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노인, 죽음, 그리고 투표

- 황진미

독거노인의 고독사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들의 97%가 자식이 있었다는 통계는 자녀가 더 이상 부양의 주체가 되지 못함을 증명한다. 비단 독거노인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노인인구가 급속히 늘고 자녀와 같이 살지 않는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노인들끼리 사는 가구도 많아졌다. 이들이 아프거나 죽어갈 때, 누가 어떻게 돌보아야 할 것인가? 이는 재정의 투입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보살핌은 감정의 결까지 포함된 복합적인 문제이다. 가령 노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한명이 쓰러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프랑스와 아이슬란드에서 만들어진 영화 <아무르>와 <볼케이노>는 공교롭게도 같은 답을 내놓는다.

<아무르>의 조르주와 안느는 음악가 출신의 다정한 80대 부부이다. 어느 날 아내는 잠시 동안 멍한 결신발작 증상을 보인다. 뇌경색수술을 받았지만 오른쪽 편마비를 얻어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다시는 나를 입원시키지 마”라 말한다. 남편은 열심히 간병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아내는 자신이 짐이 되는 게 싫다. 그러나 아내가 자기 몸을 통제하는 힘은 점차 약해진다. 자면서 오줌을 싸고,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한다. 뇌졸중의 후유증 중 하나인 혈관성 치매의 증상이다. 방문한 딸과 사위는 입원시키자고 하지만, 이는 아내의 뜻이 아니다. 아내는 물과 음식을 삼키지 못한다. 남편은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다 아내의 뺨을 때린다. 결국 남편은 아내를 베게로 눌러 질식사 시킨다. 남편은 꽃으로 시신을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 뒤 장문의 편지를 쓰고 사라진다. 딸이 방문하였을 때 문이 잠긴 상태였고, 소방관이 와서 문을 땄을 때 아내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아무르>는 일생동안 지극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 온 노부부가 참혹한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주며 이 어쩔 수 없음도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조용히 반문한다.

<볼케이노>의 하네스는 30년간 수위로 재직하다 퇴임하던 날, 불현듯 자살을 시도한다. 며칠 후 진짜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자식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이 괴팍한 아버지를 싫어하고 엄마를 연민한단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라도 다정한 남편이 되리라 결심한 그는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다음날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아내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남편은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집에 데려온다. 그는 열심히 간병하지만 조금씩 지쳐간다. 출가한 자식들은 가끔 방문할 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아내는 의식불명상태에서 꺼이꺼이 우는 소리를 낸다. 남편은 아내를 베게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아내의 영구차와 함께 그는 평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볼케이노>의 경우, 남편의 가정간호와 안락사(?)가 과연 아내를 위한 최선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평생 무뚝뚝하던 남편이 결심만으로 중증환자를 수발을 감당하긴 힘들다. 아내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남편의 ‘안락사(?)’를 원했는지도 알 수 없다. 남편의 행위는 우울함으로 인해 충동적으로 벌인 것일 수도 있다. 초반의 자살기도는 이를 뒷받침한다. 남편의 행위는 비밀에 붙여지고 성스러운 장례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윤리적 난제를 호상으로 봉합해버리는 것으로 읽혀 동의하기 힘들다.

호상이라니 생각난다.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노인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주차관리 일을 하는 군봉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정성으로 돌본다. 그러나 아내가 암까지 걸린 것을 안 그는 출가한 자식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뒤, 연탄불을 피워놓고 아내와 자살한다. 자식들은 모르게 자살의 흔적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친구에게 남긴 채. 친구는 장례식장에서‘호상’이라는 문상객들에게“늙은이가 죽으면 다 호상이야?”라며 소리친다. 영화는 노년의 삶을 다소 낭만적인 시선으로 그린다. 가난한 노부부는 끝까지 스스로 생계와 병고를 책임지다 감당이 안 되자 알아서 조용히 죽는다. 영화 속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연에 비해 지나치게 곱상한 할머니가 작은 복지에도 감지덕지하는 모습이나 노년에 진정한 사랑을 만났지만 자식들 귀찮게 하지 않고 조용히 헤어져주는 등의 서사는 노인들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젊은이들이 원하는‘착한 노인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관객들은 노인들의 사랑과 헌신을 보며 감동할 뿐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는 물론 사회적인 멘털리티의 반영이다. 한국은 전체 인구의 12%가 65세 이상인 고령화 사회이다. 노인자살률은 부동의 세계 1위로, 20대 자살률의 4배이고, 유럽노인자살률의 6-7배이다. 고독사도 매년 천명이상 발생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죽음은 젊은이들의 죽음에 비해 관심 받지 못한다. 보편적 복지와 보살핌의 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선거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노인들의 표심은 혹시 조용히 죽어가지 않겠노라는 인정투쟁의 발로가 아닐까. 노인들의 빈곤과 고독과 박탈감을 돌보는 공동체의 노력만이 반동의 회귀를 막는 진실한 대안이 아닐까.

응답 1개

  1. 아무르말하길

    노인들의 빈곤과 박탈감, 희생을 만들지않을 수 있는 장치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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