혹은 다른 이해관계와 정체성이 전략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집단을 뜻한다. 그러나 소리연대에서 이루어진 연결은 그런 연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감을 통한 타인과 타인의 연결이었다. 이 연결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적 연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와 희생자에 대한 동정으로 이루어진 연결 또한 아니었다. 이 연결 속에서 고공농성 노동자들은 재해석된 텍스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 텍스트는 다시금 낭독자의 감각을 현실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리 연대의 ‘연대’는 그런 의미에서 어떤 공통 감각을 향한 중단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정치적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해둘 것이 있다. 이 정치적 드라마는 자의식의 드라마와 달리, 무지에서 계몽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자아의 자기 진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드라마에서 자아는 타인의 감각과 연결되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색하고 부끄러워진다. 이때 연대란 자아의 안전을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기어이 수행되고 모색되는 공통 감각이며 여기에는 어떤 종국의 완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연대에는 완성된 합일이 가져오는 열광이 없다. 다만 어떤 텍스트, 어떤 음성 덩어리를 주고받는 평등한 놀이, 말하고자 하고 의지와 듣고자 하는 의지가 만나는 것 외에는 어떤 룰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놀이에서 유래하는 기쁨이 있다. 나는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내가 들려주는 텍스트와 음성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선거 이후의 참혹함과 슬픔 속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쁨이라 여겼다. 그들이 높은 곳에서 시린 손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부끄러워도 내심 기뻤다. 나는 그들이 내려오면 묻고 싶다. 혹시 모르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러워도, 고단하고 암울한 삶의 무게가 마음을 짓누르는 와중에도, 실은 반갑지 않았냐고, 밤마다 그 추운 허공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전송되어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지는 않았냐고 말이다.

응답 1개

  1. 말하길

    정말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극한의 높이에서 삶을 부르짖는 고고농성자들을 시대를 거스른 책 속으로 끌어안는 방식, 꼭 참가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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