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뉴욕에 관한 그동안의 인상들

- 권용선(이본의 다락방 연구실)

뉴욕에 살기 시작한 지 벌써 2년 반이나 흘렀다. 그동안 대체로 여행자의 자세로 이 도시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단편적인 경험의 인상들을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해 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소극적이고 일면적인 인상의 파편들에 불과했다.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이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 혹은 다른 방식, 다른 속도로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와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이야기는 내가 가진 어떤 편견들, 경험들, 전제들을 안고 이 도시를 오해하고 이해하고 견디고 즐긴 시간들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때문에 그것은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어떤 일반성도 지니지 못할지 공산이 크다.
베리 메닐로우(Barry Manilow).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몇몇 노래들은 히트를 했고, 팬들도 제법 있는 뉴욕 출신의 올드팝 가수이다. 내 개인적인 취향의 관점에서는 그냥 그런, 좀 낡은 멜로디로 쉽게 대중들의 귀를 잡아끄는 미국의 설운도나 송대관 같은 이미지의 가수였다. 「프랜즈」의 어느 에피소드에선가 레이첼이 과거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이 베리 메닐로우의 노래(Copacabana)를 몹시 어설프게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켰던 것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었던 결혼식 하객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예전 남자친구와 절친의 결혼식을 망칠 뻔한 위기로부터 레이첼을 구한 것은 그녀의 로스도 아니었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도 아니었고, 베리 메닐로우의 흥겨운 노래, 뉴욕 사람이라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그 노래였던 것이다.
뉴욕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베리 메닐로우는 가장 뉴욕적인 가수 중 하나이다. 이 오래된 도시에서 나고 자라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의 뉴요커들에게 그의 노래는 묘하게 이 도시의 분위기와 자신의 추억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기운을 만들어낸다는 인데, 이 가수 또한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감대가 가능한 것이리라. 나 같은 이방인에겐 낯설 뿐인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 역시 어느 날 웨스트 빌리지를 지나며 문득 베리 메닐로우의 노래를 들었을 때, 그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뉴욕의 어떤 분위기와 자신의 경험이 한순간, ‘아, 그래 이게 뉴욕이었지’라는 식으로 확 와 닿았고, 그때 비로소 자신이 뉴욕에 살고 있다는 진지한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물론 대단히 개별적인 것이지만, 오래 시간을 들여 한 장소에 스며들어 살아본 사람이 아니라면 경험 불가능한, 만들어진 이미지지로서의 뉴욕에 익숙한 외부인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고, 또 표현할 수 있을까.
확실히, 맨해튼의 웨스트 빌리지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미드타운 쪽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지금은 비록 이 동네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어 자주 들썩거리기도 하지만, 오래된 아파트 담벼락에 붙어있는 담쟁이들은 여기가 바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배경이 되었던, 한 때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낭만적인 정취가 물씬 나는 동네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물론, 웨스트 빌리지만 진짜 뉴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은 이 도시의 터줏대감들이 모여 사는 동네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게토였고, 그보다 이전에는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 삶의 둥지를 틀었던 곳이기도 하다.
뉴욕에 얼마나 다양한 삶의 풍경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는, 이 도시를 동서남북으로 걸어다니다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쉬크한 도시의 이미지는 사실 드라마에서나 가능했다는 것도. 그러므로 뉴욕-뉴요커는 특정한 인종과 언어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언제나 복수로만 존재한다.
웨스트빌리지에서 소호와 노호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걸어오면 만나게 되는 차이나타운 에는 중국인 뉴요커들이 산다. 어쩌다 그들은 뉴욕의 가장 노른자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을까? 뉴욕의 명물인 브루클린다리를 그들의 조상이 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싼 임금과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맨해튼과 부르클린을 잇는 다리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 다리가 완성될 즈음 밀린 임금을 받을 겨를도 없이 대서양 바다에 수장되었다. 브루클린다리 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맨해튼브릿지 그리고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철도를 만들어낸 것도 그들이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그때 희생된 중국인들의 목숨 값이다.
차이나타운에서 북쪽으로 몇 블록 올라가면 이스트 빌리지가 나온다. 과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망명한, 그리고 2차 대전 시기 나치의 폭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둥지를 틀었던 곳이고,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모여 살고 있다. 이스트 빌리지에서 맨해튼 북단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이스트 할렘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남미 쪽에서 이주해온 히스페닉들이 모여 산다. 지금도 가난과 독재를 피해 남미에서 이곳으로 목숨을 건 이주는 계속되고 있고, 엄밀히 보면 불체자 신분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그들이 지금 뉴욕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을 해냄으로써 이 도시의 경제적 삶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스트할렘의 반대편엔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렘이 있다. 과거 줄리아니 시장의 악착같았던 ‘범죄와의 전쟁’의 이후 이곳은 적어도 대낮에는 맘 편하게 활보할 수 있는 관광지구의 하나가 되었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삶은 맨해튼 다른 지역의 뉴욕사람들의 그것보다 팍팍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른바 생활보호대상자로서 무지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지금 보면 조금 을씨년스럽지만, 1930년대 할렘은 지금의 미드타운 이상으로 활기를 띠는 르네상스를 구가했다. 지금도 125가에 있는 아폴로극장은 한때 유력한 연예인 등용문이었고, 마일즈 데이비스와 엘라 피츠제럴드와 마이클 잭슨 등이 모두 이 무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지금의 그들이 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맨해튼 중심부에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상가가 밀집해 있는 코리아타운이 있고, 차이나타운 옆에는 리틀 이탈리아가 있고, 이스트 빌리지 한 켠에는 저팬타운이 조그맣게 있다. 그리고 각각 떠나온 자기 나라의 이름을 딴 거리들이 이도시의 길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뉴욕이다. 이곳에는 100년 전의 모습도 있고 최첨단의 모습도 있다. 월세 수천만원 짜리 아파트에 사는 재벌도 있고 몇 끼를 굶다가 지하철 역사 한 귀퉁이에서 선잠을 자는 홈리스도 있다. 동성애자들이 거리에서 진한 애정행각을 해도 아무도 관심조차 두지 않는 곳이 이곳 뉴욕이며, 1년 가까이 도시 이곳저곳을 점거하며 시위와 농성을 계속하는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또한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곳이 또한 이곳 뉴욕이다. 이토록 다양한 삶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와 색깔을 버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곳, 어쩌면 그것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관용 혹은 불가침의 묵인이 지금의 뉴욕을 있게 한 가장 큰 힘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기획했던 바, 뉴욕을 탐구하려는 내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나, 이쯤에서 잠시 숨을 골라야겠다. 한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뭐가 보일까. 새로운 렌즈가 필요하다.

응답 3개

  1. 케이말하길

    고추장 그리고 덤
    내 가장 좋은 친구들.
    애초의 의욕이 용두사미 꼴이 된 느낌이라 좀 그렇긴하지만…
    어설픈 인상을 넘어서, 살면서 부딪치고 배우면서 더 좋은 얘길 풀어갈 시간이 올 것이라 믿고..
    그동안 조잡한 글에 훌륭한 지면을 할애해주신 위클리 수유너머에 감사.
    새해 복 많이. 모두들!

  2. 고추장말하길

    고생많았어요. 짧은 글이지만 맨하튼을 한 번에 스캔하는 느낌… 마지막 한 달 여기저기 함께 쏘다녔던 기억도 나고… 뉴욕이야기, 언젠가 다시 듣고 싶어요. 기대해도 되죠?

  3. 말하길

    소수민족 뉴요커들의 역사와 골목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어. 여긴 어느해보다 춥다. 거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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