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하늘은 파랑

- 지오

눈이 내렸다. 영원히 놀 것처럼 시끄럽던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텅 빈 운동장에 눈이 쌓이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밤새 두텁게 쌓인 눈에 소리마저 덮여버린 듯 학교는 고요했다. 파랑은 건물로 들어가는 하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보는 유리 너머 세상은 백색이었다. 마치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보는 듯이 백색의 세상은 현실감이 없었다. 소실점 저 끝으로 하늘은 흡수되어 갔다. 스피커에서는 GOD의 ‘거짓말’이 흘러 나왔다. ‘싫어, 싫어’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파랑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며 5년 전 이곳을 뛰어다녔을 하늘을 상상했다. 교복을 입은 하늘도 아랫입술을 곧잘 내밀곤 했을까. 파랑은 하늘과 함께 생활했던 익명의 여고생들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려다 하늘이 잔소리를 할 것 같아 도로 집어넣었다. 운동장에는 소녀들이 남긴 발자국이 도미노 트랙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었다. 파랑은 건물 뒤로 돌아갔다. 첫 번째 건물과 두 번째 건물을 잇는 통로 양 옆으로 소복하게 쌓인 눈이 누구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깨끗하게 덮여 있었다. 파랑은 조심조심 두 발을 바닥에 끌어 눈을 쓸 듯 그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파랑을 서운해 하던 하늘에게 뜬금없이 기쁨을 주고 싶었다. 어쩌면 하늘의 5년 전 얼굴이 궁금했던 탓일지도 몰랐다. 학교에 왔으니까 조금은 유치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철 늦은 장난질에 속도를 붙였다. 운동화의 밑창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면 발끝이 시려 올 터였다. 아무렴 어떨까. 파랑은 하늘의 소녀 같은 표정을 떠올렸다. 살포시 마음이 달떴다.
“꺄~”
‘랑’자를 끝내고 ‘해’자를 막 시작할 때였다. 머리 위에서 탄성이 터지면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멋져요!”
“꺄~아, 뭐야 어떡해”
“너무 멋져. 누구야 누구? 몇 반요?”

올려다보니 3층에서 몇몇 소녀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고 있었다. 환호는 점점 더 커졌다. 파랑을 자신들 중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사내아이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자기네들끼리 탄성을 질렀다가 이름을 불렀다가 어느새 입을 모아 파랑을 향해 합창하듯 소리 지르기를 반복했다. 파랑의 발길이 빨라졌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내려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아이들이 내려와 에이 뭐야 당신은 여자잖아, 하며 실망하고 의아해하다 종국에는 욕지기라도 던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예쁘게 맞춰 쓰려 했는데 급한 마음에 ‘ㅐ’자가 자꾸만 삐뚤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니들 아니니까 신경 꺼,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눈을 쓸어내는 발길만 빨라질 뿐이었다. 위에서는 계속해서 소녀들이 꺅꺅대며 환호를 보냈다. 그 소리가 파랑에게는 먹이를 찾는 까마귀 떼의 울음처럼 불길하게만 들렸다. 파랑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지막 받침에 꼬랑지마냥 하이픈이 그어진 것을 보았으면서도 뒤도 돌지 않고 달렸다. 속이 상해서 코가 시큰거렸다. 뛰어가는 파랑의 뒤통수에 대고 소녀들이 외쳤다.
“에이~ 부끄러워하지 마요”

차를 세워둔 운동장 쪽은 여전히 고요했다. 방학 중이라 학생들이 많지 않은 탓일 터였다. 멀리 종소리가 들렸다. 파랑은 비로소 안도했다. 뒤통수에 박히던 소녀들의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차 안은 히터를 틀어놓고 간 탓에 훈기가 그득했다. GOD의 3집 시디도 몇 트랙을 돌아 거의 종반에 가 있었다.
‘파란하늘 하늘색 풍선은 우리 맘속에 영원할꺼야’
소녀들의 외침과 다섯 남자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파랑은 ‘하늘색 풍선’을 들으며 신발의 앞코를 덮은 눈이 녹아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 많이 기다렸지?
하늘이 운전석의 문을 열며 말했다. 파랑은 소녀들에게서 도망쳤던 스스로가 창피해서 하늘을 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소녀들의 탄성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당하게 사랑하자던 하늘이었다. 그 앞에 파랑은 자꾸만 작아졌다. 하늘이 표정을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 화났어? 미안해. 글쎄 담임이 아직 날 기억하는 거 있지. 자꾸만 말을 시켜갖고. 후딱 서류만 떼서 나올랬는데..
미안해하는 하늘 때문에 파랑은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려 애를 썼다.
– 그게 아니고. 나, 저기다 글 썼어. 사랑한다고.
하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웃을 듯 말 듯 잠깐의 정적이 감돌았다. 파랑이 망설이며 다음 말을 꺼내려 할 때 하늘이 먼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 박자 늦은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정말 고마워, 완전 감동이야, 세상에 알리고 싶어와 같은 말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파랑은 보지도 않은 채였다. 민망해서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떨렸다. 평소답지 않게 말과 말 사이에 틈이 없었다. 하늘은 이제 파랑이 얼마나 좋은 애인인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하늘을 파랑은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세상이 다 알면 좋겠어’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파랑이 소녀들에게서 도망쳤듯 하늘도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정문 쪽으로 천천히 회전하던 차가 멈춰 섰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도 사랑해, 하고 말하던 하늘이 파랑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고선 손을 뻗어 파랑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 내 맘 알지?

하늘이 느리게 웃었다. 양 볼에 옅은 보조개가 퍼졌다. 입가에서부터 볼까지 짙은 선을 만들며 퍼져가는 보조개는 호숫가의 물결처럼 잔잔했다. 파랑이 가장 사랑하는 하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파랑은 그 잔잔함이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마치 호숫가에 물수제비를 뜨는 듯한 기분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잔잔함 속에 돌멩이를 던져 한바탕 길을 내고 나면 알 수없는 허기가 밀려왔었다. 그 허기의 정체를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돌멩이는 호수의 깊이를 알려주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잔잔해지는 물결은 바람의 방향만을 일러줄 뿐이다. 잠시 잠깐 일었던 파문은 비밀스럽게 가라앉는다. 파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게서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파랑은 그게 외려 더 슬펐다. 둘은 지금 돌멩이가 가라앉는 것을 함께 지켜보면서도 모른 척 하는 중이었다. 서로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암묵적인 인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제 함께하는 내내 사랑한다는 말은 스스로 그 비밀을 의심하게 될 터였다. 파랑은 곧 자신이 지독히 외로워지리라 예감했다.

학교 바깥의 백색은 그새 흐려져 있었다. 세상이 제 색을 찾기 시작한 쪽으로 네 바퀴가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