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두물머리 토크쇼#1 밭과 두물머리

- 홍조

2012/10/10(수) 7:30~11:20 카페 별꼴

두물머리 유기농 토크쇼 그 첫번째, <밭田: 밭과 두물머리>는 약 30여명의 청중과 패널들이 모인 가운데 4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패널들의 소개로 시작한 토크쇼는 점차 패널과 청중의 구분이 중요치 않게 되었으며, 중간중간 (청중의) 질문과 (농부의) 증언들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록빠 작목반 이야기

“저희 밭(작목반) 소개를 드리려면 먼저 “록빠”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록빠는 티벳난민을 돕는 단체에요. 록빠는 티벳어(외래어)로 ‘함께 걸어가는 사람’라는 뜻이지요. 인도 다람살라에 록빠 1호점 카페와 탁아소, 도서관이 있고, 한국에선 록빠 2호점인 <사직동 그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록빠 작목반”은 <사직동, 그가게>에서 쓸 채소들을 키워 기부하는 작은 농사모임으로 두물머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솔밧 : 록빠 안에 모인 친구들이 다들 그런 공감대가 있더라고요. 뭔가 생태적인 것에 관심도 많고, 다른 삶, 느리고 편하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그래서 작목반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멍이 제안을 하고 진행된 게 2010년 12월쯤이었어요. 저도 사심이 있었어요. 텃밭을 언젠가 해봐야지. 하는 마음을 몇 년 째 품고 있다가. 밭일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마침 이런 모임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합류를 했어요. 원래 서울 근교 가까운 곳이랑 두물머리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4대강 투쟁에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하면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두물머리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 거기에 확 동의가 됐거든요. 두물머리에 와보신 분들은 다 동의를 하실 것 같아요. 두물머리 경치와 사람들, 그런 것들에 다들 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3월 초에 처음 갔는데 냉이도 캐고, 그런 걸 시작하게 된 게 저에게 큰 즐거움이어서 열심히 하게 되었어요.

로맨스조 : 사실은 록빠에선 그 밭에서 오이 토마토 같은 경작물들을 수확을 하면 그게 사직동 그 가게라는, 록빠 2호점. 그 가게에서 가공이 되고, 그게 판매가 되고, 판매 수익금이 다람살라로 가는. 두물머리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결국에 다람살라로 가는 그 네트워크를 형성한 게 중요한 게 아닌가하는데요?

솔밧 : 제가 지금 <사직동 그가게> 카페지기로 일하고 있거든요. 제가 음식을 ‘어, 이거 내가 따온 가지네?’ 이러면서 요리를 하고 요리를 테이블에 내면서 한 마디 하는 거죠. 이거 저희(작목반)가 직접 키운 거 에요. 손님들도 놀라워하시고. ‘어 진짜요?’ 이러면 ‘유기농이구요 정말 맛있어요.’ 이런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실제로 작목반은 아니지만 록빠 안에서 다른 카페지기 친구나, 이런 친구들도 작목반이 채소를 키워서 갖다 주는 게 좋기도 하고 안심도 되고. 한 친구가 그가게에 오면 참 좋은 게 음식을 먹으면서 이 음식이 두물머리에서 와서 4대강도 생각할 수 있고 또 여기서 음식을 먹으면서 작은 돈이지만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벳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연결고리들을 생각이 나면서 뭔가 뿌듯한 마음도 있고. 무엇보다 이게 시작된 게 두물머리 땅인 거잖아요. 내가 밟고 만지고 하는. 그런 땅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런 것들이 굉장히 큰 것 같아요. 막연히 말하면 감동이라고 할까.

로맨스조 : 행정대집행이 시작되기 전 록빠와 록빠-작목반의 사이, 이 지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재형 : 티벳 난민들을 돕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록빠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난민들의 자립이나 생활에 도움을 주자는 식으로 운동을 해왔어요. 록빠 작목반이 두물머리에서 텃밭을 하며 이 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면서 동아일보(올해 6월 23일 동아일보 1면에 두물머리 관련 기사가 났다)나 이런 거대 언론들의 정치적인 접근이 행여나 악영향을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고요. 앞서 말한 록빠에 작목반이 생기면서 두물머리에서 티벳 난민까지 이어지는 연결고리도 생겼지만 인터넷에 ‘록빠’라고 검색했는데, ‘티벳난민’ 보다는 ‘4대강’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고 그런다면 뭔가 오해/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얘기를 하다가, 다음 회의에서 뭔가 더 진도를 나가보기로 했지만 다음 회의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임인환 농부의 증언 : 딱 한 마디로 하면, ‘아기자기함’ 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농사짓는 모습도 아기자기하고, 서로 음식을 나눠먹고 도시락을 나눠먹고 음식을 나누고, 저녁에 음악을 부르고 노래하고 하는 아기자기함. 두물머리에 멜로디잔치 했잖아요, 그 문화적인 충격. 두물머리에서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것. 이후의 두물머리의 토지 이용에 있어서 큰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록빠가 굉장히 체계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씨앗을 직접 구해 와서 모종을 키우고 저는 처음에 당황했어요. 제가 시민텃밭 작목반장인데, 제가 모르는 씨앗을 가져와서 이걸 어떻게 하냐고 했을 때 그 당황스러움도 많았죠. 농사꾼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솔밧 : 인터넷의 귀농사모나, 이런 데에서 씨앗을 나눠드립니다. 하면 이것도 심고 저것도 심자 하면서 다 신청을 한 거죠. 종류가 너무 많아져서 나중에는 씨앗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얘기했어요.

임인환 농부 : 저희가 농사일이 너무 바쁘다보면 못챙기는 것들에 대한 그런 걸 잘 지적해주는 입장이 되기도 했어요. 농사꾼의 자존심을 또 무너뜨린 게 뭐냐면, 올해 영훈의 그 수박. 저도 컨테이너 옆에 하우스에 저도 도전정신이 있어서 수박을 심어봤습니다. 500개 심어봤는데 2개 수확했는데. 영훈이는 엄청 많이 수확을 했어. 이런 새로운 작물을 심어보는 록빠의 도전정신이랄까 굉장히 좋았고, 또 그 수확한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조건들도 좋았습니다. 흙을 맨발로 밟아보고 땅을 향유할 줄 아는 록빠의 모습 참 신선했다고 봅니다.

노들야학 텃밭 이야기

“노들야학이나 장애인운동은 ‘불복종’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올해 두물머리에 불복종텃밭을 생각하고 있는데, 노들야학도 한 번 해보면 어떠냐 하는 제안이 있었지요. 제안도 제안이지만,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인데 유기농 먹거리에 접근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먹는 것이 매우 취약합니다. 유기농과는 정반대이지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우리가 늘 해오던 방식이지요. 이번에 두물머리 불복종 텃밭을 함께하게 된 것은 거기에 더해서 장애인도 우리의 먹거리를 직접 재배해보자 하고 뛰어든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에 농민들과의 연대도 있었구요.”

유미샘 : 저희가 두물머리 지키는 싸움에 잘 해보려했지만, 일단 노들 장애인 야학 전체 구성원을 옆구리 찔러 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어요. 저희 야학이 대학로에 있거든요, 대학로에서 두물머리까지 가는 길이 일단 멀기도 하고요.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만 타야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게 있었고, 무엇보다 두물머리의 화장실이 휠체어를 타시거나 하시는 분들은 이용할 수 없는 화장실인 거죠. 그런 것도 있고 정말 신체 조건상의 문제로 농사가 쉽지 않은 분들이 계셨어요. 아예 불가능한 분들도 계셨고.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 비장애인들에게, 걸어 다니거나 손을 쓸 수 있는 사람들한테만 집중되는 것이 있었고. 그러다보니까 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저희 밭은 어느 덧 잡초로……. 저희가 그런 것을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닌데, ‘마음만 앞선 텃밭’이 되었습니다.

디온 : 페이스북에서 한 친구한테 두물머리에서 장애인 밭 이런 것을 디자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며칠 후에 노들야학에서 바로 전화가 왔어요. 가겠다고. 그래서 저는 사실 불러 놓고도 두려움이 앞섰죠. 과연 이분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몇몇 분들과 선생님들이 나름 열심히 격주로든 3주로든 오셨거든요. 선생님들 되게 바쁘시거든요, 진짜. 농부 아저씨들한테도 조심스럽게 많이 물어보고. 작물마다 심는 간격이 다 다르잖아요. 길도 내면서 작물의 키와, 길과 길 사이의 고랑과 이랑의 사이 이런 것들의 간격과 디자인과 이런 것들을 언젠가 한 번 다 모여가지고 그림을 막 그려가면서 했던 그 기억이 되게 좋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해외에는 사례가 많다는 거에요. 되게 부족한 자원으로 그 시간에 할 수 있었던 거를 우리가 마음을 내서 열심히 한 것이 재밌기는 했는데 나중에 공부를 좀 더 해서 하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로맨스 조 : 저는 처음에 노들텃밭을 봤을 때, 하나의 사건처럼 보였어요. 그 밭의 형태가. 우선은 별 게 아니었지만, 휠체어가 지날 수 있는 길이 밭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고 경험해본 바가 없었거든요. 한국에서도 비장애인을 위한 밭이었지, 장애인이 농지에 갈 수 있는 밭이 없었다는… 굉장히, 어떻게 보면 조심스러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신선한 제안이었고 앞으로 대안으로서 보면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리혁종 : 듣다보니까 떠오르는 영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죽은 닐 암스트롱, 달에 갔던 사람, 아무튼, 이렇게 들어보니까 휠체어사용자가 밭을 들어갔다, 이 자체로가 세계 문명사에 기록이 없지 않을까. (해외에 사례들이 많아요. ) 아, 많습니까? 저는 못 봤습니다. (웃음) 저는 흥미위주의 접근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좋은 사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실제 거기에 들어갔던 분들, 달 착륙하듯이……. 그분들의 증언이나 이런 게 좀 다른지, 아까 삼십 몇 분이 계셨다고 하는데, 좀 몇 차례정도 다니셨고, 워낙 가는 여정 자체가 사람을 지치게 만들 것 같아요. 밭 자체의 고됨도 있겠지만, 거기에 간 체험자의 횟수나, 그런 증언들이 어땠는지가 궁금합니다.

유미샘 : 농사를 지을 때 밭에 같이 가셨던 분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비장애인인 제가 그분들과 일을 같이하려고 휠체어 길도 내고 했지만, 결국에 휠체어타신 분들 세 분 정도가 그 밭에 1번에서 3번 사이 이렇게 가본 것 같고. 지적장애가 있으신 언니가 한 분 있는데, 그 언니는 같이 갔던 다른 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아무리 일을 시켜도 일은 안하고 땅만 팠다는. 다른 곳을 팠다는. 밭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증명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처음 시작할 때, 학생들 우르르 가지 말자고 했던 게, 어디 외출을 할 때면 이동부터 먹는 문제나 화장실 가는 문제가 다 세밀하게 계획을 짜야 돼서 일부러 처음에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작게 시작해서 우리가 지속할 힘이 있으면 그 때 왕창 제안을 해서 우르르 가보자 했던 거지요.

유미샘 : 저는 노들야학에 가기 전에 저는 개인적으로 생협 조합원이었어요. 친환경 농산물, 유기농산물 이런 걸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노들야학에 가서 학생 분들을 만났어요. 대체로 기초생활수급권자로 한 달에 많으면 50만원정도 정부 보조금을 받고 살아가시는데 이분들이 드시는 음식이라는 게 그야말로 유기농과는 정반대의 것들이었어요.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혼자 먹기 어렵기도해서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을 일상적으로 드시고 계셨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게 되었고 일단은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밖에는 답이 안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도 유기농산물 이런 것들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누구나 원한다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부가 소유하는 문화 같다는 생각이 좀 많이 들어서. 그래서 장애인들이 유기농이나 안전한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하는 그런 방식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임인환 농부 : 노들야학이 텃밭을 하면서 장애인들이 흙을 만지고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해보는 실험을 두물머리에서 했다고 생각해요. 작지만 두물머리 농민들만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밭전위원들이 그 배려를 했다는 것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보고. 앞으로도 밭을 만든다고 한다면 어떠한 형태로라도 장애인 친구들이 흙도 밟아보고 농산물도 수확해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에코토피아 이야기

“에코토피아는 4대강에 맞서 싸우겠다는 원대한 포부와 함께 두물머리에 놀러오기 시작했습니다. 두물머리의 아름다움은 파괴로 점철된 4대강 토건공사의 극점에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 무엇보다 사람들과 이 아름다움을 함께 느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맥락에서 에코토피아 캠프도 개최하고. 일상적으로는 농사일을 함께 하자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고! 뭘 하나 해도 꼭 함께해야하는 것처럼, 대단한 것처럼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알려내었지요. 실제로 대단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농활도 많이 했구요. 첫해에는 배추농사를 크게 지어 ‘4대강 포기 배추’라고 널리 알리고, 판매하기도 하였지요.”

승욱 : 에코토피아 텃밭은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텃밭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런 것이 있었다… (웃음) 그걸 어떻게 잘 이용해먹을까 하는 고민으로 텃밭이 항상 있었는데. 에코토피아는 2010년부터 두물머리에 엮여서 활동을 시작했고 그 전에 에코토피아 캠프가 있었고. 그건 여기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처음에 두물머리에 2010년에 왔을 때, 4대강에 대해서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진짜 빨리 공사가 시작되면서 할 수 있는 여지가 없고, 개입할 게 없고. 현장이 전국 곳곳인데, 팔당 소식을 듣고 거기 가보자해서 왔고 할 수 있는 게 많았을 때 만난 거죠. 그래서 해보자 그런 거고. 처음에 왔을 때 되게 좋았었거든요. 왜냐면 그 전에도 알음알음 밭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어디 황무지 같은 데서 밭을 하다가 여기 왔더니 지렁이 막 다니고 맨발로 다니기도 좋아서. 풍광 자체도 너무 아름답고 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4대강 공사를 한단 말이야? 이런 것이 당연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사람들이 여기 많이 오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도 미사가 계속 진행 중이었는데. 미사를 드리는 걸 보면서. 아, 저런 거 참 대단하다. 맨날 사람들을 끌어 모으다니. 미사처럼 우리도 계속 이곳에 오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점차 텃밭을 일구면서, 같이 하자고 꼬시기 시작했죠. 본격적으로는 2010년 가을부터, 텃밭을 하면서 씨를 뿌려도, ‘야, 씨를 뿌리니까 와라.’ 김매기를 해도 대단한 것처럼, 사람들이 꼭 와야 할 것처럼 ‘총 김매기의 날’ 이렇게 하고. 에코토피아 안에서도 농사나 수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고.

승욱 : 뭐 아무튼. 그러다가 해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대표적으로 옆의 록빠 친구들도 텃밭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랑 다르게 모종도 내고. 우리 농사에 대해서는 공부하거나 직접 해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는 모종 사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직접 내고. 거기다기 신문지로 멀칭을 하고 그랬는데, 저게 웬 말이 되는 짓인가 그런 것을 통해서 자극을 좀 받았던 것 같아요. 아, 농사를 저렇게 한단 말인가?

솔밧 : 그런데 우리보다 더 잘했죠? 저희가 이만큼 했을 때, 수확 이만큼 해서 저희가 위기감도 느끼고 자괴감도 느꼈어요. 어쨌든 좀……. 잘 하면서 왜 그래.

승욱 : 암튼 농사 자체로서는 록빠 작목반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변화한 게 2012년도에는 그냥 에코토피아였다가 에코토피아 작목반을 만들었습니다. 모종도 직접 내고, 신문지 멀칭하고, 오줌액비도 만들어주고. 그래서 우리도 어설프게 따라하고 배우면서 농사일을 차츰 배워나갔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노하우도 생기고, 수확량도 많아지고, 농사-재미도 커졌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처음의 대의(4대강)는 희미해지고, 농사일과 유기농지 보존 싸움에 올인하고 있었지요. 3년 동안 함께 농사 지으면서 ‘농사의 달인’도 배출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임인환 농부 증언: 배추밭을 공동으로 시작을 했는데 그 때 농사가 잘 안 됐어요. 벌레도 많이 끼고 진딧물도 많이 끼었을 때 이 사람들이 이걸 팔러 나가는 거에요. 이 친구들이 그런 자신감들이나, 무모한 자신감들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 두물머리 농지보존 싸움에서 전투조의 역할들. 사회 저변에 두물머리 상황을 알리는 데 역할이 있었다고 보고. 그러면서 에코토피아는 뭐냐면 두물머리 투쟁에 전진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요. 두물머리가 송촌리가 합의를 하고 두물머리에 7농가가 나갔을 때, 그 외로움이나 두려움 아니면 어쩔 줄 몰랐을 때 그 부분을 채워준 거죠. 그런 의미에서 두물머리 싸움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제는 농사도 잘 지어요.

천주교 농부학교 이야기

“천주교 농부학교 5기부터 두물머리 농사를 함께 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세곡동 옆에 텃밭공간이 있었는데, 두물머리 소식을 듣고 여기서 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 판단하게 된 거죠. 다른 텃밭들과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학교’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전국의 유기농지에 여기저기 배우러도 많이 다니고, 많이 다니다 보니 그 중에서도 두물머리 땅-흙이 정말 좋다는 것도 알겠더라고요.”

마르티노 : 2010년에 저희 신부님이 생명평화 미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두물머리에서 텃밭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여기 와서 같이 해보자. 그해 3월 미사터 바로 옆에 작게 한 60평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록빠랑 에코토피아랑 조금 다르게, 농부학교이다 보니까 전국의 유기농업 하는 데를 돌아다닙니다. 저는 한 2년을 해서 귀농을 할 준비를 한 거고. 학교다 보니까, 배우는 것들이 있고, 농사일도 배우는 대로 디테일하게 이것저것 실험하면서 해보는 것이 많이 있었죠. 두물머리 땅이 좋아서 때로는 필요없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배운는 것이니까 한 번 해보기도하고. 작물별로 한 15개 정도의 배치도도 다 그리고 신문지멀칭, EM 활용, 방제하는 것도 직접 만들어보고, 바닷물도 이용해보고. 아무튼 이것저것 실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해보면서 느낀 것은 ‘정성을 들인만큰 된다!’ 는 것. 또 두물머리에는 실제로 농사짓고 있는 농부들, 또 록빠처럼 새로운 작물과 새로운 농법으로 실험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옆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5기도 그렇고 6기도 그렇고 처음에는 15분 정도 함께 시작을 합니다. 처음에는 즐겁고 좋은데, 6월 쯤 되면 풀이 너무 많아지고 그럼 일이 너무 힘들어지고 그래서 안 나오는 분들이 많아져요. 그래서 매년 2~3명 정도만 남게되죠.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하리라’ 이런 말도 있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농부학교는 미사 때 마다 오시는 신부님들과 신자들의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하여 텃밭은 어떻게든 열심히 하게 되죠. 신부님-신자님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천주교 텃밭이 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올해에는 감자도 많이 심어서 여름에 유아 생태학교에서 150명 정도 와서 감자캐기 체험하면서 수확도 다 하고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과 서먹서먹했는데, 작년 여름 지나고 가을 오면서부터 두물머리에 행사도 많아지고 하면서 차츰 ‘두물머리 식구’로 동화된 것 같아요. 올해 시작하면서는 새로 오신 분들한테 두물머리와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싸움에 대해서도 ‘농사’, ‘미사’, ‘행사’로 미리 설명을 하기도 했어요.

임인환 농부 : 농부학교는 생명평화미사, 두물머리 미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초창기에는 성당 중심으로 텃밭 농사를 했고. 그 역할, 성당의 농사, 농부학교의 농사가 두물머리 미사에 큰 힘을 주었던 겁니다. 미사 덕택에 많은 분들이 오게 됐고, 신부님들이나 오시는 신도분들이 더 찾게 되었고. 달군님이 티셔츠에 그리신 ‘농사가 투쟁이다’ 이 부분을 가장 많이 도와주신 농부학교, 천주교. 농부학교 같은 경우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다양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두물머리 미사를 해온 만큼 농부학교 텃밭은 의미가 큽니다. 과천성당하고 미카엘라님이 마늘을 심어주면서 주로 채소농사였는데 계절적인 작물을 해주신 거 이런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4대강-두물머리 투쟁과 농사 : 농부 옆에서 농사를 짓다.

승욱 : 저희가 맡은 부분이 투쟁 부분이어서. 두물머리가 어떻게 보면 농성장이었고, 농성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많이 항상 모여야 한다는 것인 것 같아요. 어느 투쟁 농성장이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매개나 이벤트, 그런 고리들을 가지고 있을 텐데, 두물머리는 그게 농사가 아니였나해요. 농사를 꼭 같이 짓는 형태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책임지고 한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걸 배우고 싶은 사람이 많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잘 모르더라도 조금씩 같이 땅을 밟고 흙을 손으로 만지면서 뻘쭘하지 않게 있을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그래서 투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예를 들면 두리반에서는 음악이 그랬고.

달군 : 실은 사람이 많이 이곳에 와야 한다는 것도 있겠지만, 두물머리여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게 제일 컸거든요. 농사가 목적이자 수단이었던. 농사를 계속 지어야 한다는 게 투쟁의 목표였기 때문에. 땅들이 계속 생기니까 이 땅들을 놀리지 않고 계속 농지로써 유지하는 것. 그것 자체가 되게 상징적이고 하나의 투쟁 자체고, 그래서 내세울 수 있었고. 우리는 여기에서 농사를 계속 짓는다, 이런 게 선언과 행동과 이런 것을 꾸준히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에코토피아 사람들은 다, 록빠도 마찬가지고 농사를 하고 싶어 했었고. 개인의 욕망과 투쟁의 정치적 목적과 이런 게 잘 맞아떨어져서 농사를 짓게 된 거고. 그렇기 때문에 투쟁 현장에서 항상 듣는 정당성 당위성, 이런 것들을 홍보하려고 하면서 스스로도 가지려고 하고 그게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솔밧 : 표면적으로만 보면, 주말만 가서 농사짓고 오는 거죠. 그렇지만 이런 행위에 의미들이 되게 많은 거에요. 저 같은 경우에는 텃밭을 하고 싶었던 것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게 좋은 거고. 가서 아저씨들한테 배우고, 잘 가르쳐주셨어요. 또 저는 계속 도시에서 나서 자랐으니까, 시골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아주 시골은 아니더라도 땅 밟고 흙 만지고 그게 되게 크더라고요. 작년 같은 경우에는 주중에 출판사에 다니고 있어서 정말 피폐하고 피곤해있었어도 두물머리 갔다오면 몸과 마음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계속 가게 되는 게 있었어요. 그냥 갔다 오는 게 여러 의미를, 다 너무 즐겁고 좋은 거에요. 저는 좋은 게 있으면 혼자만 알긴 아깝다,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된다. 주변의 친구들을 많이 데려 왔거든요. 그래서 자칭 두물머리 영업이사로, 바로 바로 잘 이어지게 되더라고요. 나중에 두유작전 한창 펼칠 때도. 뚜렷한 정당성이 밑바탕에 있으니까 정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거에요. 저희가 지하철 키세스* 작전 할 때도, 우리 계속 거기서 농사짓게 하자는 움직임이다. 직접 먹어봐라, 정말 맛있지 않느냐. 정정당당하니까 부끄럽지 않고, 쑥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소중한 기억이었어요.

미소 : 저는 평소에는 땅을 짚으면 항상 털어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디온이 거기 있음으로, 몸이 좀 안 좋아서 요양을 갔다가 땅을 밟게 됐는데, 이날 이때까지 처음으로 농사를 져보고 땅에서 헤엄치면서 기어댕기면서 농사를 졌는데 경험이 없다보니까 작물들이 죽기도 했었고. 거름을 너무 많이 해서 죽기도 하고 그랬어요. 하여튼 이런 저런 일도 많이 있었어요. 두물머리 땅이 얼마나 찰지고 좋은지 왜 이렇게 우리 밭은 농사가 잘 되는지. 내가 먹을라고 몇 포기 심자. 브로콜리 50포기를 심었는데. 갑자기 한꺼번에 커가지고 동시에 하루아침에 다 피어서 이걸 어떻게 하냐고 막 디온하고 나하고 엄청나게 놀랬거든요. 그런 재미있는 경험도하고 한 여름 땡볕에도 밭에서 흙 파고 누웠다 앉았다, 제 아픈 몸이 많이 좋아졌고. 이전에 농사도 안 지어봤지만 참 아름답고 멋있는 농사를 지고. 고추도 처음으로 졌지마는 3-40근은 말리지 않았나. (실익을 다 챙긴. 웃음. 박수. 우워-) 그래서 그걸 고추를 따서 마루에 갖다 널어놓고 쳐다보면서 너무 놀랐어요. 내가 했어도. 그 정도로 두물머리 땅은 찰지고 정말 아깝고 내가 떠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거기 가기는 2월달부터 내려갔는데 20년은 된 것같이 정이 들었고. 항상 지금도 아침이면 집안일을 해놓으면 두물머리를 가요. 혼자 가서 앉아서 커피물도 끓여가서 커피도 먹고. 그러면서 명박이 욕은 많이 했어요. 그렇게 좋은 땅을 버리게 하고 우리 농부들을 네 사람을 밖에 나가게 하고 마음 힘들게 하고. 그런 면에서 가슴도 많이 아팠고, 참 외치고 소리치고, 아무도 없을 때 미사터 가서 많이 소리쳤습니다. 정말로 지난 여름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참다운 농사를 배웠고. 내 생애 처음으로 수확도 많이 했고 거기서 수익금도 쪼금 있었고. 여러 농부들과 아우님들이 여름동안 지켜줘서 좋은 결과가 나왔고 많은 일을 하고 두물머리를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두물머리의 빈-땅/ 토지공개념 운동

농부들이 떠나갔다는 슬픈 현실이지만, 두물머리에 빈-땅들이 많아지면서 그 곳에 새롭게 농사로 연대하려는 이들이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빈-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빈-땅이기도 하고, 공공-땅, 공유지이기도 하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공유지의 맥락과는 다른 결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다. 당연히 관에서 마련해내는 공유지와는 다를 것이고, 주말농장으로 쳐도 아파트처럼 분할-분양하여 운영되는 형태와도 달랐었고. 이곳이 공유지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땅에 개입하여 우리의 활동으로 점차 공유지로 만들어갔던 것이 아닐까. 그저 주어짐으로써 약간은 거리감 있고 차가운 ‘공공’과는 다른 결로, ‘유기농지 보존’이라는 마음이 우리들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온도가 높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차가운 공유지보다는 뜨거운 도가니탕같은 느낌? 그 뜨겁고 공통된 마음을 매개로 참여하고 있는 개인-단체들이 영향을 주고 받고 변해가는 과정이 있었고 우리들의 삶에 큰 흔적을 남긴 것 같다.

한편으로 빈-땅/공유지의 중요성과 동시에 농사에 있어서 내-땅의 중요성도 얘기되었다. 꼭 ‘내-땅’이라고 보다는 아무튼 지속적인 농사가 보장되는 땅! 왜냐하면, 농사는 땅과의 호홉, 땅과의 주고받음이고. 그래서 농사를 짓더라도 여러해에 걸쳐 또 평생에 걸쳐 땅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농사와 공유지의 관계에서 딜레마가 아닐까. 아마 공유지-농사도 필요하고, 보장된땅-농사도 필요하고. 우리의 삶에는 모두 중요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런 농사 행위들은 두물머리 투쟁과 어떤 관계일까? 무엇보다 농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두물머리에 쉽게 방문할 수 있는 매개였고(가장 최초에는 농활의 형태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문제를 알아가고 또 널리 알리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동농사를 통해 온라인 판매를 하는 것도 그런 역할을 했었고. 그리고 또한 이 곳의 싸움의 목적이 결국 농사를 짓는 것이었기에, 두물머리에서 농사는 싸움의 목적이자 수단이었다. 우리는 매일매일 농사를 지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우리의 미래를 현재화하여 제시demonstration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농사 자체가 운동이었다.

임인환 농부: 지금 시대에는 공유지-토지공개념을 둘러싼 연구나 사회적인 운동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이 과제이다. 농지의 경우, 시골의 빈 땅들을 농부들이 매개하여 도시에서 농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연결시켜주고 옆에서 농사지도도 해주는 등의 매개-활동이 제안된 바 있다. 또 거기서 농사지으면서 장애인운동과 연대하고 먹거리 후원하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공적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고 했을 때, 지역이 변하고, 농사를 대하는 공무원들의 태도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응답 3개

  1. 스트라이크말하길

    감동이예요! 많이 배우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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