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사람은 울면서 웃는다.

- 오영진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은 신애(전도연)는 길 위에서 서럽게 울었다. 흐느껴 들썩이는 그녀를 카메라가 뒤따라갔을 때, 그녀의 등을 와락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 사람은 비단 나뿐만 아닐 것이다. 이 장면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상대의 슬픔을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만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신애의 통곡 씬을 통해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신애의 등을 어루만진다. 신애는 등으로 울고 있다. 이를 통해 신체와 감정 간 중요한 관계가 드러난다.

감정은 사실상 신체적이다. 표정은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있다. 예를 들어 슬픔은 축처진 어깨, 힘없는 걸음걸이, 허기짐, 차가운 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신체이다. 슬픔은 고통을 몸으로 직접 받아내는 일이라는 것. 매우 당연한 듯 보이지만 종종 잊곤 하는 이 사실을 신애가 보여주고 있다. 즉 슬픔의 표상인 눈물이나 울음소리는 오히려 간접적 표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는 수많은 언어표현 중 하나가 아니라 되려 이 신체적 반응에서부터 감정이 규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흄은 우리가 겪는 정념의 다양이 실은 신체의 감각에서 유래한 것임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는 이것을 매우 단순한 이분법에서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쾌와 고통이다. 고통받은 얼굴은 일그러져 흉하다. 흄에 의하면 우리가 흉을 거부하는 이유는 흉의 흉함 때문이 아니라 그 흉이 고통을 전이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흄이 논하고 있는 쾌와 고통의 이분법이 과연 모든 판단의 기원에 서 있는지는 논쟁하지 않도록 하겠다. 문제는 신체다. 신애의 슬픔이 관객에게 전해져 온다면 그것은 실체가 불분명한 ‘감정’에서가 아니라 분명히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관객은 신애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낀다. 신체적 고통이 슬픔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흄이 논한 공감(Sympathy)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보통 ‘공감’은 선한 가치로 논해지는 경향이 있다. 공감한다는 것은 타자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고, 그럼으로써 타자를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흄은 공감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를 지녔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과학자의 그것처럼 매우 냉정한 눈으로 이를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공감은 주어진 능력이며 이는 자연의 원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일례로 흄은 ‘허영’의 뜻을 가진 ‘Vanity’나 ‘긍지’의 뜻을 가진 ‘Pride’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은데, 이는 그가 허영이나 긍지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가치를 기본적으로 정념의 차원에서 고려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 둘은 신체적 에너지가 상승한 상태로서 동일하다. 상대의 기세등등함 앞에서 내가 주눅이 든다면 허영일 것이요, 나도 같이 고양된다면 긍지일 것이다. 따라서 허영/소심의 쌍과 긍지/겸손의 쌍을 엄격히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흄은 오히려 공감의 능력이 상대를 배척하는 방향으로도 이끌 수도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신애의 고통이 너무도 날 것으로 내게 다가올 때는, 나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 싫어 배척할 수가 있다. 이 순간에서조차 나는 신애의 고통과 대비되는 나의 안락함의 우위에 안심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이런 관계로 흄이 논하는 공감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소유하게 된 일종의 능력에 더 가깝다. 흄은 현악기에 있어 현과 현이 공명하는 것에 이를 비유하였다. 상대의 신체적 정황이 내 신체로 전이되어 같이 동조되는 현상에 대해 현대과학은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라는 나름의 답변을 내놓은 적이 있다.

흄은 신애의 불행에 내가 공감했을 때, 그것이 소위 도덕적 귀결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중의 공감을 통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첫째, 신애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고, 둘째, 신애가 그 고통을 벗어나 있는 장면 즉 미래의 이미지에 공감해야 한다. 이러한 쾌의 경제를 통해 나는 신애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동정은 善에서 나온다기보다 쾌의 경제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신애를 애써 외면하는 것과 신애의 고통이 나아기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신애의 고통이 나를 덮쳤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후자가 내게 더 큰 쾌를 주기에 근본적으로, 비록 노력은 들지만 신애를 걱정해주는 쪽이 더 옳은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공감하는 인간이다. 공감이 본연적으로 도덕성을 결여한 능력에 불과하더라도, 이 능력이 결국 도덕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감의 능력을 깨닫고 발휘하더라도 한 가지 넘어가야 할 장애가 있다. 우리는 거리가 먼 것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거리의 노숙인보다는 내 가족에게 더 공감이 가능하다. 이것을 흄은 공감의 편파성이라 불렀다.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에 따라 인상의 생생함이 차이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편파성을 극복하는 행위를 흄 도덕론의 핵심으로 보았다. 공감능력의 순진함 즉 충동적 차원의 가상적 모방과 편파성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전환시키는 데에는 발명의 차원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공감 자체에는 도덕성이 없으나 이를 보다 최대이익으로 만드는 의지적 행위 속에서 자연스레 도덕으로 발명된다는 것이 흄의 견해이다. 여기서 발명된 도덕은 선험적 도덕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네트워크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는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수 있다. 이 점에서 편파성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할 요소이다. ‘타인을 내 가족과 같이’가 아니라 ‘타인이 내 가족보다 가깝게’ 현상되는 것은 네트워크의 새로운 힘덕분이다.

* 네트워크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는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수 있다. 이 점에서 편파성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할 요소이다. ‘타인을 내 가족과 같이’가 아니라 ‘타인이 내 가족보다 가깝게’ 현상되는 것은 네트워크의 새로운 힘덕분이다.

근래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논쟁에서 이 편파성에 대한 시비가 일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소설에서 논의되고 있는 ‘혈육적 친근함에의 복원’이라는 주제가 공감의 능력 자체를 잃어버리는 오늘날 의미 있는 메세지를 주고는 있지만, 이 주제가 부각됨으로써 되려 비혈육적 대상에 배타적인 시각을 낳는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우선 혈육적 편파성을 비판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흄도 논의했거니와 이 편파성은 도덕성이 결여한 공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에 드러난 ‘혈육적 친근함에의 복원’에 대해 그 자체가 문제이니 즉각 폐기할 것을 주장하는 일은 우리가 보유한 공감의 능력이 어찌되었든 간에 편파성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은 결과다. 거리가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 거리가 먼 것들, 비혈육적 대상들에게 곧바로 마음을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문제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에게만 멈추는 상상력이다. 편파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발전시킬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

차라리 오늘날의 문제가 되는 것은 공감의 능력 자체가 사라지는 현상이라 하겠다. 상대의 고통을 외면할지언정, 최초 외부로부터 고통의 엄습은 존재한다. 이 과정이 있는 한 불현듯 상대의 고통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반면, 공감의 능력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타인의 눈동자를 읽을 수 없는 기계가 되어간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던,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의 근면성실한 살인행위는 이렇게 공감의 능력 자체가 파괴된 가운데 가능하다.

운다는 표현은 주로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행위에 국한되어 쓰이는 말이지만 동물이나 물건에 쓰일 때는 진동을 내거나 소리를 내는 행위에 쓰인다. 마치 현악기에서 현과 현이 공명하는 것처럼 우는 행위는 그 주변을 울리기 마련이다. 우리의 몸이 일종의 악기라는 것을 깨닫고, 울고 있는 신애의 등에 손을 올려보자. 그 울림으로 인해 나는 타인을 이해가 아닌 느낌으로 만난다. 이제 공감의 능력을 어떻게 도덕으로 발명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과 의지에 맡기자.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한다. 같이 울 수 있는 존재라면 같이 웃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은 울면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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