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상형에 대한 모든 것

- 도시사랑

“넌 이상형이 뭐야?”

차가운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던 S가 불쑥 물었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이상형이라는 질문 자체가 낯설었다. 이상형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술김인지 나는 S의 질문에 헤어진 남자친구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헤어진 표면상의 이유는 바람이었으나, 나는 바람보다도 바람의 과정동안 그가 했던 거짓말들이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만 사랑한다던, 그 말조차 사실이 아닌, 지켜내지 못할 약속일 뿐 이었단 생각이 들자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이 역겨워졌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그 사람과 반대되는 성향들만 뒤죽박죽 떠올랐다. 내가 머뭇대는 사이 S가 말을 이었다.

“이를 테면 난 말야. 일단 남자를 새로 만나면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인터넷으로 그 사람이 사는 동네나 아파트 가격을 검색해봐. 그러고 나서 계속 만날지 결정을 하는 거지”

과연 S였다. 이런 속물류의 얘기는 술자리라 하더라도 대체로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상책인데, S의 목소리에는 자뭇 당당함까지 배어있었다. S는 부잣집 딸에 예쁘고 똑똑하고 다방면에 손재주가 있는 친구였다. 일 년 이상 꾸준히 유명 피부샵에서 관리를 받았다고 하더니, 오랜만에 만난 S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선 연애인 같은 광채가 났다. 굳이 흠을 찾자면 키가 작은데 다리도 짧고 게다가 굵다는 거, 그 정도였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제일 앞서나갔지만, 그만큼 싫증을 잘 내기도 했다. 때문에 쉬이 동료나 친구에게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또 쉬이 남자 동료나 남자 친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S와의 관계를 지속시켜가긴 했지만, 실제로는 다들 시집가고 남은 게 고작 S와 나 뿐였다. 나도 여러모로 그녀가 좋지만은 않았다.

“글쎄,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난….. 그냥…. 거짓말 하는 사람이 싫어.”

내 말에 S는 어린아이 어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먼저 잔을 턴다. 테이블 위의 꼼장어 안주는 벌써 타서 쪼그라들어 있었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S가 말한다.

“봐봐, K는 이상형이 무조건 서울대 나온 남자였잖아. 물론 K가 서울대를 나오기도 했지만, 일단 ‘서울대’에 사실상 모든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든. 서울대를 다녔다는 건 그만큼의 머리가 있단 얘기고, 서울대를 보낼 만큼의 집안 형편이 담보된다는 소리기도 해. 그 뿐이야, 직장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되고, 게다가 인맥도 자연스레 형성이 되었다는 거지. 거짓말하지 않는 거, 그런 19세기 같은 소리 말고, 넌 그런 거 없어?”

이번엔 내 잔이 먼저다. S도 따라 든다. 부딪힌다. 차갑게 울리는 유리잔 소리와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의 조합이 썩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체육학과를 나온 K는 수영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뚱뚱해서 대학시절에는 그나마 봐줄만 했던 얼굴도 살에 파묻히는 정도의 외모가 되었고, 말이 많고 게다가 말 전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알고 나면 모든 소문의 진원지이기도 해 친구들의 기피대상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토록 얼마나 원하던 서울대 나온 남자와 선을 보고 삼 개월 만에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다는 얘기가 돌았다. 말을 전한 친구가 민망할 정도로 K에 대한 언급은 이어지지 않았다. 관심없다는 듯 했지만, 서울대라는, K가 원하던 이상형의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과, 미국이라는 막연한 해외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비슷비슷해야 질투도 한다고 했었나, K의 결혼은 질투거리 이상이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던 것 같다. 나 또한 서울대 빼고는 K보다 못한 게 없다고 줄곧 생각해 오던 터라, K의 결혼이 놀랍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었다.

큰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S의 표정에 무엇인가 나도 근사한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할 것만 같았다.

“음…. 그럼 난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 예술하는 사람 말고,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 예술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하잖아. 그런데 예술에 관심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삶에 여유가 있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같이 미술관 가고, 같이 음악회 가고, 그럼 그만큼 소통할 거리들도 많아질 테고….”

고개를 끄덕이던 S는 마지막에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끊었다.

“그래. 뭐 나쁘진 않지만 좀 모호한 구석이 있어. 이를 테면, 앤디 워홀이나 키스 해링은 너무 유명하니까, 클레스 올덴버그의 작품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사람이라던 가, 모 그런 구체성을 가지면 더 좋을 거 같은데.”

“그 때문에 넌 남자친구도 없이 서른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거야.”

동의한다는 듯 S가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말 없이 서로 잔을 든다. 물론 나도 S와 다를 바 없다. 서른 네 번의 크리스마스를 의미 없게 보냈지만, 올 해라고 달라질 것 같진 않으니까 말이다.

“키스 해링 같은 사람 몰라도 되니깐, 그냥 거짓말 안하고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 그런 남자 어디 없을까?”

어, 라는 짧은 S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잔 안의 투명한 것들도 따라 흔들린다. 마른 농담의 속 뜻이야 상관없다는 듯 다시 잔을 들고, 웃고 하며 겨울, 긴 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파트 값이 남자를 고르는 마지노선인 S도 K처럼 어느 날 타워팰리스 사는 남자와 결혼하여 더 이상 공시지가 열람 사이트에 들어갈 일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S의 결혼을 축하해 줄 수 있을까. 다만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사람을 두 번째 보게 될 터이니, 그땐 나도 애당초 없었던 이상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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