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소개할 내러티브 프로젝트는 <내 안의 역사, 탈시설 장애인의 스토리텔링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2012년에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작지만 거대했던 프로젝트였다. 참가한 장애인은 8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을 보조해주는 ‘활동보조인’(중증장애인의 생활을 보조하는 사람으로 마치 중병을 앓는 사람을 간호하는 간병인 같은 사람)과 프로젝트 진행을 돕기 위한 자원활동가가 참여했다. 그리고 전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발바닥행동 활동가 2명, 교류분석전문가, 사진작가, 임상역사가가 스태프를 구성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음악밴드(어쩌다 마주친 밴드, 꼬꼬뮨 밴드, 가수 이지상)이 참여했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작은 카페의 후원도 있었다. 4개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시점에 합류해 뭔가를 했던 것이다.
그럼, 내 안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사진글 역사작업>을 말해본다.
우리는 1주일에 한 번 모였는데, 모일 때마다 두 명이 발표했다. ① 연대기를 말하며 주름진 생애를 펼쳤다. 태어나 첫 숨을 쉬는 순간부터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 삶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진솔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열살 때 어느 곳에서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한다. 비장애인 임상역사 워크숍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연대기 사건에는 입신양명의 세월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의 세월이 침묵을 깨고 등장한다. 그 때 그 시절 침묵했던 사건은 사회에 나가 출세한 사건에 비하면 사소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무들은 침묵의 세월을 말하려 했다. 그것은 아마도 출세가 우리가 진정 가치를 두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 묵직한 다른 것이 있다.
②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강원도 옥계 바다로 갔다. 누군가는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누군가는 장애인 리프트 차량을 타고, 누군가는 자가용을 이용해서 서울과 옥계를 오갔다. 누구나 마음을 먹으면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하지만, 장애인은 그렇지 않다. 장애인의 삶에서 여행은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밖으로 외출하는 것조차 간단한 일이 아닌데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은 치밀한 준비가 요구되는 프로젝트이다. 거리에는 카페가 즐비하다. 그러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어느 곳이든 턱이 있지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턱을 없앤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가 떠난 여행은 놀러간 것도 바람을 쏘기 위해 간 것도 아니었다. 내 안의 역사로 향하는 탐사여행이었다.
③ 관계와 매력의 역사를 말했다. 2박 3일 동해바다에 머물면서 심리분석(교류분석)을 받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탈시설 후 지역에 사는 장애인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사람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방식에는 일정한 역사가 있다. 교류분석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스며 있는 관계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교류분석 시간은 내가 왜 하필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어가는지 그 구체적인 형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기에는 사회권력이 작동한다. 한편,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는 우리에게 가해진 외부의 권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매력을 말했다. 매력은 내 안에서 나를 지탱하고 살아오게 한 힘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지는가 하는 것이 매력의 역사이다. 우리는 내가 나의 매력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동무가 나의 매력을 말해주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입에 발린 소리도, 장점을 말하는 것도, 격려와 칭찬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었다. 매력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콤플렉스와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이만의 독특한 삶의 스타일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동무의 매력을 말하고 동무가 나의 매력을 말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내 안에 쟁여진 자기 매력을 펼쳐볼 수 있었다.
④ 심장에 남은 사람을 말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해도 기억에 없는 이가 있고 잠시 만나도 심장에 박힌 사람이 있다. 아련한 추억이 있는 연인일 수도 있고, 시설에서 만난 언니나 친구, 어렸을 때 엄마 대신 나를 돌봐준 이모, 누나, 고모일 수도 있다. 영화 <은교>에서는 17살 누이가 심장에 남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작업을 하다보면 부모가 인생에서 결정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 외에도 심층부에 깊이 박힌 사람이 있고, 이들도 내 인격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심장의 심층부로 내려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깊이 박혀버린 사람을 만났다. 심장에 남은 사람을 얘기 하다보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심장에 남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스친다. 내 심장에 남은 사람은 아마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심장에 품고 있을 것이다. 심장을 통해 전해지는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다.
⑤ 플롯이 있는 내러티브(다시쓰는 시설역사)를 말했다, 메므와 작업의 목적은 삶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려면 일정한 플롯이 있어야 한다. 영웅플롯이든 정의의 플롯이든 플롯이 있어야 일관되고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플롯이 있는 내러티브는 메므와 작업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 전까지 이리저리 말해진 것들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래란 말이 있다.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했다면 메므와 작업이 마무리되기 전에 구슬을 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유가 중요했고, 어떤 사람은 자립이 중요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이 중요했고, 어떤 사람은 시가 중요했다.
<인생>
많은 것을 품고
이 길을 걸어 왔습니다햇빛보다 먹구름
꽃향기보다 비바람
설레임보다 두려움이었던 길허나 여기 서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알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영원히 빛이 꺼지지
않는 삶을 위해
이 시는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이 쓴 시이다. 참 좋지 않은가? 침묵의 세월에서 길어올리지 않으면 이런 시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쓰는 시에서 관류하는 것을 중심으로 내러티브 작업을 했다. 어느 성폭력 생존자는 빛나는 치유일기(<<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이매진)에서 “쓰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 같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하면서, 고통스런 작업을 해야 했던 이유를 말했다. 과거로 가는 것은 현재를 직면하고 미래로 가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을까? 극단적인 트라우마가 아니어도 누구나 이야기 작업을 해야 한다. 정직하게 써내려간 역사는 과거로 회귀하는 작업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를 품은 역사성이 있을 때 우리는 현재를 직시할 수 있고 과거와 현재를 안고 미래를 전망하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메므와 워크숍은 언제나 화양연화로 마무리를 짓는다. 화양연화는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다. 역사 한 편을 쓴다고 해서, 3~4개월 동안 자신을 깊이 성찰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한 때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자기를 온전히 말하고, 다른 이의 말을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주고 받고,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그러하지만, 온전히 다른 사람를 듣고 자기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어렵다. 어느덧 듣는 것, 말하는 것이 하나의 인권항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양연화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스며 있다.
워크숍은 비공개로 진행이 된다. 그러나 마지막 자리는 ‘제한적으로 공개’한다. 역사를 쓴 사람이 자기 역사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을 초청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카페)에서 화양연화가 진행되었다. 그 동안은 발표석에서 혼자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왜냐하면 발표석에 자신이 초청한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발표석에는 초청받은 사람이 사온 꽃이 놓여졌다. 소박하게 멋을 낸 발표회석에서 아무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발표 전에 초청받은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결국 초청받은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자리를 했고, 음악밴드가 축하공연을 해주었다. (이후, 내 안의 역사 프로젝트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상이 프로젝트 진행 개요이다. 다음 호에는 내용 중심으로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