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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 괴테의 근대적 여성관보다 못한 ‘여성혐오’라니!

- 황진미

<파우스트>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후계자로 추앙받는 소쿠로프 감독의 최근작이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답게, 과연 영화는 시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연상되는 시작장면부터 당시를 완벽하게 재현한 세트와 독일 낭만주의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연상되는 신비한 조명까지. 특히 파우스트가 마가레테를 안고 물로 뛰어드는 몽환적 장면과 연금술로 빚은 인조인간 호문클로스를 형상화한 장면은 경탄을 자아낸다.

<파우스트>는 소쿠로프 감독의 ‘권력에 대한 4부작’의 완결편이다. 전작인 <몰로흐>, <타우르스>, <더선>이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 등 20세기 권력자들의 쓸쓸한 말로를 담았던 것과 달리, 파우스트가 주인공인 이유가 뭘까. 그건 파우스트가 근대정신의 원형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파우스트>라면 ‘학자가 우주의 원리를 알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설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는 16세기 독일민담의 내용으로, 악마와 계약한 자는 파멸한다는 중세적 교훈을 담고 있다. 반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신의 권능을 믿지 않는 합리적 개인이 세계의 본질과 이상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모험담이다. 그는 사랑도 하고, 대규모 개간사업도 벌인다. 그의 사랑과 ‘삽질’은 타자를 죽게 하지만, 그는 구원받는다. “항상 노력하며 애쓰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근대정신의 정수를 보여줌과 동시에 한계도 보여준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삽질’을 벌이는 파우스트로 인해 무고한 노부부가 죽고, 그의 ‘삽질’이 결국 그의 무덤을 파는 짓이 될 거라는 악마의 말은 근대정신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 도달할 파국을 예견한다. 또한 끊임없이 나아가는 남성주체와 그와의 사랑으로 삶이 파괴되면서도 그를 대속하여 구원하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보여준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절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이다.

영화<파우스트>는 괴테의 원작을 일부 편취하여 변형한 것으로 원작과는 다르다. 가난한 학자인 파우스트는 돈을 구하러 악마로 불리는 전당포주인 뮐러를 찾아간다. 그와 동네를 배회하던 파우스트는 빨래터에서 마가레테를 보고 반한다. 술집에서 시비 끝에 마가레테의 오빠를 죽인 파우스트는 장례식에서 만난 마가레테에게 말을 건넨다. 오빠를 죽인 자가 파우스트임을 마가레테도 알게 되자, 파우스트는 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뮐러에게 영혼을 판다. 그녀와 동침한 파우스트를 데리고 뮐러는 저승으로 향하지만,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파우스트는 뮐러를 돌로 쳐 죽인다. 이는 파우스트의 또 다른 자아이자 회의하는 정신을 아예 죽여 없앰으로써, 20세기의 광포한 ‘삽질’을 예비하는 불길한 전조로 읽힌다.

영화가 각색을 거치면서 가장 괴상해진 대목은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파우스트는 앎의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욕정 때문에 영혼을 판다. 원작의 마가레테는 스스로 고통을 받아들여 구원의 경지에 오르지만, 영화 속 그녀는 오직 관음의 대상이다. 원작과 달리 파우스트가 마법으로 젊어지지도 않았고, 자기 오빠를 죽인 자라는 것도 아는 마가레테가 왜 파우스트의 애무를 살포시 받아들일까. 영화는 그녀의 욕망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직 그녀의 몸을 관음증적 시선으로 훑는다. 그 시선 속에서 비루한 남성지식인이 젊은 여체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하는 욕망은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마가레테의 엄마를 탐욕적으로 그리며, 모녀관계를 파탄으로 그린다. 딸과 아들의 엄마에 대한 증오가 여러 번 강조된다. 또한 원작에는 없는 미친 귀족부인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화려한 치장은 생뚱맞고 언행은 몽매하다. 젊은 여체를 탐닉하는 시선과 중년여성을 끔찍하게 그리는 시선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괴테가 ‘구원의 여인’이라는 근대적 여성관의 한계를 노정했다면, 소쿠로프는 현대적 여성관의 퇴행인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거장의 유미주의에 경탄하다 씁쓸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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