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흄의 철학

- 박준영(수유너머N [흄세미나] 팀)

철학사적으로 흄(1711~1776)을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그를 통상 얘기되는 방식대로, 합리론(이성주의)과 경험론(경험주의)이라는 틀 내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가? 오히려 흄의 철학을 정념의 물질성을 기반으로 ‘지각’을 중심에 놓고 정신을 이해한 유물론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주체를 이야기 하면서도 흄은 그것을 기체(hypokeimenon)가 아니라 일정하게 운동(kinesis)하는 계열처럼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운동’은 무엇보다 데카르트의 정신(esprit)이 아니라 오히려 ‘정념’(passion)의 운동이라고 해야 한다. 흄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시피, 정신이 아니라 “정념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정신은 오직 어떤 비실체적인 ‘장소’(place)처럼 간주된다.

게다가 그는 정신을 한갓 ‘지각’(perception)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즉 그는 자주 “우리 정신의 지각”(perception of our mind)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을 정신이라고, 또는 정신은 이러한 지각들의 연합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인상’(impression)은 늘 모든 것의 기본요소로 상정된다. 만약 흄의 논의가 정합성을 가진다면, 이때 정신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방식의 오성 또는 지성(understanding)의 체계가 아니라 “내적인 인상”(internal impression)으로부터 야기되는 지각이며, 의지와 연관되었을 때 분명 신체성을 띄게 된다. 여기에 흄이 주체의 유물론을 전개하는 지점이 보인다. 다시 말해 흄의 지각은 마치 스토아 학파의 katalepsis(지각)처럼 물체적인 것의 배치(pos echon, dispositif)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능동/수동의 운동을 따르는 어떤 자연적인 것(physis)이다. 여기에 심신이원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정신은 신체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평면에 놓이게 되며, 오직 이론적으로만 구분될 수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자연’은 합목적성(finality)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본성과 일치한다. 즉 자연과 인간본성은 서로를 깊이 끌어 당기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흄의 철학을 보면서 느끼는 ‘깊이의 부재’는 여기서 연유한다. 그에게는 내려갈 ‘바닥’이 없으며,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식’의 표면이며, 또는 물리적 실재의 ‘모습’(eidola)들인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모습들’의 표면효과가 ‘실재’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흄에게서 도덕과 윤리, 정치와 제도는 실재적이지만 인위적이고, 물체들의 운동과 배치에 따라 유동하는 이념적인(ideal) 것이다. 이것이 다만 표면효과인 이유는 여기에 스토아적으로 존속(subsist)하는 ‘무엇’(ti)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들이 하나의 이념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다만 ‘자연’과의 합목적성을 달성할 수 있을 때뿐이다. 즉 그것이 ‘효과’가 되려면 인위적으로 된 자연과 자연으로 다가가는 인위성이 조우해야 한다. 이것은 이념이 표면에서 자연, 인간과 어떻게 배치되는가를 밝혀준다. 사실상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러한 표면의 강조는 매우 전복적인 것이다. 그것은 억견(doxa)의 평면에도 속하지 못하는 환영(phantasma)일 뿐이다. 환영은 인상을 경유하여 정념과 제도, 그리고 도덕 전반을 ‘발명’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흄의 유물론은, 이러한 환영과 인상이 ‘제자리를 잡아 가는’ 방식으로서, 배치의 유물론이 된다. 여기서 배치물들은 모두 물체적인(원자적인) 것이며, 배치의 원리는 ‘연합’(association)이다. 이 모든 과정들은 플라톤적인 상승의 과정 즉, 억견에서 지식(epistēmē)에 이르는 과정을 전복한다. 아니 오히려 그 과정을 표면으로 끌어 내리고 짓눌러 하나의 평면으로 잡아 늘인다.

하지만 이러한 ‘연합’(관념이든 인상이든 또는 정념이든)은 늘 불안하고, 허약하다. 연합은 연합되지 않은, 즉 선별되지 않은 한 무리의 인상들의 잔여를 남기기 마련이다. 흄은 이러한 ‘잔여’(residuum)를 그의 책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다. 예를 들어 보자. 흄에게서 하나의 ‘신념’, 즉 안정된 배치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렴풋한 표상작용’(loose conception)이 먼저 나서야 한다. 이것은 미분적이고 지각불가능한 영역에서 다가오는 ‘전조(前兆)’와 같다. 우리는 인상들의 덩어리에서부터 모든 것을 분별해 낸다. 하지만 이것이 ‘생생한 표상작용’(lively conception)이 되려면 일정한 ‘추론’과정, 즉 하나의 배치물과 다른 배치물, 이 인상과 저 인상, 먼저 오는 정념과 뒤따르는 정념 간에 ‘불연속성’을 가정하고, 그것이 개별적 실재(individual entity)라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이 불연속성 가운데 존속하는 연속적인 선분들은 ‘신념’의 체계 안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이다. 이 추방된 잔여물들은 제 역할을 다한 후에 사라진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느낌’(feeling)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느낌은 다시 순환하여 주체가 다른 지각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이렇게 해서 인식의 질서에서 뒤에 오는 잔여물로서의 이 느낌이 오히려 실재들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요소가 된다. 즉 존재의 질서에서는 앞선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각자 자신의 가슴으로 이 느낌을 의식하고 있다. (…) 사실 신념을 구성하는 이 느낌에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간에, 저자가 명백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느낌이 허구나 순수 관념(mere conception)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정신에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느낌이 정념 및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한다(Treatise, ed. Selby-Bigge, p. 654)

따라서 흄에게서는 보다 급진적인 방식의 자연주의(naturalism)가 소박한 실재론과 물리주의 양자를 넘어서서 제시된다. 본래 자연주의는 단지 인간본성과 자연의 일관성(consistency)만을 가정하며, 실재론은 ‘존재자’와 ‘존재’를 혼동하고, 물리주의는 물질적 ‘원자’ 또는 생물학적인 ‘기관’ 수준으로 모든 것을 환원한다. 하지만 흄의 자연주의는 ‘배치의 유물론’으로 수렴되는데, 그것은 환영의 효과라는 점에서 급진적이며, 인상의 해석가능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다만 그것이 ‘느낌’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만 알려진다) 반형이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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