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금요일의 데이트

- 마지연

회의실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벌써 세 시간째였다. 라연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제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을 지는 아직도 불투명했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갑자기 잡힌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다. 라연은 목을 길게 빼고 회의실 쪽을 쳐다봤다. 회의에 들어간 김차장이 빨리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회의의 내용이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회의 결과에 따라 칼퇴근이냐, 야근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준영이 회사 앞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는 식당도 미리 예약해두었다. 언니, 퇴근하고 백화점에 갈까요? 옆자리의 고대리가 슬쩍 물었다. 고대리는 아무래도 저녁 약속이 취소된 모양이었다. 약속 있어. 라연이 말했다. 라연의 대답에 고대리의 얼굴은 생기가 한풀 꺽인 듯 했다. 남자 친구 오기로 했구나. 실망한 목소리로 고대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곧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저녁 약속을 잡을 만한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고대리는 라연의 오래된 연애를 부러워했다. 언니는 좋겠다, 하고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가끔 말하곤 했다. 금요일 저녁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누구를 불러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마땅히 만날 사람을 찾지 못해 초라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부럽다면 부러운 일일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언제든 만날 사람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연애의 커다란 장점이기도 했다. 부르기만 하면 나올 사람이 있으니까 심심하거나 외로울 틈이 없었다. 어쩌면 외롭지 않다는 착각에 빠져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가고 있어, 곧 도착할거야. 준영의 문자였다. 라연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회의는 끝나지 않았고 잘못하면 야근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준영에게 문자를 보내려는데, 마침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몇몇 사람들이 분주한 걸음걸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 무리의 끄트머리쯤에 김차장이 보였다. 속이 터지도록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나온 김차장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월요일 아침까지. 그 말은 금요일 저녁을 망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월요일 아침까지라면, 라연은 지금 당장 수정본을 써서 넘겨야 했다. 에이 씨발, 늘 이런 식이지. 라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퇴근 시간 십분 전에 약 올리듯 일거리를 넘겨주는 김차장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통쾌함이 묻어났다. 부하 직원의 금요일 저녁을 망치는 게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기회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 앞이야. 준영의 문자였다. 라연은 퇴근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김차장이 두고 간 시안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수정해야 할 것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준영이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예약해 둔 식당에도 전화를 걸어 취소했다. 라연이 일을 끝낸 뒤에는 이미 오십 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라연은 수첩과 펜을 되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은 뒤 목도리를 칭칭 둘렀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준영은 지겨운 얼굴로 로비에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라연은 준영의 얼굴을 보자 모든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준영의 말투에는 역시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라연은 조금 전의 미안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미안, 하고 말했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했다.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닌데 뭘 그래, 하고 라연은 대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한 마디 더 보태서 금요일 밤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라연은 입을 다물었다.

준영이 저녁이나 먹자고 말했다. 뭐 먹을까? 글쎄 뭐 먹을래? 두 사람은 똑같은 말을 주고 받았다. 맛있는 거 먹자. 뭐가 맛있을까? 뭐 먹고 싶은데? 뭐, 별로, 딱히…… 돌림노래 같은 대화가 성의 없게 이어졌다.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더 이상 기분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랬다간 주말까지 내내 찝찝한 기분으로 보내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건 우울한 일이다. 매콤한 거 어때? 준영이 말했다. 마침 낙지볶음으로 유명한 식당이 떠올랐다. 그래 한번 가보자. 라연이 힘차게 말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낙지볶음이라, 기분 전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식당은 종로에 있었다. 걷기에는 꽤 멀었지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종로를 향해서 말없이 걸었다. 그러나 라연은 얼마가지 않아 하이힐을 신고 있던 발이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막상 종로에 가보니 낙지볶음을 하는 식당이 널려 있었다.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가야할 지 헷갈렸다. 게다가 그 식당들 모두 원조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준영은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야 한다며 라연을 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라연은 발이 아파서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데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겨우 찾아간 원조 30년 전통의 식당에는 빈 자리가 없었다. 식당 앞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라연은 발이 너무 아파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로 봐서 왠지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준영도 맛있을 것 같다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십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명한 맛집이라면 어느 집이나 그렇듯 그 식당도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30년 전통 어쩌구저쩌구, TV 출연 어쩌구저쩌구, 하는 수식어와 사진으로 벽이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라연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벽에 걸린 사진을 훑어 봤다. 사진 속의 개그맨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이제는 TV에 잘 나오지도 않는 한물 간 개그맨이었다. 우스꽝스러웠다. 낙지볶음을 앞에 두고 감탄하고 있는 개그맨과 아나운서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그럴수록 라연은 왠지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맛있을까? 하고. 그 표정이 몹시 멍청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식당의 명성을 증명하는 사진처럼 확실해보일수록 의심스러운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라연과 준영의 오래된 연애도 그랬다. 낙지볶음의 맛은 그저 그랬다. 라연은 너무 매워서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줄까지 서서 기다리며 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준영이 맛있지? 하고 물었을 때 라연은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그건 최소한의 매뉴얼 같은 것이었다. 식당을 나설 때 라연은 너무 매워서 속이 쓰렸다. 배가 살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설사가 난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이다.

응답 1개

  1. 막걸리말하길

    음.. 끔찍한 금요일 데이트군요.. 으.. 속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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