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좀 사그라들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춘에 대한 이야기로 서점가에 광풍이 불고 모든 사람이 갑작스럽게 청춘을 논했었습니다.
그 ‘청춘’ 범주 안에 드는 사람이었던 저는, 당시의 분위기가 불편했습니다. 힘내라고 하거나, 이겨내라고 하거나, 괜찮다고 하거나 네 탓이라고 하거나 사회 탓이라고 하거나 뭐라 하건 간에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그 작업의 필요성과는 관계없는 불편함이었습니다.
왜 청춘들의 삶이 청춘이 아닌 그 누군가의 시선 혹은 그 권위에 힘입어서 들을만한 가치가 된 이야기가 된 걸까요. 심지어 대학생들조차 자신들의 삶을, 새삼스럽게 책을 통해 갑자기 자각하고 감동(?)하는 묘한 현상을 보면서 미묘하게 씁쓰름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퇴색되고 가라앉아있던 청년들의 삶이, 왜 갑자기 빛을 찾아 청춘이 되었던 건지에 대해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그 과정은 그 목적이나 끝과 상관없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탈시설장애인 스토리텔링 코너가 새롭게 시작된 지 5주가 지났습니다. 저는 이 코너를 통해 불편함이나 미묘함 없이 100%의 무언가로 다가오는 이야기와 만났습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이야기가 표면에 나와 지극히 사적임과 동시에 지극히 공적인 것이 되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의 매끈함이나 간파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진정성이 가지는 설득력을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