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모임의 이색 경험과, 손녀의 갸륵한 효성 이야기.

- 김융희

일 년이면 몇 차례씩 만나서 먹고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는 모임을 다녀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평생의 직업과 직장을 벗어나 새 삶의 백수 건달들 모임은 진탕 먹고 마시며 우리를 위한 우리만의 즐거운 시간이다. 그런데 오늘의 모임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늘 진지하여 옹골찬 삶을 살아온 한 친구의 제언이였다.
“지금까지 우리 모임은 먹고 마시며 우리를 위한 우리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왔다. 살만큼 살아온 노년의 우리들이 한 해를 또 그냥 이렇게 보낸다는 것이 너무 아쉽지 않는가. 이 해를 보내면서 오늘만은 좀 변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즐김보다는 남을 위해 오늘의 먹거리를 돌릴 수 없을까?”
갑작스런 제안에 어리둥절했던 일행들이 진지해지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그러나 제언자의 뜻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평정심을 되찾았고, 그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왔고, 그리고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우리는 오늘 차 한 잔으로 모임을 마친다. 각자의 뜻에 따라 자기의 능력껏 오늘의 경비를 결정해 출자한다. 출자된 돈은 그 일에 정통한 친구에게 일임하여 꼭 필요한 곳에 쓰도록 전달하게 하며, 내용은 다음 모임에서 듣기로 한다.”
우리는 의사 결정 즉시 모금으로 실행을 했다. 개별 출자액은 불문이며 총액만을 밝혔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결코 실망스럽지 않는 액수였다. 차 한 잔으로 우리는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모두가 오늘 일을 불만이 아닌, 오히려 만족스러워하며 해여지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왔다.
내 마음도 오늘의 뿌듯함으로 줄곧 함께했다. 그동안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며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특별하게 “이것이다”란 떠오른 일은 없고,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며 안이한 삶이였다는 생각도 했다. 별다른 일은 아니었지만, 나도 남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보람과,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이웃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나를 기쁘게 했다.

산촌 설경 (우백당)

산촌 설경 (우백당)

눈이 내리는 지난 세밑이었다. 나는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위인선열들 묘소가 있는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 옆길을 찾았다. 꼭 찾아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하우스 못 미처 국립공원 관리소가 있고, 둘레길이 시작되는 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난 개울을 지나면서 첫 가건물의 허름한 집이 있으며, 100여m를 더 들어가면 묘소가 있다”는 아내의 자세한 설명과 알려준 전화번호를 갖고,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님의 묘소 곁에 살고 계신 후속의 집 방문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카데미 하우스는 옛날에 자주 들렸던 곳이라 입구까지는 금방 왔다. 그러나 동네는 벌써 많이 변해 주변이 음식점과 카페가 늘어서 있었으며, 길은 계속 내리는 눈이 쌓이고, 인적도 한적해 미끄러운 길에 허우적데며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시영 지묘

이시영 지묘

입구에는 ‘이시영 묘소’의 표시가 있고, 개울도 나타났고 허름한 집도 대 여섯 채가 있었다. 그런데 집은 허름해도 모두 큼직한 음식점 간판들이 걸려 있어 내가 찾는 집이 아니었다. 분명히 ‘음식점이 아닌 아주 초라한 집’이란 아내의 당부를 기억하며 찾으려니 더욱 그같은 집이 보이질 않았다. 먼저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바로 곁에 있는 ‘독립군 선열지묘’를 둘러보고서 내려오며 다시 집을 찾았다.
가르쳐준 설명으론 안되겠다 싶어 가까운 집에 들려서 물었다. 이곳에 “이시영님의 자부되시는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집”을 혹 아십니까? 네, “그 100세가 넘는 할머니집”은 저 아래 첫 번째 집입니다.(저 아래라야 20m도 체 안된 거리이다.)
그런데 첫 집은 허름하지 않는 음식점이었다. 허탈해 주위를 둘러보니 개울 저편에 음식점인듯 아닌듯해 보이는 좀 허름한 집이 있었다. 그런데 전엔 음식점으로 오래전 문을 닫았는지 인기척이 전혀 없다. 다시 돌아나와 이번엔 첫 음식점을 들려 물었다. 주인 왈, “네, 우리 집이 아닙니다. 우리집 곁을 돌아서면 붙어있는 문이 그 집의 출입문 입니다.”
그랬다. 낡은 철문을 들어서면서도 전혀 독립 가옥으로 믿기지를 않았다. 너무 작고 구분이 분명치 않아 음식점에 딸린 집으로 알았던 것이다.

실내는 조그만 연탄 난로가 놓여있는 부엌을 함께 쓰는 거실이며, 미닫이를 밀치면 할머니와 손녀가 거처하는 안방이다. 방안에는 할머니께서 자리에 누워 계셨고, 그 곁에는 손녀가 앉아 있었다. 올해 춘추가 103세의 할머니께서는 몇 년 전부터 많이 불편해 거동을 못하시며, 손녀가 수발을 들고 있었다. 손녀는 환갑을 진즉 넘겼으며, 하반신을 못쓴 불구이셨다. 그런데도 돌보는 어머니의 시중은 건강한 사람이 엄두도 못낼 그야말로 지극 정성의 갸륵한 효성이었다. 보훈의 혜택으로 요양 병원에 입원이 가능하지만, 손녀가 한사코 말려 이처럼 집에서 스스로 보살피며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할 기회를 갖고 싶은데, 할머니가 병원에 계시면 보살필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기에 병원보다 더 편하게 모시는 일이 자기의 소원이라며 간호에 온 정성을 쏟는다고 했다. 시치미를 떼어 “내리 사랑이라는데 할머니의 사랑을 그렇게도 부담스럽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정색을 하며 “할머니께 내가 너무 고생을 시켜드렸으며, 할머니의 자기에 대한 사랑이 유별했다며, 이같은 배려와 보살핌으로는 어림없다”며 “오래 사셔야 할텐데…”하시며 긴 한숨을 지으신다.

이시영 후손 집

이시영 후손 집

오래 전부터 지켜보며 알고 지내는 아내는, 어려울 때마다 그를 떠올리면서 힘을 얻고, 자식들에게도 늘 ‘그 손녀를 내세워’ 삶의 모범 사례로 들려주곤 했다. 이런 아내를 지켜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한동안 들리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아내를 보면서, 이번에 내가 다녀오겠노라 자원을 했다.

처음 찾는 내게 손녀는 고운 동안의 맑은 얼굴이 교양과 함께 고고(孤高)의 기품까지 보이며, 환히 밝고 맑은 심성에 착한 성품도 느껴졌다. 세정에도 매우 해박해 보였다. 벽엔 케톨릭 분위기의 성화와 성서 구절이 적당히 붙어있다.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을 함께 지내도 조금치도 지루함을 모르게 편할 것 같은 말솜씨로, 신체적 장애에도 의욕이 넘쳤다.
내가 농사꾼이라고 했더니, 자연 그데로의 작물을 가꿔 가까운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으면 그것이 진짜 웰빙일 텐데… 아직도 소녀같은 마음에 몸이 자유러워 마음껏 뛰놀고 싶다는 말은, 나의 가슴을 찡하게했다.

아내는 독립운동의 후속인 할머니를 수양 어머니로 모셨다. 그 양어머니께서 할머니와 가까운 사이로, 생존시 늘 양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던 것이 인연이었다. 그토록 아내가 못잊어 하는 마음을 이젠 알겠다. 이제 양어머니는 고인이 되셨고, 건강했던 할머니께서도 거동을 못하고 누워계신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데면서 아시겠느냐고 할머니께 여쭸더니” 말없이 눈을 감아버리신다. 지난 세월의 많은 회한에 그렇게 말문이 닫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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