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두물머리 토크쇼#2 투쟁의 정서, 저항의 스타일

- 김모야

두물머리 투쟁의 정서, 저항의 스타일.

2012년 7월 18일, 대한문에서 두물머리 행정대집행 계획에 항의하는 유기농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유기농지의 아픔을 상징하는 밭전(田)자 모양의 다이인(die-in: 죽음ㆍ아픔등을 상징하며 상징물과 함께 죽은 듯이 누워있는 퍼포먼스)과 함께 시작된다. 이어서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만들어온 “공사 말고 농사” 노래에 맞추어 분필모내기(실제 모내기에 사용했던 못줄에 맞추어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모를 그려서 심어나가는 퍼포먼스)를 하고, 한 쪽에서는 그 노래에 몇몇 친구들이 만들어온 낫-호미-괭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촛불 대신 오이, 호박, 부들 등을 들고 있고(촛불을 받치는 종이컵이 싫기도 하고, 우리는 유기농지를 지키고자 유기농 집회를 하는 것이니까) 몇몇의 준비된 발언과 노래 그리고 즉석에서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어떤 친구는 오늘 국토부에 항의전화했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마침 한국에 있다가 참여하게된 호주의 한 농부는 농부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얘기한다. 내일모레 군대 간다는 어떤 친구들은 새누리당의 정치를 비판하는 꽁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순서는 오늘 집회의 선언문 낭독. 한 친구가 만들어온 선언문(두유작전 선언문: http://riverun.org/diary/890 )을 다른 두 친구가 읽기로 어느새 정해졌고, 갑작스레 어깨가 무거워진 두 친구는 한 쪽 구석에서 낭독 연습을 한다. 낭독의 순간, 미리 복사해오지도 못한 선언문을 듣기 위해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마음 속으로 함께 되내며 감동한다. (유기농집회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dh9eURG4UvY )
집회에 등장했던 여러 퍼포먼스나 발언과 행동 그리고 선언문 낭독 등은 회의를 통해 기획된 것이 아니라, 집회를 한다고 하니까 각자가 생각해내고 스스로 준비해왔던 것들이다. 또 어떤 이는 먹거리를, 어떤 이는 가면을, 어떤 이는 유인물을 준비해왔다. 그래서 사실 집회가 어떤 모습일지 전체를 그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기농 집회를 하자!”는 바탕 위에 각자 하고 싶은 것ㆍ할 수 있는 것을 그려넣어 그 우발적인 것들이 중첩되고 폭발했던 것이다.

유기농 집회에서 보여졌던 정서나 스타일은 두물머리 싸움의 과정에서 펼쳐졌던 여러 액션과 저항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점차 자리를 잡아갔던 두물머리 투쟁 스타일은 ‘신선하다’, ‘기발하다’, ‘재미있다’ 등의 평가(?)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두물머리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액션들을 기획하고 수행해낸 이들조차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잘 알지 못했고, 정신없이 사건이 지나가고 나서야 “좀 멋졌었네” 하고 되돌아볼 뿐이었다. 두물머리 두번째 토크쇼 <싸울戰: 투쟁의 정서, 저항의 스타일>은 그러한 저항의 스타일이 어떻게 가능했었는지 두물머리 사람들이 스스로를 탐구해보는 시간이었다.

삶, 두물머리 접속의 평면

탐구는 ‘각자가 어떤 계기로 두물머리에 접속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투쟁하러 가자고 그러면 못 왔죠”라고 얘기하는 로맨스조(공공예술가, 세계생태화장실협회 WETA)는 두물머리에서 에코토피아 생태캠프가 열린다기에 놀러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로맨스조: 모여서 저항하자! 이러면 부담감 때문에 가지 못했을텐데, 두물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은 그런 정치적인 싸움의 차원이라기보단 삶의 차원에서 프로젝트들이 만들어지고 발신되는 부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관심있었던 여러가지 생태적인 삶의 실험이 열린다기에 놀러갔다가, 자연스레 4대강과 두물머리 유기농지의 문제도 접하고 얘기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 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자기 이야기, 자기 삶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노래도 만들어진다. 만약에 ‘지금 여기 농부들이 싸우고 있는데, 가서 저항의 노래를 만들자!’ 이렇게 하면 사실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근데 노래를 만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얘기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노래가 터져나왔다.(그 때 만든 노래 <강물을 살린다더니>: https://www.youtube.com/watch?v=x9hKgPz3UA8 )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록빠 작목반>의 영훈은 친구따라 딱 한번만 올려고 했었는데, 그 한번의 만남을 계기로 그 때부터 지금까지 매주 두물머리를 오가고 있다. 그러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을 만났고, 함께 농사도 짓고 집회도 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행정대집행 기간 지하철을 달구었던 <두물머리 유기농 토마토 지하철 키세스>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활동들은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얼마나 생소했었는지를 느껴볼 수 있다.

영훈: 지하철 키세스 작전 한다고 했을 때, 설마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 아마 나는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날 밤 10시부터 광화문에 모여서 시작한다고 연락이 와서, 나는 사실 말리러 갔었다. 나는 그게 어떤 모습일지 잘 그려지지도 않았고 왠지모르게 부담스럽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물론, 말리지는 못했고 자연스럽게 동화되어서 나도 함께 했다. 첫 날에는 너무 뻘쭘해서 나는 카메라들고 사진과 영상기록 남기는 일을 담당했고, 두번째 날부터는 나도 신나게 참여했다. (두물머리 유기농 토마토 지하철 키세스: http://www.youtube.com/watch?v=wTdEbUb6BCk )

결국 누구도 투쟁을 만들기 위해서 왔던 것이 아니라, 다만 각자의 삶 자체가 조금씩 두물머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 삶들이 엮어져 노래가 터져나왔던 것처럼, 강변가요제ㆍ유기농 행진과 집회ㆍ유기농수레 1인시위ㆍ분필액션과 같은 반짝이는 생각과 행동들도 그 삶들이 엮이다보니 터져나왔다. 그래서 두물머리에 행정대집행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우리의 반응은 이랬다. “뭐, 행정대집행? 아니 우리는 여기 그냥 살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두물머리에서 함께 공유하고 있는데. 그게 뭐 억세다고 행정대집행을 해! 이건 내 삶에 행정대집행?이야!” 각자가 두물머리에 접속했던 평면에서 삶이라는 키워드를 찾아낸 탐구는 자연스레 그 삶들이 어떻게 엮이고 관계맺고 있었나로 이동하였다.

수용과 발굴의 관계 속에서 증폭되는 저항

두물머리 싸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엮이고 섞이면서 증폭되는 현상이 있었다. 80년대 학번으로 뜀박질 좀 했었을 농부들부터, 지역에서 오랬동안 활동해온 공대위와 팔당생협의 활동가들, 묵묵히 자기의 일을 수행하면서 큰 버팀목이 되었던 천주교 세력, 록빠ㆍ에코토피아ㆍ나눔문화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젋은 실험세력, 두물머리 유기농 대안을 만들어 제시했던 학자집단, 그 외에도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이 두물머리 싸움을 함께 만들어왔다. 좀처럼 한 곳에서 만나기 힘든 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되었을까? 누군가 배치와 조정을 잘 했던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조정의 역할은 으레 공대위와 농부들의 몫이겠지만, 오히려 최요왕 농부는 갈수록 맥을 잡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최요왕: 초반에는 누가 두물머리에 온다고 하면, 몇명이 오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파악해서 맞이하는 것이 큰 일이었어요. 손님맞이를 해야했던 것이죠. 근데 그런 것이 너무 많아지고, 또 농부들이 다섯밖에 남지 않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어려워졌죠.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사람들은 손님으로 오지 않았어요. 우리가 맞이할 필요도 없었고, 각자 알아서 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할 일들을 알아서 하고 가고. 아무튼 나중에는 거의 맥을 잡을 수 없었죠. 그러면서 누가 무엇을 하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죠.

두물머리에서 93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었던 생명평화미사를 가능케했던 <천주교 봉사대 마중물>의 미카엘라는 우선 사람들의 ‘권위없음’을 단초로 제시했다.

미카엘라: 두물머리 신부님들은 기존에 성당에서 만나왔던 신부님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어요. 편하게 농담도 할 수 있고, 권위가 없다고 해야되나. 원래 천주교가 그런게 굉장히 센 편인데. 그래서 굉장히 편하고, 신부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성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계속 함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두물머리에서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고. 그리고 그게 또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탐구는 ‘권위없음’이라는 상태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줄 아는 ‘수용의 능력’ 또 그에 기반한 ‘우정’으로 나아갔다.

봄날: 조정자의 역할이 있었다기보단, 농부들이나 공대위가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 누군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 판을 함께 깔아주는 수용력이 있었던 것 같다. 농부들 뿐만이 아니다. 대안연구단이 연구결과를 발표하면, 젊은 친구들이 다시 그것을 이용해 다른 꿍꿍이를 기획하고. 그런 식의 관계들이 있었다. 서로를 다 이해하고 조정하지는 않지만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읽어가면서 포지션을 만들어갔던 능력. 그러면서 조화와 증폭의 관계를 만들어갔다.

잇을: 단순히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봄날이 얘기했던 것처럼 수용력 혹은 우정의 관계가 중요했다. 누가 왔을 때 누군가 자기 몫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여지가 제공되는 관계를 갖고 있었고. 그런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공간이 우리를 수용해준 것처럼 우리도 그 공간으로 녹아들어갔었다. 그러면서 두물머리에 대한 애정, 서로에 대한 우정이 생겨났다. 그 우정과 애정을 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정말 많다. 배추가면 쓰고 인사동에서 노래하며 유인물 나누어주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챙피한 일인데, 그런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할 수 있게 하는 그런 힘이 생겨났던 것 같다. (배추가면 액션: http://vimeo.com/51520353 )

서로를 수용하던 관계와 능력은 발전하여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서로의 삶과 존재감들을 발굴해내기도 하였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두물머리 외부세력 어워드>라는 두물머리식의 연말시상식 기획이었다. 서로에게 상을 주며 노는 축제를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이 곳이 단순한 투쟁의 공간이었다면 ‘누가 무엇을 잘했나?’ 이런 식으로 상을 주기 쉽상이었겠지만, 두물머리는 함께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하면서 그네들이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얘기하고 그 이야기들을 모아서 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상들이 우렁각시상ㆍ외부발신상ㆍ영혼의 투신상ㆍ밥상ㆍ판타스틱 농부상ㆍ행동하는 지식인상 등 정말 이 곳에서만 존재하고 통할 수 있는 상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서로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또 서로를 비춰보는 방식과 시선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권위없음’의 수평적 관계는 두물머리 스타일의 기본 바탕이 되었지만, 탐구를 되돌아보니 ‘배려’라는 말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에 ‘수용’되고 ‘발굴’되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우정의 관계 속에서 증폭되는 발화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모두들 일상 속에서의 자신과 두물머리에서의 자신이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는 서로를 더 따뜻하고 깊이있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우정의 관계 속에서 실제 삶의 모습 또한 변이되기 때문이다.

두물머리 저항에는 삶이라는 바탕 위에 발화와 증폭을 가능케했던 관계들이 있었다. 삶에서 관계로 나아갔던 탐구는 다시 방향을 돌려 말랑말랑한 기획 속에 펼쳐진 각자의 사심(私心)으로 향했다.

기획답지 않은 기획과 펼쳐지는 사심(私心)

로맨스조: 두물머리 근처로 이주한 달군ㆍ승욱ㆍ디온이 현장과의 다리 또 제안자로서의 역할을 많이 했었다. 재밌는 것은 이 세명은 리드하는 것을 주저한다. 원래 운동판에서는 끌고 나가는 방식의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제안하는 것도 ‘어버버버버’하다. 이런 입장ㆍ태도 자체가 신선했다. 전체 맥락에서 틀거리는 만들어지지만 굉장히 말랑말랑한 제안이 발생한다. 그런 제안이 왔을 때 부담감이 확 줄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것들이 또 튀어나왔다. 컨트롤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액션이 펼쳐질 때도 전혀 컨트롤이 안 되지만 거기에서 폭발력이 더 나왔다. 틀거리가 말랑말랑하니까 내용이 채워질 때 확장되는 것도 엄청나다. 근데 당시에도 또 나중에 돌아봐도 파악은 잘 안되고. (웃음)

처음에 묘사한 유기농 집회가 그랬던 것처럼, 전체의 기획은 언제나 말랑말랑한 고무풍선같은 것이었다. 불면 불수록 풍선은 커져갔고, 사람들은 부담없이 그 안에 자신들의 내용을 채워 넣어갔다. 그런 식의 기획과 구성이 처음부터 잘 되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다양한 외부세력들이 처음으로 일을 저질렀던 2011년 가을의 강변가요제 때는 정말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엄청난 폭우도 한 몫 했었지만, 누군가 책임지고 상황을 진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를 조망되거나 그려진 것도 아니었고. 그 때만 해도 이런 방식이 과연 괜찮은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런 방식에 회의가 든다고 해서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컨트롤타워 혹은 톱니바퀴의 설계자로서의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었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아니었다. 그런 방식으로 여러번의 행사(?)가 진행되고 연습되면서,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고 오히려 컨트롤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2012년의 행정대집행을 전후한 기간은 아마 그런 스타일이 극대화되었던 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늘 행사진행의 뒷일과 음향 등을 담당했던 쏭은 “그 때는 정말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준비된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당연한 자신감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말랑말랑한 기획 속에 채워졌던 내용들은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삶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 우리가 사심(私心)이라고 말하는 욕망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달군: 저는 사심이 가득했다. 나의 하고싶은 것을 두물머리에서 다 펼칠 수 있었다. 원래 디자이너나 작가로서 정체성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디자인이 행동과 연결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이 때까지는 그런 기회가 없었었고, 두물머리에서 물을 만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수고했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하면서 되게 재미있었고. 분필액션같은 경우도 오래전부터 하고싶었던 것이었다. 학교다닐 때나 메이데이 때 가끔하기는 했었지만 그 때는 증폭되거나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그런 평소의 로망이나 재미있겠다 싶었던 것들을 마음이 맞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두물머리를 통해서, 음악회ㆍ행사ㆍ전시회ㆍ모금운동ㆍ풍물굿판ㆍ음반제작ㆍ토크쇼 등 각자가 그 동안 하고 싶은 것들이지만 돈도 없고 프로도 아니니까 잘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만들어나갔고, 그 느슨한 기획 속에서 또 누군가 하고 싶었던 이런 저런 소소한 것들을 마음껏 전개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평가 앞에 다음의 감응이 놓인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재미봤죠~”

보편적이지 않은 발화, 고래의 언어

탐구의 마지막은 우리가 사용했던 언어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글ㆍ그림ㆍ음악ㆍ영상과 같은 텍스트들이 누구를 향했던 것일까.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그것은 일반의 투쟁현장에서 발신되는 언어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또 모두를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편적인 언어도 아니었다. 2012년 봄 재판부에 제출했던 두물머리 탄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보내준 탄원서들에서 한 문장씩 뽑아 꼴라쥬로 만들어던 <우리 모두의 탄원서>는 “사랑하는 재판장님”이라고 시작한다. 그 때도 지금도 누가 사용했는지도 모르는 이 언어에는 두물머리만의 감각과 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우리 모두의 탄원서: http://riverun.org/diary/681)

봄날: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투쟁의 효율을 생각한다면 사실 보편적인 언어여야 되는데. 우리는 우리가 생겨먹은대로 언어가 튀어나왔다.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만 도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 저도 세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대사회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 진작에 포기한 사람이고. 고래가 지구 반대편 고래에서 메세지를 전달할수 있는게, 바닷속에 어떤 층이 있어서 그 층을 이용해 고래만의 음파 전달한다고 한다. 우리의 언어도 우리와 닮은 사람들에게만 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끌어들이고.

되돌아보면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삶이었고, 우리의 저항도 삶 그 자체의 전개를 통해 이루어졌기에, 우리의 언어가 보편적이지 않고 우리의 삶을 닮아있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다. 이번 탐구를 통해서 우리는 삶, 수용력, 사심(私心)과 같은 키워드를 발굴해내었고, 두물머리 저항의 스타일이 가능했던 조건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삶으로 두물머리에 왔고, 이 곳에서 삶들은 우정의 관계를 맺었으며, 그 바탕에서 각자의 사심과 욕망은 폭발되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은 최초의 접속평면이자 발화점인 삶과 결코 다른 것, 다른 모습일 수 없었다. 그리고 되돌아보는 것을 통해 또 관계를 지속하고 새로운 꿍꿍이들을 모색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두물머리에서 만들었던 연결과 발화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응답 1개

  1. 개님말하길

    넘 재밌다..ㅎㅎ 배추가면 액션 좀 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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