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의 공공공(公共空)

덕수궁에서 마주친 현대미술, 망각되는 근대를 상기시키다

- 이솔

좋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하고 2012년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덕수궁 미술관과 고궁 곳곳에 설치된 전시 <덕수궁프로젝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언론에서도 올해 최고의 전시 몇 개를 재조명하면서 당연히 이 전시를 꼽았고 나 또한 이 전시를 그중 하나로 선택하고 싶다. 특히 미술관 전시와 함께 기획된 야회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색색으로 단풍진 덕수궁 그 자체를 방문하는 것도 만족스러운데, 궁 안의 건물들과 구석구석에 설치된 류한길, 서도호, 이수경, 김영석, 하지훈, 정서영 등의 현대 미술작가의 작품이 덕수궁이란 장소를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볼 기회를 제공했다.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평상시 출입이 금지된 함녕전, 경효전 등의 고(古)건물에도 작품이 설치되어서 전시 중 신발을 벗고 입장이 가능해져서, 평소 같으면 이 건물들을 멀리서 빤히 지켜만 봐야하는 관객들이 조금 더 다양하고 신체적이고 선험적인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실로 덕수궁 전체를 다시 살아나게 (activate)하는 전시였다. 이 전시에 대한 수많은 블로그 포스팅, 풍문으로 전해들은 긍정적인 관객평과 담당 큐레이터가 어떤 미술인상(賞)까지 수상하였다는 사실을 참고할 때 <덕수궁프로젝트>는 미술인 비(非)미술인 할 것 없이 일종의 장소특수성에서 오는 즐거움과 슬픔의 카타르시르를 함께 준 보기 드문 현대미술전시였다. 나는 이 카타르시스에 관한 얘기를 조금 더 하고 싶다.

오늘날 대중문화현상에 맞대어 생각해 볼 때, 이 전시 관람의 즐거움을 최근 급부상한 드라마 ‘장르’인 타임슬립(time slip)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억지일까. 현시점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드라마와 조선 시대 등의 전근대 과거 시점의 인물과 역사를 맞물리는, 다시 말해서 현대와 전근대를 병치시키면서 포개놓는 타임슬립 드라마는 2012년 한해 공중파방송과 유명 케이블 상에서 성행했다. 그 예로 <인현왕후의 남자>, <옥탑방 왕세자>, <닥터 진>과 최근 <신의>까지 꼽을 수 있다.1모든 인물과 설정을 전근대 과거에 맞추고, 배우분장이나 의상까지 고증에 근거를 둔 정통사극과는 달리 이러한 퓨전사극은 현대의 시점에서 전근대 역사와 시대관을 다시 보게끔 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성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다. 이런 드라마에서는 현대의 인물이 조선 시대 가치관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발언하는 장면이 많은데, 이는 시청자의 몰입도와 공감과 흥미를 돋운다.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내에 설립된 유치원과 맞닿아 있는 석어당(昔御堂) 한 편에 불현듯 출현한 것 같은 이수경의 <눈물> 또한 비슷한 관람을 유도한다. <눈물>은 수백 개의 LED를 조합해서 사람크기로 제작한 거대한 자체발광 설치물인데, 석어당이라는 조선 시대 왕궁 실내분위기와 LED 라는 현대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탄생한 눈물의 시각적 부조합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현재’라는 관람 시점과 프레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고 여기서 연출된 슬픈 분위기를 느끼며 ‘눈물’ 흘리라는 큐(cue)를 던진다.

미술사의 시점에서도 <덕수궁 프로젝트> 야외 전시는 1990년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작가와 기관의 협업 방식의 연장선에 서는데, 미술관이나 역사박물관이 초청작가에게 그 기관의 소장품과 장소특수성을 재해석하는 미술실천을 커미션하는 시스템이다. 그 대표적 예로서 성공적이었던 프레드 윌슨 (Fred Wilson) 의 <Mining the Museum> (미술관 발굴하기,1992)를 들 수 있다. 이때 윌슨은 미국 메릴랜드역사박물관의 200년도 더 된 일상생활물건으로 이루어진 컬렉션에서 미국 남부흑인노예역사의 유물과 백인상류층의 일상생활물품을 병치시키면서 관객들에게 비판적인 역사적 시점을 요구한다. 윌슨의 설치는 비평적 관심과 기관의 환대를 받고 일종의 ‘작가의 미술관 재해석하기’라는 장르로 발전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 예로 2013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바논 출신 작가 왈리드 라드 (Walid Raad)가 최근 신축한 이슬람 미술전시관에 초청되어 비슷한 시도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미술실천은 종종 ‘현대미술의 인류학 따라잡기’라는 비판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작가가 미술관과 협업을 하면서 주로 컬렉션이 반영하는 그 장소의 정치 사회 문화적 의미와 그곳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공동체와 역사에 대한 사유를 풀어낸다.2그러면 대거의 한국 현대미술작가들은 덕수궁이란 장소와 이곳의 역사적 공동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재해석하였을까?

석어당의 다른 한편에는 한복디자이너이며 컬렉터인 김영석이 개화기 시대의 가구와 공예품으로 방을 채우는 것 이외에 덕혜옹주의 어렸을 적 사진 몇 장을 빔프로젝트로 쏜다. 현대기술인 프로젝션을 사용해서 마치 덕혜옹주가 점점 커가는 것 같이 이미지들을 연결, 투영했기에 덕혜옹주가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하면서도 유령같이 존재하는 느낌을 준다. 멸망하는 조선왕국의 왕조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설치는 이 뿐이 아니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한때 집전하고 그 후 1919년초 갑작스레 서거하기 전까지 침실로 썼던 건물이며, 서도호는 이곳을 예전 상태로 복구하면서 작업을 시작한다. 창틀의 먼지를 제거하고 벽을 도배해서 그 시대의 방식을 사용해 함녕전을 복구하는 일은 오늘날 복원기술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아 어려웠다며 전시도록이 기록한다. 또 이는 “마치 고종이 살았던 그 시대의 ‘온기’를 되살리기라도 하듯” 행해진 작업활동이라 적는데, 작가는 고종이 평소 잠자리에 들 때 ‘보료 3채’를 깔았다는 궁녀들의 증언에 근거해 깨끗하게 정돈된 고종의 침실 바닥에 3채의 요를 재구성, 설치한다. 가운데 요 한 채는 고종 자신을 위했고, 가장자리 두 채는 고종이 사랑했지만 먼저 세상을 뜬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 설치 이외에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모니터에 상영되는 정연두의 퍼포먼스인데, 이때 퍼포머는 마치 고종의 외로운 밤을 재연하는 듯 가운데에 누워 시적인 몸짓을 취한다.

이렇게 덕수궁이라는 전근대 봉건왕조의 아지트를 왕족의 비극적이었던 사생활과 ‘운명’을 통해서만 해석하는 것이 현대미술 역량의 전부일까? 건물 하나하나를 방문하면서 전시의 완성도에 심취해 애도의 감정에 몰입하다가도 나는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실 몇몇 작품은 마치 개화기와 일제하에 이루어진 근대화에 대한 사고를 의식적으로, 아니면 의지적으로, 없애버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이는 이미 90년대부터 문화연구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 근대 초기의 문화사회적 격변기를 신문 잡지 등의 대중 매체를 통한 근대적 시민 주체성의 탄생과 연결지어 다시 조명한 학자들의 노력에 역행하는 듯하다. 주로 국문학자들이 앞장서 토대를 쌓아놓은 식민지시대 문화사에 대한 연구는 기존에 팽배했던 수탈과 저항이라는 이중법적 논의를 벗어나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라는 인식을 상기 시키면서, 식민지 근대라는 문제의식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자 노력했다. 3이런 지식사를 뒤돌아볼 때 2012년 가을 덕수궁의 현대미술작품 몇 작품은 마치 조선왕조 멸망사의 한 맺힘을 강조하면서 전형적인 수탈-저항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도식화했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를 남기며, 오늘날 관객에게 한민족 수탈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수렴하는 집단 정체성으로 내몰 수 있는 위험성 또한 내포한다.

물론 여기서 나는 현대미술전시가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학계 내에서 대중문화, 풍속, 일상, 표상체제, 문화 수용자, 젠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된 식민지시대 문화사 연구의 복잡한 성격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현대미술의 개념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감각적인 태도가 오늘날 추구되어야 하는 지식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런 비평적 관점에서 <덕수궁 프로젝트>에서 느낀 묘연의 카타르시스가 근대를 ‘슬픔’으로 인식하는 데서 발생한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신파적이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으로 다가온, 또 그래서 소위 ‘수탈의 민족’과는 다른 종류의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상황 설정을 하는 설치작품 하나에 관한 얘기로 이 글을 마무리 짓는다.

덕수궁 정관헌 / 정서영 <마음 속으로 정해라> 2012 Photo by Sohl Lee

덕수궁 정관헌 / 정서영 <마음 속으로 정해라> 2012 Photo by Sohl Lee

이번 전시 야외설치에 쓰인 건축물 가운데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인 정관헌(靜觀軒)의 발코니에 90년대에 제작됐을 법한 소위 ‘사장실’ 가구들이 덩그러니 서 있다. 정서영 작가의 설치작업 <마음 속으로 정해라> 이다. 1900년경 러시아인 건축가 세레진 사바친 (Afanasij Seredin Sabatin)가 설계한 정관헌은 옆의 석조관이나 미술관 건물과는 달리 퓨전 양식을 따르는 데, 나무, 벽돌, 콘크리트, 철재, 타일 등의 재료를 혼성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마치 동양과 서양의 건축적 도상과 기표를 자유자재로 포획(mesh)해서 기존의 의미 외의 제3의 의미 만들기를 시도한 것 같다. 관객들은 동양의 정자의 요인을 담고 있는 반(半)실내, 반(半)야외 발코니에 진입할 수 있는데, 이곳에 배치된 가구들은 원체 정관헌 소속이라 한다. 고종이 정관헌을 연유장소로 썼다는 설을 근거로 삼아 덕수궁 관리소 나름 조성한 인테리어인 듯싶은데, 이 가구들이 몇 년도에 어떻게 정관헌에 입궁한 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정서영은 이 출처 모호한 가구들을 일렬로 재배치하고 그 줄 한가운데 최근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시그니쳐격인 육각형 거울 조각을 끼어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이 거울은 양면거울로서 좌우 어느 쪽에서 봐도 거울 앞의 정경을 그대로 반영한다.

일상의 오브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조각 및 설치로 90년대부터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정서영 작가는 인식론의 변화를 추구하는 작품을 지속해왔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명할 때, 사물 안에 “설정된 관계, 유형들의 움직임”을 살펴본 후, 기존에 쌓아지고 작용하던 의미의 “연결고리를 흐트러뜨리고” 재조합하는 미술실천이라고 한다. 4이렇게 달라진 “입장”을 추구하게 된 사물을 관객 개개인이 접할 때에 관객 자신의 “입장” 또한 흐트러지고 불안정해지는데, 정관헌 발코니 설치작품도 비슷한 환경을 제공한다. 5중간에 세워진 양면거울을 중심으로 나열된 가구들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는 않지만, 관객이 거울과 마주치는 위치에—정면이 아닌 비스듬히라도—서 있을 때면 거울에 반사되는 가구와 거울 뒤에 나열된 가구들이 겹쳐지는 시각적 불안정함을 조성한다. 즉, 사물과 이미지의 미끄러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때 “입장”이 교묘해진 사물을 보는 관객 또한 자신의 위치가—혹은 “입장”이—불분명해지는 것을 경험하는데, 이는 거울과의 위치관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의 모양과 위치, 가구 배열방식, 그리고 바깥경관과 그대로 통해있는 정관헌 구조상 거울에 반사되는 나무들 사이로 나 자신의 모습(image)이 익숙하지 않은 리듬을 타면서 실체의 내 앞, 옆, 뒤에 나타나는 것이다. 실체와 이미지의 불연속적 관계는 전시된 사물에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입장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울 속에 보이는 이는 나만이 아니라 정관헌 주위를 맴도는 다른 관객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또한 나와 같이 이미지와 실체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우리는 모두 보행과 출현이 어긋나는 공동체를 이루는 듯했다. 마치 관객들도 작품 옆에서 일종의 ‘사물’이 되면서, 전시 다른 코너에서 슬픔에 뿌리를 둔 민족사의 일원으로 부과된 ‘의미’의 ‘연결고리’를 부스러트리는 작동을 하는 것 같았다. 정관헌에서 발현된 집단 정체성은 100여 년 전 이곳을 거닐던 왕족뿐만 아니라 한반도 구석까지 미쳤을 근대화의 물결에 의해 모호해진 정체성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관헌에서 맛볼 수 있었던 감성의 재발견을 통해 <덕수궁 프로젝트>를 조명하고자 한다. 덕수궁 내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현대미술전으로서 <덕수궁 프로젝트>는 오늘날의 미술이 개화기와 혹은 일제하 정치사와의 대화를 어떻게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이는 계류 기회(missed opportunity)가 아닌 하나의 시금석으로써 그 가치를 지닌다. 덕수궁은 더는 전근대 왕족의 거처가 아닌 근현대 시대의 공원이라는 점도 부각시기고 싶다. 물론 일제통치하 조선왕조의 궁을 공원이나 동물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만, 현실을 직시했을 때 대중적 시설물인 공원을 유희의 장소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일어난 20세기의 첫 대중봉기가 3.1. 운동이라 한다면, 3.1. 운동의 시발점 중 하나가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인 탑골공원이라는 대중의 장소에서 영글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3.1. 운동에 전국적 추동력을 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가 고종의 의문사였고, 고종은 사적인 슬픔을 매일 밤 애도하기 이전에 근대 격변기 국가 생존의 문제를 안고 살아갔던 인물이었다는 것도 상기해보자. 수천 명의 대중이 종로에서 한 독립선언 후 가두행진을 하여 대한문에 도착하기까지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보자. 덕수궁을 더는 슬픔의 역사로만 치부하기보다는 100년 전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새로운 형태를 띤 공동체가 발현할 수 있는 공공의 장소로 재해석하면 어떨까? 물론 2012, 3년의 시대가 호명하는 공동체—그리고 공동체 구성의 언어—는 1919년의 그것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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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히트작품 <백투더퓨처 Back to the Future>시리즈가 그리는 과학의 기술에 기대 제작한 기계장치에 올라타고 의지에 의해 근과거와 근현재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최근 타임슬립 드라마에서는 모연의 힘에 의해 주인공의 의지와 상과없이 마치 운명에 의해 모든것이 결정된다. 물론 1990년대말 2000년대 초 세기말에서도 <시월 애> (1999), <동감> (2000), <번지점프를 타다> (2001) 등 시공간을 초월하는 로맨스가 한국 영화계를 수놓았는데, 2012년 안방을 점령한 공영방송이나 케이블방송에서 선보인 대중적 드라마의 타임슬립은 일종의 ‘퓨전사극’으로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 한반도의 역사를 가로지른다. 주로 이들은 전근대와 현대의 만남을 추구하면서 근대화의 과정을 겪은 식민시대에 대한 망각을 촉진시킨다. []
  2. Hal Foster, “The Artist as Ethnographer”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Cambridge, MA: MIT Press, 1996), 171-204쪽 참조 []
  3. 윤해동 천정환 외 공저, <근대를 다시 읽는다 1,2> 역사비평사, 2006 참고.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Harvard East Asian Monographs, Cambridge, MA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참고. []
  4.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정서영 김현진 공저, 현실문화 2013, 20쪽 []
  5. 위의 책, 14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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