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길 잃은 자리에서 뒤 돌아보기

- 남창훈(면역학자)

눈 내린
겨울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사방이 다 길인 것도 같고
사방이 다 길이 아닌 것도 같다.

인가를 찾아
내려온 길목마다
높이 쳐진
울타리.

잠시 지쳐
뒤를 본다.

하얀 눈
그 위로 나 있는
검은 발자국.

내가 걸어 온 흔적마다
햇살
눈부시게 담겨 있다.

반짝이는 생명
와락 내게 안긴다.

울타리 너머
아이 하나
웃고 있다.

일 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거친 바람처럼 밀려와 내 안의 많은 것들을 부숴 버렸다. 마음을 자꾸 부리지 않고 가만히 가라 앉혀 보고자 애를 써 보았지만 가라앉기 보단 무너져 내렸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만치 마음이 상해 버렸다. 그러나 생명은 물처럼 흘러 내려간다. 사랑하는 딸 아이를 바라보며 기운을 낸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잊어버린 게 있다. 바로 나의 생명 나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흔적이다. 지나온 날들의 흔적. 어떤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나의 행위, 생각, 관계, 작고 큰 모든 내 과거의 행적이 고스란히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나와 내 주위의 친구들과 이웃들과 주위의 생물들과 온갖 무생물들이 협력하여 이뤄 놓은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같은 생각을 이어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을 이루고 있던 것들의 몇 할이 나로부터 인한 것일까?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일 것이다. 나는 그 몇 할을 통해 아버님을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받아 들여왔던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간에 우리 모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주위 사람들과 혹은 주위 사물들과 나누며 살고 있다. 내가 나를 뒤 돌아 본다는 것은 이처럼 온갖 군데 산재해 있는 나의 모습을 차분히 들여다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내 안에 담긴 다른 존재들의 흔적을 차분히 살펴보고 어루만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의 미덕은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뒤돌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잊고 지내온 나 자신을 어루만져 주고 감싸 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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