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흄을 위한 새로운 이름을

- 유일환(수유너머N 회원)

이번 주 위클리에서는 오랜만에 사상가 특집을 꾸며봤습니다. 데이비드 흄을 주제로 해서 세 편의 글을 실었는데요, 이 글들은 수유너머N의 <흄세미나>팀이 세미나를 마무리하면서 그 결과물로 내놓은 것들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흔히 로크, 버클리와 더불어 경험론자이자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로크처럼 경험적 지식에서 시작했기에 경험론자이며, 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했기에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의심(회의)해도 너무 의심했습니다. 가령, 로크는 합리론의 보편적 진리를 비판하면서 경험에서 인식의 근거를 찾았지만 객관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흄은 의심을 더 멀리 밀고나가 경험현상에는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은 어느 것에 관해서도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는 거죠. 따라서 흄에게는 인과법칙도 그저 습관일 뿐 객관적이거나 학문적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로써 근대철학의 토대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나게 되며, 근대철학은 칸트라는 구세주를 요청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흄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론적인 지식일 겁니다.

그런데 박준영은 <흄의 철학>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경험론자와 회의주의자라는 수식어 때문에 감춰져 있던 흄의 새로운 정체를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유물론자로서의 흄을 말입니다. 어째서 흄이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일까요? 박준영은 흄이 정신을 이해함에 있어 물질성의 기반을 중시하며, 인간주체를 단순히 형상을 받아들이는 질료로서의 기체(hypokeimenon)가 아니라 일정하게 운동하는 계열로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기초해서 흄을 이해해보면, 흄의 철학을 소박한 실재론과 물리주의를 넘어선 ‘배치의 유물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흄이 유물론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 순간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험론자니 회의주의자니 하는 이름으로 흄을 설명하는 것이 흄이란 사상가 자신에게는 꽤나 불공평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수식어는 흄의 사상 자체를 드러낸다기보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그것도 흄의 시대 이후 철학사에서 주류적 위치를 차지했던 사상가들의 철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으니까요. 어쩌면 흄이 경험론자이거나 회의주의자임으로써 가장 이득을 본건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한 칸트 혹은 독일 관념론자가 아닐까요.

박준영의 글 외에도 이번 사상가 특집에서 다루는 글들은 흄의 철학이나 그의 사상이 집적되어 있는 개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영진은 <사람은 울면서 웃는다>에서 영화와 문학작품을 통해 흄의 공감 개념을 논합니다. 그는 공감의 편파성이나 사라진 공감의 능력에 대해 고민하면서 공감의 능력을 도덕으로 발명할 것을 고민합니다. 한편, 산책자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게 나누어질 수 없음에 대하여>에서 흄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 즉 시간과 공간의 개념의 나누어질 수 없음을 사유합니다.

세미나 하나를 오랫동안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흄세미나>팀은 2년 넘게 세미나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2010년 <칸트세미나>로 시작해서 3대 비판서를 다 읽고, 이후 <흄세미나>로 업종을 변경한 뒤 작년 12월 말 마지막 에세이 발표를 끝으로 <흄세미나>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들뢰즈 VS 철학자들>이란 부제로 새롭게 철학사 세미나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흄세미나>팀의 계속된 여정에 응원을 보냅니다. 무한도전만큼 오래 해먹는(?) 세미나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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