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5)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4-2-2 용서하기

하버지, 용서, 좋은 건데 용서하기 전에 수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니 실제로 용서하기가 쉽지는 않겠어. 그렇고말고. 용서하기 전에 풀어야할 문제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어느 정도 원상회복 또는 배상을 약속할 때 용서해야 하는가. 재발에 대한 책임을 약속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용서한 뒤에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대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했으면 피해 사실을 잊어야 하는가 기억해야 하는가. 용서했다면 가해자를 어디까지 얼마나 사랑하고 화해해야 하는가 등등.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모두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문제들이야.

그러면 하버지가 용서할 수 있는 하버지의 회개의 조건은 뭐야. 먼저 어떤 처지에 있는 가해자가 왜 나에게 어떤 피해를 얼마나 입혔는지 알아야 무조건 용서를 할지 조건부용서를 할지, 조건부용서를 한다면 어떤 회개 조건을 제시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거야. 성서에 이런 얘기가 있어. 다윗이라는 왕이 많은 후궁들을 두고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어. 다윗은 몰래 그 충성스러운 부하의 사령관에게 지시했어. 거추장스러운 그녀의 남편을 전투의 선봉에 서게 한 뒤에 후퇴해서 적의 칼날에 죽게 만들라고. 그런 뒤에 다윗에게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비유로 그의 죄를 고발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가진 사람에게 귀한 손님이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양이 아까워서 이웃에 있는 양 한 마리 가진 사람의 것을 늑탈하여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물었어, “그 부자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합니까.” 듣자마자 다윗은 노발대발하며 ‘맹세코 내가 그를 살려두지 않겠노라’고 말하지. 그러자 나단이 “그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단죄해.

하버지, 그런데 거꾸로 한 마리 가진 사람이 백 마리 가진 사람의 것에서 한 마리를 훔쳤다면 얘기꺼리가 안 될 것 같아. 그런데 이 선지자 얘기는 왜 꺼리가 되는 거지? 현실을 더 잘 드러내는 쪽의 이야기가 더 실감이 나니까 더 꺼리가 되잖겠니. 좀도둑 이야기보다는 부자나 권력자의 횡포 이야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더 자주 겪는 더 큰 괴로움을 더 잘 드러내니까. 현실에는 해결되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커더란 고통을 더 잘 드러낸 이야기가 훨씬 더 실감나겠지.

자, 홍아야, 하버지가 하나 묻자. 양 아흔아홉 마리 가진 부자가 양 한 마리 가진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은 잘못과 양 한 마리 가진 가난한 사람이 아흔 아홉 마리 가진 부자의 것을 한 마리 빼앗은 것 두 잘못이 있다고 하자. 이 두 건의 잘못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도덕적인 책임이 같겠니 다르겠니? 잘은 모르겠는데 다르니까 물었겠지. 법적으로는 피해 정도에 따라 시장에서 교환되는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배상액을 정했고 배상을 못했을 때는 그 배상액을 기준으로 형량기간을 정했으니까 두 건의 책임이 똑같아. 물론 정상참작이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책임은 똑같아.

그러면 도덕적인 기준으로는 책임의 정도가 다른가보네. 도덕적으로는 피해자의 괴로움을 공감한 정도를 기준으로 심판하니까 법적인 심판과 아주 다를 수도 있어. 인간은 어떤 사건을 대하든지 그 사건의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괴로움을 공감하게 마련이야. 그래서 부자의 전 재산인 아흔 아홉 마리의 소중함만큼이나 가난한 사람의 전 재산인 한 마리 양도 소중하다는 피해자의 주관적인 가치에 공감하게 돼.

가족처럼 사랑하는 그 한 마리를 빼앗겼을 때 그의 모든 소유를 빼앗긴 괴로움에 공감하는 사람은 피해자와 함께 부자의 횡포를 미워하게 되지.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그의 괴로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시장에서 교환되는 한 마리 양의 교환가치로 부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느끼는 한 마리 양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를 빼앗긴 것으로 공감하고 부자의 잘못을 미워하게 돼. 그래서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부자의 면전에서 책임을 지울 만한 강제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공감하고 있는 괴로움 때문에 부자를 저주를 할 거야. ‘제 것이 아흔 아홉 마리나 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아깝다고 남의 전 재산을 빼앗다니 저런 나쁜 놈은 천벌을 받아 돼’하고.

그런데 하버지, 하버지가 용서할 수 있는 회개의 조건이 무어냐고 물었어. 그리고 난 아직 그 대답을 못 듣고. 내 얘긴 피해자인 자신의 괴로움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가해자의 괴로움에도 공감을 하고나서 어떤 회개 조건으로 용서할 것인지를 따져보자는 거야. 겉보기와 달리 오랫동안 깊이 있게 살펴봤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야. 가해자가 그렇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 모두가 그를 몰아붙였을 수도 있어.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왜’ 속에는 가해자의 처지와 동기와 의도가 들어있어. 그 ‘왜’가 풀리면 가해자가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거지. 그러면 용서할 수 있는 회개의 조건을 쉽게 결정할 수 있다는 거야.

가해자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지? 아, 그건 거꾸로 따져봐야 알 수 있어. 먼저 가해자의 의도에서 출발하자.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내다본 결과가 그 행동의 의도야. 그러므로 의도는 대개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지. 물론 행동의 주체가 결과를 정확하게 내다보지 못해서 엉뚱한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지. 그러나 지금 여기서 따지자는 문제는 의도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런 의도를 가지게 된 동기야. 가해자가 누군가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을 때 가해자에게 어떤 동기가 작용해서 그런 행동을 일으켰는가 알고 싶지 않니?

하버지는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읽어내는 독심술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야? 아니, 어떤 사람의 일련의 반사행동을 일반화시키면 그의 행동에 작용했던 동기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일반적인 얘기야. 동기는 막연한 본능적인 욕구와 달리 목표와 방법이 분명할 때만 생기는 행동의 추동력이지. 사흘 굶고서 도둑질 아니 할 사람은 없다는 속담이 있는데 생존의 극한적인 상황에 몰리면 거기서 벗어나려고 못할 짓이 없다는 뜻이지. 그러나 욕구라는 추동력은 크지만 먹을 것이 안 보이거나 보이기는 하는데 손에 넣는 방법이 없을 때는 아직 동기가 생기지 않아서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 나오지 않아. 그러나 먹을 것이 어디 있는지 알고 그것을 손에 넣는 방법이 생각나면 당장 행동을 개시할 거야. 이렇게 볼 때 목표와 방법을 알아야 행동을 개시하고 그 행동을 힘차게 이끌어가는 동기가 생겨.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욕구는 내부적이고 본능적인 추동력이야. 그러나 목표와 방법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키지는 못해. 이는 마치 댐 안에 갇혀있는 커다란 물과 같아. 중량의 낙차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다만 아직은 고요하게 갇혀있지. 그러나 수문이 열리면 그 에너지가 수로를 따라 외부의 목표인 발전소나 농경지나 각 가정을 향하여 돌진하게 되지.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부적이고 본능적이고 욕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나 갇혀있어. 그러다 외부적이고 사회적인 목표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적인 행동방식을 알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하지.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동기는 본능적인 욕구가 사회적인 목표와 방법과 상호작용하여 생기는 추동력이야.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동물들도 동기가 있으니까 행동하잖아? 물론 홀로 사는 동물들도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이 보이면 각자 다른 본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포획하고 섭취하려는 동기가 생겨서 행동을 일으키지.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는 본능적인 목표와 방법이 아니라 사회적인 목표와 방법이야. 원시 사회에서 굶주렸을 때는 직접 먹을 것을 목표로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개시했겠지만 굶주린 현대인이라면 먹을거리를 직접 찾아 나서기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적인 방식으로 행동을 개시하겠지. 얻은 걸로 몇 차례의 교환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회적인 방식을 학습했기 때문이야.

원시인등이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등 기본적인 욕구를 직접 채울 수 있는 것을 추구했으나 이제는 직업이나 지위 또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지식 등의 사회적인 목표를 사회적인 방식으로 추구하게 되었어. 그래서 현대인에게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는 막연한 본능적인 욕구나 그걸 채울 수 있는 1차적인 목표도 아니야. 현대인에게는 학습된 2차, 3차적인 간접적인 목표들을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추구하도록 동기가 주어지지.

그렇더라도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생활양식이 문화권마다 그리고 행동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면 현대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각각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 문화권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되고 학습된 동기들로 살아가지. 학습이나 경험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목표를 다른 방법으로 추구하게 되므로 욕구라는 본능적인 추동력이 사람마다 다르게 작동되게 마련이야. 이는 어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목표의 우선순위와 방법의 선악이 경험체계에 사람마다 다르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사흘을 굶으면 도둑질할 사람도 많겠지만, 도둑질을 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그러므로 목표와 방법을 선택하여 행동을 일으키는 것, 어떤 동기를 갖게 만드는 것이 그 사람의 경험체계 즉 조건반사체계야.

그러면 조건반사체계는 왜 그런 목표를 그런 방법으로 계속해서 추구하도록 만들지? 그건 행동의 관성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관성을 만든 것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조건 때문이고. 여기서 조건이란 주어진 삶의 현장 상황을 규정하고 있는 자연이나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인 요인들이지. 인간은 이들 조건에 알맞은 행동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겠지. 그리고 성공한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조건반사체계를 만들겠지. 그래야 다음에 똑같은 조건에서 성공했던 경험을 출력하여 욕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으니까. 일관성이 있는 추동력은 조건반사체계가 잘 정리되어 있다는 증거일 거야.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 삶의 조건에 때문에 다른 경험을 하게 되므로 경험하므로 서로 다른 경험체계를 갖게 되지. 그래서 그 체계가 가리키는 다른 목표와 방법으로 동기가 유발되므로 다른 반사행동을 하게 돼.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인간은 그 사회가 공동 생산한 부나 권력이나 명예나 지식 직업 등의 사회적 자산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 사회의 문화가 만든 생활양식이나 행동방식으로 그걸 추구하게 마련이야. 그러나 사회 안에 있던 삶의 목표와 방법이 다르게 내면화되어 있어서 다른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단다.

그런데 하버지 다르게 살아간다는 게 문제가 돼?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계속해서 잘못된 동기를 부여하는데도 자신의 경험체계만이 최선이라고 믿고 잘못된 반사방식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문제야. 만약에 더 쉽게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목표와 다른 반사방식을 알았다면 벌써 그렇게 바꾸었을 거야. 그러나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경험체계로 사물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반사 방식을 언제나 최선이라고 믿고 고집하게 마련이야.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 가장 좋고 옳은 목표와 방법을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 주저 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반사행동을 하게 마련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의 반사체계가 옳고 좋다고 승인하고 동기를 부여한 행동의 결과로 남들이 피해를 당했을 때야. 그래서 그의 조건반사체계가 왜 그런 목표와 방법을 지시하고 그런 동기를 부여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야. 그걸 따져보는 것이 용서와 무슨 상관이 야? 음, 하버지는 용서의 가능성은 다시는 그러지 않을 회개의 가능성이라고 봐. 그런데 회개의 가능성은 피해자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 가능성이라고 믿고 있어. 삶의 경험에서 피해자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이 특히 어린 시절에 보호자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이 내면화된 공감능력만큼 회개할 수 있다고 믿어. 그래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는 만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

피해자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는 정도만큼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네. 우리말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자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어. 왜 때린 놈이 맘 놓고 잘 수 없을 만큼 잠자리가 미안하고 죄송한가. ‘미안(未安)하다’ 또는 ‘죄송(罪悚)하다’는 사과 즉 회개의 말이지. 때린 놈은 맞은 놈의 분노나 미움이나 복수심을 느끼니까 마음이 편안하기는커녕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렵겠지. 그러니까 ‘미안하다’나 ‘죄송하다’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해보고 난 후에 느끼는 괴로움을 나타낸 말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피해자의 분노나 미움 등의 괴로움을 덜어주어야 돼. 그래서 잘못을 사과하고, 원상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되지. 공감의 괴로움 때문에 회개의 열매가 열린다고 봐.

가해자가 피해자의 괴로움에 얼마나 공감하는지를 알려면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아야겠네. 그렇단다. 태도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반응할 준비상태를 가리켜. 여기서 ‘반응’은 행동이고 ‘준비상태’는 마음가짐이야 그러니까 태도는 한 인간의 경험체계라는 준비상태, 마음가짐, 반사방식을 가리켜. 그런데 한 인간의 반사방식에 더불어 살려는 마음가짐인 공감이 어느 정도 작용하느냐가 문제야. 남들이 좋아하는 일은 못할망정 적어도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공감능력은 가져야 더불어 살 수 있잖을까.

그래서 만약에 가해자의 태도에 피해자가 싫어하는 일을 저지른 것을 진심으로 괴로워한다면,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하게 생각한다면 그 공감에 따라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믿고 용서할 수 있지. 그러나 남에게 피해가 생기든 말든 누구나 자기 잇속을 차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남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을 버린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하겠다는 태도이지. 이런 태도를 보이면 용서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용서해도 소용없으니까. 그래서 피해당한 괴로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하버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원상회복이나 배상의 책임을 지우고 싶어.

그런데 공감적 태도가 다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잖아. 대통령 선거 막판에 가면 여야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공감적인 태도가 선명하게 대립되는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아. 비슷한 예로 하버지가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반대 시위자들의 공감적 태도를 들 수 있어. 하버지 기준으로는 참으로 한심한 인지적 감정적 행동적 공감 태도이지. 그러나 그들에게 공감해보자면 그들도 우리를 반대하기 위한 반대 시위가 아니라 나름대로 옳다는 신념을 따르고 있는 거야.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애국충성을 다하는 거지.

그러나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여야의 대선 후보자든 유권자든 또는 반대 시위자든 사용자와 노동자, 다수자와 소수자, 그리고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무력자, 등 어느 계급 계층의 이해에 공감하느냐를 따져봐야 돼. 더 깊이 따지려면 결국은 정치·사회·경제·문화적인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고 어느 쪽에 공감하느냐를 따져봐야 돼.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상생을 가져오지만 가해자끼리의 공감은 엄청난 적대감으로 상대편에 아주 크고 끔찍한 피해를 줄 수도 있어. 그래서 하버지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 패거리 의식 조폭 심리 제국주의적인 열광 등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역사가 폭력과 전쟁으로 증명했어. 그런데 가해자들은 언론이나 교육, 종교 등 신념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자기도 모르게 피해자가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고 가해자에게 공감하여 배신적인 투표를 하도록 만들 수 있어. 가해자에 대한 공감으로 생긴 허위의식에 젖어서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고 있지. 이러한 피해자의 자기 배반적인 공감적 태도는 밉기보다는 차라리 불쌍한 거지.

그런데 하버지,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남을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끼려는 동기를 가진 사람도 있다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람이 생겨? 학교 안에서 왕따 사건의 가해학생에게 왜 피해학생을 괴롭혔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 ‘재미로요’라고 대답한대. 가해 학생이 그 교실에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언제 누구라도 맘만 먹으면 교묘하게 괴롭힐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야. 그는 그 능력을 가지고 교실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또 그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그런 경험이 계속되면 그는 억제할 수 없는 가학성 성격, 즉 가학적인 반사체계로 발전할 수도 있어.

남을 괴롭히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 괴롭힐 것인지 먼저 그 상황을 떠올려야 하니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괴로워야 되는 것이 정상적인 공감능력이야. 그런데 이런 공감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대. 그들은 어린 시절에 보호자가 미워서 마음 문을 닫아걸고 보호자에게 공감하기를 거부하다보면 공감능력이 조금씩 무뎌져서 자라서는 거의 공감을 할 수가 없게 된대. 이들에게는 남들과의 공감으로 더불어 잘 살려는 생각보다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혼자만 더 잘 살려는 반사행동을 하도록 동기가 형성된대. 그래서 공감을 못하는 사이코패스들은 남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서가 아니라 남들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는 데서 행복을 느낀대.

가학적인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피해를 당하면 어찌해야 돼. 이들도 용서할 수 있어? 이들의 목표가 교묘한 방법으로 남을 괴롭히는 데서 얻는 쾌감이라고 심리적인 동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버지는 달리 생각해. 괴롭힘 그 자체에서 어떻게 쾌감을 얻고 만족할 수 있는지 하버지는 알 수가 없어. 하버지는 이들도 사회적인 자산인 부나 권력이나 명예나 직업이나 지식이나 지위 등을 얻으려는 사회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 다만 이들은 사회적인 자산으로 공생공영하려 하기보다는 독점하고 독재하고 독선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일 거야. 그런데 더 문제는 그것을 얻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정해진 행동방식만이 아니라 일탈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는 거야. 폭력 세계에서 보이는 것은 약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야. 교실이나 학교폭력에서 용돈을, 조폭세계는 관할 구역에서 영업세를, 국가폭력에서 전쟁으로 전리품을 뜯어내는 것을 보면 폭력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

이들이 권력을 가지면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서 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두려워서 오히려 더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의 재미를 맛보려고 할 거야.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하고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2차 대전을 일으켰어. 그리고 이런 동기를 가진 부자라면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거나 더 못살게 만들려고 할 수 있고. 삼성 그룹 회장 이건희는 백혈병 산재환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아직도 노조를 만들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어. 그런데 그들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들의 능력에 대하여 자아도취에 가까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거야.

이런 경우에 우리들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그들이 그러지 못하도록 대항해야 한단다. 그러려면 약자들끼리 함께 뭉쳐서 힘을 모아야겠지. 힘을 어떻게 모아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 건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상황에 맞게 이 연대의 원칙을 응용하는 거야. 만약에 우리가 약자나 소수자의 괴로움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서야만 우리의 연대의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하버지는 젊은 시절에 사학 재단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선생님들과 공감과 연대로 투쟁하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하버지 자신이 지혜로워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커다란 성숙을 경험했었단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력이 나중에 우리가 힘의 우위에 섰을 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지. 결국 그들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는 그들이 미워서 파괴시켜 없애버리려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고 억압하지 못하도록 힘을 모아 투쟁한 거니까 사실 우리가 미워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였어. 어떻든 사람이 미워서 불행해지지는 말자는 게 하버지의 생각이야. 그리고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미워서 해코지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하버지의 용서야. 그렇게 맘먹으면 좀 편안해지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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