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3)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4 – 1 욕심 버리기

정합적인 경험체계를 가진 사람은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을 거야. 지혜롭다면 바라던 것을 얻어서 만족할 수도 있을 거고. 그런데 남의 불행으로도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공감 능력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을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므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경험체계를 조직하는 데에는 정합성 말고 또 다른 경험 조직 원리가 있어야 됨을 알 수 있어. 다른 또 하나의 원리는 달라이라마가 강조하는 긍정성이야. 달라이라마가 말했어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채우라고.

그가 말하는 긍정성은 생명을 긍정하는 마음 즉 뭇 생명을 더 잘 살리려는 마음인 선의지(善意志)일 거야. 공감능력에 따른 선의지가 있다면 남의 괴로움을 함께 느끼니까 함께 벗어나려고 애쓰게 되지.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난 남의 기쁨과 행복도 함께 나눌 수 있어. 백지 한 장이라도 마주 들면 가벼워진다는 의미가 달라이라마가 말하는 긍정성의 의미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격언이구나.

그런데 하버지, 착한 경험체계를 가져야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앞에서 여러 번 강조하셨어. 그랬었지. 공감에 따라 착하게 살아야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미움이나 불안 등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보다 공감에서 비롯되는 사랑이나 자비 등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가 더 행복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마음만이 아니라 몸에 나타나는 반응도 그렇대. 불안이나 미움 등 부정적인 마음은 생체 리듬을 깨뜨리고 내분비를 교란시켜서 몸을 해치지만 사랑이나 자비 등 긍정적인 마음은 삶의 의지와 몸의 활력을 충만하게 만들어 준대. 그래서 행복해지려는 우리는 부정적인 마음을 쓸어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채우려는 거야.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돼? 그래서 수행해야 한다는 거지. 우리의 마음을 슬기롭고 착하고 아름답게 가꾸려는 우리의 수행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수정활동이야. 수행이란 달라이라마도 계속해서 강조하는 대로 운동선수들이 연습하듯이 부정적인 마음을 쓸어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연습이고 훈련이랬어. 수행이란 삶을 통하여 미련하고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쓸어내고 슬기롭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채우는 연습이래. 우리는 진선미에 대한 경험가능성을 실현하려고 이 세상에 온 수행자들이야. 그런데여기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가로막는 데에 슬기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야. 그러니까 긍정적인 마음 즉 선의지를 키우는 수행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일 거야.

하버지 어떻게 수행해야 착해져. 하버지는 착해지고 싶고 긍정적인 경험체계를 가지고 싶어서 다음과 같은 계율을 세웠단다. 첫째로 욕심을 버릴 것. 둘째로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할 것. 셋째로 하찮거나 부정적인 사물에서도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찾아낼 것. 넷째로 남의 괴로움에 공감하고 그 괴로움에서 함께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 하버지의 수행을 간추리면 욕심을 버리기, 남을 용서하기, 긍정적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그리고 공감하기를 연습하는 거란다. 이런 연습들로 하버지의 경험체계 또는 해석체계 또는 신념체계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아 더 많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단다. 이제부터 하버지가 네 가지 계율을 어떻게 지킬 건지 소개할 게.

첫째로, 욕심을 버리고 비우는 거야. 하버지, 잠깐, 욕심은 다 나쁘니까 버려야 한다는 거야? 비슷한 말로 욕망 욕구가 있어. 공통되는 의미소는 ‘바람’이지. 생물은 생존에 필요한 조건이나 물건을 바라게 마련이라면 ‘바람’을 다 나쁘니까 버리라고는 못할 거야. 오히려 바라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삶이 생명력 즉 생명의 에너지니까.

그러나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서 그것을 구분하여 욕심이라고 말해. 자신이나 남을 해칠 것을 바라거나,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바라거나, 제몫을 넘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우리는 ‘욕심을 부린다’고 말해. 처음에는 욕심을 종으로 부려서 어떤 바람을 이루고 만족할 수도 있어. 하지만 끝내는 욕심이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고 당사자가 욕심에게 사로잡힌 종이 되어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로 자신을 괴롭힘을 당하게 돼. 더 심한 경우는 욕심으로 다치거나 병들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 그래서 자신을 해치는 욕심을 물고기를 죽이는 미끼 속의 낚시나 사슴을 해치는 창이나 화살 또는 불나방을 끌어들여 태우는 등불 따위로 빗대기도 해.

그렇다면 욕심은 나쁜 거니까 쓸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겠네. 그 방법을 찾으려면 부정적인 마음 즉 불쾌한 감정과 욕심과의 관계를 알아야 돼. 오욕칠정이란 게 있잖아. 식욕, 물(소유욕)욕, 수면욕, 명예욕, 색(성)욕 등 다섯 가지 욕구. 그리고 기쁨(喜), 화남(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함(愛), 미워함(惡), 욕망(慾). 등 일곱 가지 감정. 그런데 오욕 때문에 칠정이 생긴대. 또 칠정이 오욕을 부추긴대. 그러므로 오욕과 칠정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돈다는 거야.

욕구를 채우면 칠정 가운데 유쾌한 감정인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스러움이 생겨.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욕구불만으로 칠정 가운데 불쾌한 감정인 화냄이나 슬픔이나 미움이 생기고. 그러니까 불쾌한 감정들은 욕구를 채우지 못한 불만 상태의 감정들이므로 이를 없애려면 적극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채우거나 소극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줄여야 불만스러운 감정들도 줄일 수 있지. 그런데 이를테면 소유욕처럼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으로 다 채울 수도 없고, 또 채울수록 끝없이 더 많이 욕심을 내게 되니까 만족을 얻을 수가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어. 만약에 소유욕을 줄이거나 버리고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아무튼 부정적인 마음 즉 불쾌한 감정의 근원인 욕심을 비우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도 봄바람에 눈 녹듯이 줄어들거나 사라져.

유쾌해지려면 지금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어떤 욕심인지를 찾아내어 그걸 줄이거나 비워야겠네. 그렇단다. 지금 나의 김정이 유쾌한 건지 불쾌한 건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거야. 유쾌하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 때문인지 묻고. 또 그 감정은 어떤 욕구가 채워져서 생긴 건지 물어야지. 불쾌하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돼.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욕구를 채우지 못해 생긴 건지를 다시 묻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킨 욕구를 정확하게 찾아내야 그걸 줄이거나 비우려고 집중적으로 노력할 수가 있어.

그런데 그걸 찾아내어 줄일 수 있는 것은 자기성찰 능력에 달렸어. 그리고 자기성찰로 불쾌한 감정의 근원적인 욕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찾아내는 데는 자문자답이 큰 도움이 될 거야. 이를테면 잔잔한 호수 같았던 내 마음이 사랑과 미움 또는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상반된 감정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고 하자. 만약에 끈질기게 자문자답하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 근원적인 욕구 또는 욕망이나 욕심을 고백하게 될 거야. 그 누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들이라고.

오욕 중에 사랑하고 싶은 욕망을 색욕(色慾)이라고 하는데 그걸 왜 색욕이라 해? 색욕이란 말을 먼저 만들어 쓴 것이 남자들일 거야. 그들은 성적 상대의 생김새보다도 건강하여 아름다운 피부색깔에 관심이 더 많아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거야. 아무튼 색욕에 만족하여 사랑의 기쁨에 들떠 있어서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서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찾아서 그 사랑의 기쁨을 더 크게 만들려고 할 거야. 그러나 간절하지만 사랑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여 불만인 사람은 미움이나 슬픔으로 괴로워질 거야. 그래서 그는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사랑하던 대상의 진선미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축소하거나 부인하려 할 거야.

정말 사랑하는 감정이 색욕에서 나온 거야? 사랑도 여러 종류가 있고 종류마다 그 사랑을 이끌어낸 본능적인 욕구는 다 달라. 그러나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그것을 사랑하게 될 가능성은 본능적인 거야. 그 중에 남녀 간의 사랑을 아름답게만 보려고 하니까 본능적인 욕구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 싶겠지. 사실 끌리는 대상이 사람마다 다르기도 해. 그러나 본능이 작동했다고 해서 아름답지 말라는 법은 없어. 이성애든 동성애든 아무리 로맨틱한 사랑이라도 특정 대상에게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끝내는 서로가 배타적인 성기 결합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성적 본능이 바닥에 깔려있음을 알게 돼.

하버지 말씀에 색욕에서 두 감정인 사랑과 미움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욕구마다 그에 따른 유쾌한 쪽과 불쾌한 쪽 양쪽 감정이 있게 마련이겠네. 그렇단다. 그래서 서로 반대편에 있는 두 감정을 시소의 양쪽에 빗대기도 하지. 그런데 시소에 빗대는 이유는 어떤 욕구에 사로잡혀 두 감정 사이를 넘나들지 말고 중심을 잡자고 제안하려는 거야. 그리고 중심을 잡는 것은 어떤 욕구나 욕망을 모두 비워서 그것에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 어떤 욕구나 욕망에 초연해서 욕구를 채웠다고 기쁘하거나 즐거워하지도 말고 채우지 못했다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도 말자는 거야.

하버지, 정말 욕심을 비우고 초연하게 살 수 있을까. 하버지도 이론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역학적으로 상반되는 두 감정의 중심이라고 하는 일점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생리적, 심리적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 오욕에는 식욕, 물욕(소유욕), 수면욕, 명예욕, 색욕(성욕)이 있다는데 이것들을 하나도 없이 다 비워버리고도 생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생존이 가능할 수 있겠니. 이를테면 식욕에 초연해야 굶주린 고통이나 배부른 만족 사이를 오가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생명체가 가진 욕구는 오랜 세월의 진화과정에서 발전시켜온 생명의 에너지이며 생명의 존재이유이기도 해. 그러니까 정당한 욕구를 말하기 쉽게 욕심이니 버리라고 해서는 안 되지.

그렇다면 욕심를 완전히 비우라고 권할 수는 없겠네. 그건 아니야. 비워야할 욕구가 있어. 해치는 것, 감당할 수 없는 것,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을 욕심이라고 하여 이를 욕구에서 떼어내서 구분했어. 이 욕심은 욕구 자체가 아니라 추구하면 해로운 상황인데도 추구하는 거지. 정당한 욕구인지 부당한 욕심인지는 상황의 결과에 따라 결정돼. 하버지 말은 본능적인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이 해를 끼치는 욕구가 나쁘다는 거야. 그걸 욕심이라 하자는 거야.

앞에서 인간에게 오욕이 있음을 살펴보았어. 그런데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는 그 오욕과 다른 것 같은데 어느 쪽이 욕심을 버리는 데에 도움이 돼. 매슬로우도 생리적, 안정적, 사회적, 자존적, 자아실현적인 욕구 즉 오욕을 주장하고 있어.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오욕은 대부분 매슬로우의 생리적인 욕구에 해당하므로 매슬로우가 인간의 욕구를 더 폭넓게 보여주지.

그런데 단계마다 욕구를 충족한 만족감의 질적 수준이 다르대. 행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욕심이 아닌 정당한 욕구는 충족해서 만족하도록 격려해야 돼. 격려를 하되 보다 지속적이고 총체적이며 고차적인 만족을 주는 욕구를 추구하도록 격려해야지. 매슬로우의 다섯 단계 중에 가장 고차적인 욕구는 진선미를 경험하는 자아실현의 욕구야. 여기서 자아실현은 경험한 진선미로 더 많은 생명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고차원적인 욕구 실현을 방해하는 저차원적인 욕구는 상대적으로 욕심이니까 줄이고 버려야 돼. 거꾸로 하위단계 욕구를 저절로 실현시켜주는 상위 단계 욕구 추구는 격려해야 되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총체적이면 지속적이며 고차적인 만족을 주는 더 높은 수준의 욕구를 추구하자. 할 수만 있으면 나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더불어 행복해지는 욕구를 추구하자. 그러면 더 높은 수준의 욕구가 더 많은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다만 한 사람이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모두 다 타고 나서 이를 다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그중에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는 것이 중요해. 그래야 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서로의 행복을 도울 수 있으니까.

하버지 말씀은 마치 남들을 위해서 살라는 것 같아. 그렇진 않아. 보다 높은 수준의 욕구를 추구하려면 방해가 되는 낮은 단계의 욕구들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야. 그리고 남들과 더불어 행복해지려면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고. 재산이든 권력이든 지위든 명예든 그것은 사회적인 자원이면서 또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야. 우리는 이 자원과 힘을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돼. 그러면 우리는 나만을 위한 하위단계의 욕심에 사로잡혀서 일생을 먹고 마시고 남들 앞에서 뽐내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테니까. 뿐만 아니라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할 한 공동체의 사회적인 자원을 독점하거나 독재하거나 독선하려는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그걸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니까.

그러나 하버지가 경제적인 부나 정치적인 권력이나 사회적인 명망이나 학문적인 지식 등의 힘 그 자체가 다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다. 만약에 이 힘을 얻는 과정이 정당하고, 또 위임받은 힘을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데가 아니라 위임해 준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자기결정권을 위임을 한 사람이나 위임받은 사람 모두가 행복할 거야. 만약에 저급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비운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에게 우리의 자기 결정권의 일부를 맡길 거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자아실현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버지, 자꾸 욕심을 버리라고만 하지 마시고 어떻게 버릴지 그 방법을 가르쳐 줘. 이제 그 방법을 부처님께 배우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맨 먼저 가르치신 것이 사성체(四聖締) 팔정도(八正道)란다. 사성체란 스스로의 괴로운 마음을 꿰뚫어보아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욕심을 찾아내서 이를 쓸어내고 평안을 얻는 네 가지 단계적인 방법이란다.

팔정도란 부정적인 마음을 쓸어내는 방법들인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명상[正定}이야. 팔정도를 간추리면 바르게 받아들여(인식하여) 이를 바르게 저장하고(기억하고) 바르게 생각한 후에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여 바르게 사는 것이 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라는 뜻이야. 그래야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대.

사성체 팔정도는 부처님이 경험체계를 선순환시켜서 행복해지는 수행 방법을 가르치신 거야. 부정적인 마음 즉 우리를 괴롭히는 불쾌한 감정들도 욕심에 사로잡힌 고정관념이며 허위의식들이란다. 만약에 욕심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고정관념이나 허위의식을 하나라도 버리면 경험체계를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돌리고 안경의 굴절을 단일하고 작게 색깔을 단일하고 옅게 만드는 거지. 하버지도 부처님의 말씀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욕심을 줄이거나 버려야 되고, 그리고 욕심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것을 해탈이라 믿고 있어.

그런데 불쾌한 감정들로 괴로운 사람이 그 감정들의 근원이 어떤 욕심인지를 밝혀냈다고 해서 욕심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 괴로움의 근원적인 욕심을 찾아내는 것은 어떤 욕심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피해를 얼마나 주는지 알고 그래서 욕심을 버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려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야. 네 말대로 이를테면 게임 중독자가 많은 시간을 게임에만 매달리니까 건강도 해치고 하던 일도 못하고 감정의 기복에 시달리는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안다고 게임하고픈 욕구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런데 만약에 세상에 어떤 욕구를 생기게도 하고 끊게도 할 수 있는 자동화된 방법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틀림없이 힘 있는 사람이 그 방법이나 기술을 거꾸로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특정 욕구를 심어서 노예로 삼아 부려먹으려 할 거야. 한마디로 욕구를 조절하거나 끊어버리는 효과적인 기술이나 방법은 아직 없어. 그리고 그런 기술이나 방법이 생겨서도 안 돼. 만약에 지금 내가 어떤 욕심을 채우지 못해서 괴롭다면 그냥 끊어버리는 거야. 그냥! 어떤 문제든지 해결방법이 있게 마련인데 ‘그냥’이라니 너무 무책임하잖아.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욕심을 끊도록 격려하는 데까지야. 이제 더 할 말은 ‘그냥’ 밖에 없어.

하버지가 담배를 끊었던 얘기를 하나 들려줄게. 담배 피우는 사람은 가래 나오는 것만으로도 담배가 해롭다는 것을 알아. 그들은 대부분 여러 번 끊으려다 실패한 사람들일 거야. 만약 고통 없이 끊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커다란 대가라도 기꺼이 지불했을 거야. 하버지도 그 중에 하나였단다. 그 때 하버지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달리기(조깅)을 했어. 그런데 목에 가래가 끼니까 훨씬 더 숨이 차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단다. 그때 네 엄마가 또 담배를 끊으라는 거야. 끊을 자신이 없어서 하버지가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지. 네가 손주를 안겨 주면 그 땐 끊으마. 그런데 이게 웬 일! 네 엄마가 결혼한 뒤 4~5년을 기다려도 안 생기더니 떡 네가 생긴 거야. 그래서 너 낳던 그 날 끊어 버렸단다.

물론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를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중독될 가능성은 타고난 거잖아. 그렇단다.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면 만족의 종류에 따른 행복 물질이라 불리는 신경전달 물질이 뇌에 분비되어서 쾌감을 일으킨대. 이들 도파민이나 엔돌핀 세라토닌 옥시토신 멜라토닌 등의 신경전달 물질이 많으면 쾌감을 느끼지만 가꾸로 부족하면 불쾌감을 느끼게 된대. 이른바 행복물질이라 불리는 이것들은 어떤 욕구를 충족했을 때에 만족감을 느끼게 하여 그 욕구를 계속 추구하도록 만든대. 그래서 성공적인 조건 반사의 동기로, 또 자아실현의 동기로 작용한대. 그러나 행복했던 경험을 추구하도록 작동시키는 이 신경전달물질이 불행을 가져오는 중독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면 이는 아주 심각한 역설이구나.

담배를 중독시키는 물질인 니코틴이 바로 행복물질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하도록 유도하여 쾌감을 일으킨대. 하지만 어떤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쾌감은 아니야. 오히려 심장과 폐의 기능을 조금씩 망가뜨리고 암을 유발시키는 대가로 얻는 쾌감이야. 그런데도 중독자는 쾌감을 높이려고 조금씩 더 많은 니코틴을 흡입하지만 몸은 더 망가지는 악순환으로 제 명에 못살게 되겠지. 만약에 누가 해롭지도 고통스럽지도 않게 담배를 끊는 약물이나 장치나 심리 요법을 개발해냈다면 아마 그는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은 어떤 욕구나 욕심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야. 그래서 하버지도 ‘그냥’ 끊었어.

흔히 욕심부리는 것을 불장난에 비유하는데 그 비유가 아주 그럴듯하잖아. 정말 딱 들어맞는 비유야. 어린아이들은 불장난을 좋아하지. 밝은 곳을 좋아하는 나방들이 밤에 불을 켜놓으면 찾아들듯이 불을 피워놓으면 아이들이 모여들지. 먹을 것을 굽거나, 땔감을 던지거나, 다른 곳에 옮겨 붙이거나, 한 쪽 끝이 불붙은 막대를 집어 들어 휘두르기도 하지. 그런데 불장난의 재미는 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때까지야. 불꽃이 번지기 시작하면 마치 나방이 불꽃에 타죽듯이 인간도 한순간에 욕심의 불길에 타죽거나 병들거나 화상을 입을 수가 있어. 또 한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그 뜨거움이 지속적인 고통을 줄 수도 있고.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가 어떤 욕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 욕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알고 있어도 욕심을 놓지 못하는 까닭은 무어야? 그 까닭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 하나는 욕심의 위험을 충분히 알지만 욕심을 비울 수 없으므로 자포자기 상태에서 욕심을 채워 얻는 쾌락을 즐기다가 욕심의 불꽃에 타죽어도 좋다며 자신을 욕심에 내맡겼기 때문일 거야. 다른 하나는 욕심의 위험을 알기에 위험해지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욕심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거야. 물론 대개는 후자이겠지만 바로 그게 덫이나 올무에 걸린 꼴이야. 한번 올무나 덫에 걸리면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한 번 욕심에 사로잡히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잖아.

법륜이라는 스님은 욕심이라는 불덩이를 놓지 않는 이유를 아직 덜 뜨겁기 때문이라더라. 그럴 거야. 그분도 하버지와 같이 시간이 갈수록 욕심을 놓기가 더 힘들고 고통은 더 커진다는 거야.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불장난하지 말라고 야단치듯이 욕심을 그냥 버리라고 하는 수밖에. 이 세상에 욕심을 버리는 데에 도움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버리라고. 욕심의 뻔한 결과를 안다면 욕심을 버리는 방법을 찾지 말고 그냥 버리라고. 그게 하버지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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