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산촌(山村) 노초부(老樵夫)의 선거 유감(選擧有感).

- 김융희

제왕을 뽑는 선거전이 전국에서 한창 치열하다. 방송 유세, 토론, 또는 선거에 대한 분석, 평가, 보도,등…이 불쑥 불쑥 나타난다. 요즘 때가 때인 만큼, 모두가 모이고 만나면 선거와 정치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며, 메스컴도 수시로 선거 관계 보도가 계속되고 있다.
계속 침묵의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려 받아보면, 여론 조사를 위한….이라는 생소한 목소리도 자주 경험한다. 기대했던 전화 내용의 엉뚱한 목소리에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후보들의 두 번째 토론 시간이다.(한 차례 더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첫 번째는 모른 채 지냈다. 교육감 후보들 토론 중계는 그냥 끄고 말았다.
관심이 별로여서 외면하기 십상이요, 부러 피하기도 한다. 나에겐 이같은 일들이 고역이라면 고역이며, 그저 성가신일 일 뿐이다. 요즘은 나들이도 별로여서 만난 사람들도 많지 않다. 내가 사는 산골엔 신문도 없다. 별로 관심 없는 선거에 대한 귀찮고 짜증스런 일들이다.

물론 선거에 대한 냉담이 무슨 대수인양 내세워 자랑 할 일은 결코 아닌 줄 안다.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는 오히려 국가와 사회에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더구나 나에겐 어떤 이념의 확고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방향으로 노력했지만 뜻데로 잘 안되었을 뿐이다. 이같은 나의 부정적 생각의 빌미란 아주 구차하고 사소하다.
“민주주의와 대통령”에 대한 나의 현실적 실망으로 인한 심경 변화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제도요,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하여 나라 살림을 맡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란 것이 나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대통령관이며 국가관이다. 내가 어렸을 적 국민(초등)학생 때에 교과서 ‘사회생활’에서 처음 배웠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815 광복과 함께 정부가 수립되면서, 나의 민주주의 교육도 시작되었다. 민주주의 제도와 국가의 근간은 헌법이며, 교육은 바른 인간 생활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동안 헌법의 제도와 이념은 변함없이 지켜져 오고 있는데 교과서에서 배워 줄곧 익혀왔던 것처럼 이념을 지켜 제도가 올바로 시행되고 있는 현실을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와 헌법 정신은 불명예의 상처 투성이로 계속 이어져왔다. 국가나 민주주의 이념은 줄곧 시종 일관해오고 있음에도, 국민은 주인이 아닌 권력의 희생의 대상이요, 대통령은 제왕의 통치자로 군림해 국민의 뜻을 저버린 채, 독제로 일관했다.

그러나 오랜 권좌에의 집착, 유신 지배, 군부 통치의 독제와 비민주는 드디어 국민의 혹독한 저항과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옳치 않는 통치가 무너지고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드디어 국민의 정부가 탄생했다. 오랜 기득권의 아성을 깨고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그 의미는 매우 컸다. 우리도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민주 정치와 국민이 주인으로 주권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국민들의 가능성과 비젼만 확인되었을 뿐, 기대했던 만큼 바뀐 새 정권의 행태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확신은 결국 참여정부를 탄생시켰다.

나는 참여 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을 참 민주의 대통령으로 믿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데로의 내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대통령은, 참여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이란 믿음 때문이다. 그 확신은 나의 신념이다. 그의 대통령으로써 평가는 매우 다양했다. 나는 참여 정부가 정치를 잘해서 성공한 정권이었는지, 아니면 실패한 정권이었는지를 잘 모른다. 긍정 보다는 부정적 평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의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나는 단순히 “인간 노무현” 또는 “대통령 노무현”을 선택한 것이 아닌, 내가 배워 믿고 있는 “교과서의 대통령”을 “대통령 노무현”에게서 처음 확인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너무 겸손했다. 겸손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처럼 우쭐데고 뽑낼 수 있는 환경이나 학벌, 인맥이나 금력도, 정치인으로의 절대적 힘인 정당의 든든한 지지, 그 무엇 하나도 그에게는 내세울게 없었다. 오직 이해하며 믿고 따라준 민의가 대통령의 힘이었으며, 그는 민심의 힘에 의지했던 것이다. 군림하기 보다는 언제나 낮은 자세로 국민의 편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특권에 굴하지 않으며, 그리고 비리에 맞서 정직과 당당함으로 반칙에 항거하는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했다. 민주주의 이념을 지키는 겸손을 놓지 않았다.

대통령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기득권층에도 이해와 설득으로 정성을 쏟았으며, 젊은 검사들과의 토론장에선 수모에 가까운 언사에도 가볍게 ‘막 가자는 것’이냐며 평상심을 지킨 인내심, 형님의 비리를 빌미로 맹공인 기득권의 행태 앞에서 ‘제발 소용없는 청탁을 안했으면 한다’는 인간적 호소의 대통령 모습이 마치 소박하고 진솔한 시골 면장 같았다. 그는 해야할 옳은 일이라면 원칙을 앞세워 우직하게 밀어붙이며 정의를 지켰다. 초유의 ‘대통령 불신임’앞에서도 담담하게 국민의 뜻을 기다리는 냉정과, 비록 유리하더라도 떳떳치 않음이 정도가 될 수 없다며, 지역 분리를 막고 동서 통합을 위해 당당하게 종로를 양보하고 불리한 선거의 고배를 감수했던 그의 깊은 배려심과 정의감…..

대통령인 그에게 기득권자들의 도전은 너무 버거운 상대로, 재임중 내내 외롭고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그에게 국민들은 막중한 임무를 맞기면서 끝까지 힘이 되어 지켜주지를 않았다. 퇴임이 임박해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살겠다며 마련한 소박한 집을 별궁이라며 온갖 억설과 비난으로 방해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4대강 사업에 국민들의 그토록 거센 반대에도 기득권 떼거리들의 비호 속에 아랑곳 없이 밀어 붙이며, 취임초부터 사저를 짖기 위해 불법도 불사한 힘있는 현 대통령을 우리는 지켜봤다.
실수와 오류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민의의 대통령은 매사에 시비요, 켜켜이 험담과 모함에 방해와 도발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망신창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의 편에서 힘없는 약자들을 보듬어 안으며 보호에 정성을 쏟았던 대통령이었다. 농사꾼이 되어 고향에서 농사를 짖고 있는 그에게 퇴임후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그저 바라보았고, 결국 그는 말없이 우리 곁을 스스로 영영 떠났다.

열띤 선거전을 보면서 굽이쳐 떠오른 생각들이다. 참으로 가엷고 분하다. 외딴 산촌에 무지한 촌노가 무얼 안다고 감히 이런 넉두리를 늘어놓아도 되는지 몰겠다. 그러나 무지한 초부만이 할 수 있는 넉살짖에 죄송스런 마음이지만, 어쩌랴 제 마음의 행로인 것을!
별 볼 일 없이 초라하고 외로운 때면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문득 문득 동병상린의 정을 느낀다. 선거전이 치열하다. 저 많은 화려한 공약들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며,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매사 형통의 미사려구들, 선거 때면 반드시 나타나는 요술의 도깨비 방망이는 여전이다. 춥고 배곺은 촌노에게는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처럼 고마움이 또 있겠는가? 그런데 모두가 배풀고 만들어 주겠다는 혜택들이다. 신용 불량자로 가족과도 떨어져 산중에 외롭게 살면서 나무주워 아궁이에 불지펴 영하 20도의 혹한을 견뎌야 하는 노초부는 진심으로 빌고 또 빈다. 제발 말처럼 이루어졌음 좋겠다.
그러나 어쩜 우리 서민들에게 춥고 배곺은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무시이며 거짓말일 것이다. 제발 좀 작은 자존심도 건드리지 말며, 그리고 정직하라고 부탁드린다.
(미리 쓴 원고를 투표가 끝나면서 이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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