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16)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4-2-3 용서하기

지난번에 법적 판단은 피해를 시장의 교환가치로 환산하여 책임을 지우지만 도덕적인 판단은 피해자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정도로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운다 했어. 그런데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괴로움에도 공감하고 난 뒤에 얼마나 책임을 지울지 용서를 할지 결정하쟀어.

이를테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헤어나려 하겠지. 그래서 수영이 서투른 구조자가 다가가면 그는 구조자가 수영도 못하게 팔다리를 꼭 붙들고 의지하려다가 둘 다 죽을 수도 있어. 만약에 그랬다면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있는 상황에 대하여 법은 자살이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지. 만약에 저승에 법정이 있어서 거기서 수영을 못해서 의지하려다 죽게 만든 사람의 책임을 법으로 따졌다고 하자. 그리고 이 이승에서 비극적인 장면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수영을 못해서 의지하려다 죽게 만든 그 사람의 유죄여부를 물었다고 하자. 두 결과가 같을까 다를까? 홍아야, 이런 경우라면 법적 판단과 도덕적인 판단이 어떻게 다를지 말해줄래.

법으로 따진다면 일부러는 아니지만 어쨌든 수영이 서투른 그 사람의 행동의 결과로 구조자가 죽었으니까 과실치사로 판결이 나지 않을까. 그런데 도덕적인 기준 즉 공감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그는 무죄로 판결이 날 거야. 누구라도 수영을 못하는데 갑자기 물에 빠졌다면 자기도 모르게 아무거나 걸리는 대로 움켜잡고 헤어나려고 허우적거릴 거라고 상상하면서 입장을 바꾼다면 자기도 그랬을 거라고 공감할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수영이 서투른 사람이 한 행동을 잘못한 거라고 정죄할 수가 없었을 거야. 이런 경우라면 정말로 도덕적인 판단이 법적 판단을 뒤집을 수도 있겠네.

하버지도 네 말대로 생각해. 법의 대전제는 모든 인간이 완전히 자율적으로 행동하므로 피해를 입힌 행위는 그 행위 주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야. 그런 관점에서 피해자의 피해 정도에만 초점을 맞춰서 원상회복이나 배상의 책임이나 형량을 따지지. 법적 판단에서 공감 내용을 ‘정상(情狀)’이란 법률용어로 참작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죽게 만든 행위에 대하여 법이 정한 기본적인 책임과 형량을 피해갈 수는 없어.

그러나 우리는 수영이 못하는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그 순간에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자율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한 심정었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어. 도덕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가리지 않고 더 괴로운 사람 쪽에 더 많이 공감하겠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어느 쪽이 더 괴로운지는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그러니까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괴로움에도 공감하고 판단하자는 거야.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장발장이 자율적인 판단을 못해서 빵을 훔친 것이 아니야. 레미제라불을 읽는 독자들은 8명이나 되는 가족이 그 빵으로 연명할 수 있는 이익이 빵가게 주인의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느낄 거야. 그러한 공감을 근거로 삼는 도덕적인 판단으로는 무죄라는 거야.

도덕적인 판단이 괴로움에 대한 공감에 따른다는 건데 왜 그런 거지? 정말 중요한 걸 묻는구나. 괴로움에 대한 공감을 근거로 판단한 도덕적 명제들의 타당성을 묻는 거지? 좋아, 홍아야,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가 언제 괴롭지? 그야 맘대로 안 될 때 괴롭지. 그리고 상처 나거나 병이 났을 때도 괴롭고. 그러면 맘으로 느끼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을 각각 무어라 하니? 감정과 감각? 그래, 그럼 그 두 느낌의 공통점은? 모르겠어. 둘 다 여러 종류의 감정이나 감각이 있지만 결국은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으로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는 거야. 그래, 즐거운 쪽과 괴로운 쪽으로 구분할 수도 있어. 유쾌한 느낌과 불쾌한 느낌으로 갈라놓을 수도 있고.

그런데 무엇이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갈라놓지? 감각 기관에서 수많은 감각세포들로 얻은 정보들은 그 종류의 감각 중추에 보고되지. 그러면 감각중추들이 그 정보를 종합하여 감각된 사물이 몸에 좋은 건지 나쁜 건지를 유쾌나 불쾌로 판단하게 돼. 그래야 감각 대상을 받아들일지 말지 행동을 할 수 있느니까.

이를테면 아주 차겁거나 뜨거운 것에 손을 대면 얼른 손을 떼. 그 느낌을 대뇌에 보고하고 이건 얼음이라 차겁고 저건 끓는 물이라 뜨겁다고 판단하고, 소뇌에 연락하여 운동신경을 조작하여 피하기까지 기다리면 그동안 신체 조직이 벌써 파괴되어 있을 거야. 그래서 척수라는 통각중추에서 일단 이건 매우 나쁜 것이니 얼른 피하라고 불쾌한 감각 즉 통각으로 지시를 내린 후에 대뇌에 보고하여 그 감각 대상을 분석해보는 거야. 이처럼 먼저 감각중추가 유쾌한 느낌과 불쾌한 느낌으로 선명하게 갈라놓는다는 거야. 그리고 감각된 것이 땅콩인지 누나의 노래인지 구린내인지를 분간하는 것은 대뇌의 전두엽의 역할이고.

그리고 감정은 감각으로 받아들인 외부 상황이나 상상으로 떠올린 내부 상황에 대한 심리적인 느낌이래. 네가 두 살 때 하버지가 돋보기안경을 쓰기만 하면 울었단다. 아마 안경을 쓰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일 거야. 또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 상상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공감하게 돼. 그건 주어진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인 반응에 공감하는 거야. 실연당한 사람에게는 사랑하던 그와 함께 누리던 기쁨과 행복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슬픔이라는 불쾌한 느낌으로 나타날 거야.

그럼, 왜 감각이나 감정 중추가 유쾌와 불쾌로 갈라놓는 거야. 생명체는 타고난 가능성과 실현된 현실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래서 생명체는 현실성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본능적인 욕구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능성을 실현하여 보다 더 잘 살려는 자아실현의 욕구도 가지고 있어. 이러한 본래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건에 대한 감각적인 느낌과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느낌은 유쾌한 느낌이고, 이에 반하여 오히려 항상성을 깨뜨리거나 자아실현을 가로막는 감각이나 감정들은 불쾌한 느낌 쪽일 거야. 감각이든 감정이든 우리에게 좋은 것들,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들, 더 잘 살게 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들은 일단 중추신경계가 유쾌한 느낌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허용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 나쁜 것. 결핍으로 욕구를 키우는 것, 더 못살게 하는 것들, 우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들은 불쾌한 느낌으로 금지하는 거고.

그런데 왜 피해자의 불쾌한 상태인 괴로움을 공감하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는 거야. 가해자의 행위로 어떤 피해가 생겼을 때 피해자의 괴로움을 공감한다는 사실은 가해자도 피해자처럼 괴로워진다는 사실을 뜻해. 그래서 가해자가 공감하고 있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를 못살게 했던 행위를 멈추고 잘살게 하는 행위, 즐겁게 하는 행위를 하게 되지. 가해자가 공감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피해자가 잘 사는데 필요한 물건이나 사건으로 잘 살도록 욕구를 채워주어 괴로움을 덜어주는 거야. 그래서 피해자에게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원상회복이나 보상의 책임을 다하게 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안심시키게 돼. 바로 이런 노력들이 회개의 열매들이야. 피해자의 괴로움에 공감하고 회개의 열매로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가해자라면 용서할 수 있잖니.

그렇네. 공감은 확실히 신비한 능력이야. 그렇다면 공감능력이 떨러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공감을 가로막을까? 공감이 사랑 때문에 생긴 거라면 미움 때문에 가로막힐 수도 있겠지. 사랑은 잘 살리려는 노력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잘 살려서 즐겁게 만들려고 그에게 필요한 물건과 사건으로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야. 그러니까 사랑하려면 먼저 그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공감해서 그가 무엇이 충족되고 결핍됐는지 그의 상태를 알아야만 돼. 그래서 사랑의 능력이 공감능력이고 공감의 능력이 사랑의 능력이야. 그런데 그 공감을 가로막는 것은 미움이지. 누군가를 파괴하고 싶고, 못살게 하고 싶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공감을 가로 막아.

공감능력은 새끼와의 공감으로 새끼를 길러야 하는 젖먹이동물의 진화 단계에서부터 변연계와 함께 특히 많이 진화되기 시작했대. 그런데 특히 엄마에게 사랑의 요구가 거절당한 어린 아이는 욕구불만으로 엄마가 미워서 마음 문을 걸어 닫고 엄마와의 소통 즉 공감나누기를 거절한다는 거야. 이렇게 미워하면서 마음 문을 닫고 자라면 다른 사람과도 공감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거야.

그 말씀은 여러 번 들어서 나도 알아. 그런데 혹시 욕심이 공감을 가로막지 않을까. 가로막지. 확실히 공감과 욕심 그리고 공감과 미움은 반비례 관계야. 욕심은 남에게 피해가 생기더라도 자기의 욕구를 채우겠다는 마음이야. 그러면 피해당한 쪽에 미움이 생기지. 욕심은 상대의 미움을 만들어내니까 욕심이 있는 곳에 미움도 있게 마련이야.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여 잘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그와의 공감으로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걸 얻도록 돕고 싶을 거야. 그런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내 욕심을 채우려고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 못살게 하지는 말아야지.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의 공감적인 또는 도덕적인 행동기준이지. 그런데도 남들이야 피해를 보든 말든 나만은 잘 살려는 욕심 때문에 남들의 괴로움에 공감하기를 거부하지. 공감한다면 사회적 자산을 나 혼자 독점하고 독재하고 독선하고 남들을 따돌려서 괴롭힐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욕심에 사로잡혀 공감을 버리고 이기적인 동물로 돌아가려는 잘못을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느냐를 지금 따지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가해자가 이기적인 반사체계와 반사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해서 하버지를 괴롭혔을 때 하버지는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한 적이 없어? 왜 없겠니. 지금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누구냐고 물어도 돼? 그들? 그들은 내가 경험했던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야.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는 종신형으로도 모자라서 몇 번씩 사형당했을 범죄자들도 있었단다. 그리고 범죄자였던 그들을 찬양하는 언론과 그들에게 꼬리를 흔드는 지식인들도 밉고 싫었단다.

그들이 통치기간 내내 거꾸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것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이 힘겨웠단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들은 무식하고 무능한데다 비뚤어져 있어서 한결같이 공감능력이 부족했는데도 권력 의지는 아주 강해서 결국은 권력을 잡게 되지. 그들은 독재하거나 독점하거나 독선하는 것만 유능했어. 우리의 현대사는 한 번도 과거사를 제대로 척결하지 못한 시궁창의 역사였단다.

그리고 또 재벌들을 미워한단다. 그들이 지닌 부는 그들이 생산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이 함께 생산한 거야. 그들은 생산관계와 소유제도를 결정하는 권력과 결탁하여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고 독점해 버렸어. 원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서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사용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해달라고 우리 공동체가 그들을 청지기로 불러 잠깐 맡긴 거야. 그런데 그들은 그 돈으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더 큰 돈을 만들려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독과점을 이용하여 가격을 조작하고 또 그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고위 정치인들과 고위 관리와 판검사들을 뇌물로 부패시켰어. 그러면서 중소기업을 억누르고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걸핏하면 정리해고라 하여 수백 수천 명씩 쫓아냈어. 그들을 미워하며 살자니 어찌 괴롭지 않겠니.

그렇지만 권력자들과 부자들을 그렇게 미워하며 한 평생을 살아온 하버지가 용서를 말할 수 있어? 그렇구나. 그렇지만 하버지는 아무나 무조건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하버지는 가해자들이 어떤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고 누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살펴보자는 거야. 그랬더니 그들은 양 한 마리밖에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도, 장발장처럼 가족이 굶주린 사람도 아니야. 그들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진 부자들이었거나 그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안전하게 살도록 법이라는 이름으로 힘없고 가난한 무식한 사람들을 후미진 구석으로 몰아붙여 못살게 한 권력자들이었어.

우리는 공동체의 모두가 함께 잘 살도록 써달라고 부와 권력이라는 사회적인 자산을 그들에게 맡겼어. 그런데 부자와 권력자가 위임받은 부와 권력에 대한 결정권으로 자기들의 특권을 만들어내고 서로를 지켜주는 동맹을 맺었어. 역사가 보여준 대로 이 배신자들이 특권을 내려놓고 위임해준 뜻대로 모두에게 부와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어 줄 가능성 즉 회개할 가능성은 나뭇가지 끝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만큼이나 힘드니 용서할 수가 없단다.

그렇다고 하버지는 그들을 파괴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야. 우리가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부터 그들과 공존해야 하니까. 청지기들에게 재량을 가지고 보다 나은 선택을 하도록 결정권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청지기가 못된 짓을 하는 것을 아주 막을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나 누가 청지기가 되든지 못된 짓을 크게 많이 못하도록 정치와 경제 사회의 제도적 장치를 바꾸자는 거야.

부패한 부자나 횡포한 권력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을 텐데 하버지처럼 이들을 미워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아 행복하실 날이 언제일지 걱정되네. 아니야, 하버지는 지금 행복하단다. 앞에서 잠깐 살펴봤지만 신약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용서에 대하여 묻는 장면이 나와.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어. 베드로가 최대한 양보해서 일곱 번이면 되겠느냐고 묻지만 사실은 계속 괴롭히는데 계속 용서만 할 수는 없잖느냐고 반문한 거야.

그 때 거기서 살던 민중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기혹한 세금과 십일조라는 종교세를 고리대금으로 쓰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와 부자들의 횡포와 착취라는 3중고에 신음하였어. 아마 베드로도 하버지처럼 민중들의 괴로움에 공감하면서 가해자인 지배계층에 대하여 삭일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예수께 물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하버지도 베드로처럼 용서에 대하여 예수께 배우려고 예수의 대답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어.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셔.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르고 한 말이라면 ‘뉘우치거든’과 ‘잘못했다고 말하면’이 얼마나 진실했겠니. 입에 발린 뻔한 거짓말은 원상회복의 노력도 없었고,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도 없었던 빈껍데기 회개였지. 그런데도 몇 번이 됐든 회개한다고 말만 하면 그 회개의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용서하라는 거야. 그래서 더 분명해지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회개가 용서의 필수조건이라고 들었다는 거야.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회개라는 조건이 없어져.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여기서는 ‘뉘우치거든’이나 ‘잘못했다고 말하면’ 등의 조건이 사라진 무조건 용서를 말하고 있어.

아마 예수는 용서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남겼겠지만 이를 들은 제자들이 용서의 조건인 회개에 대하여 달리 들었을 거야. 그렇지 하버지? 그래서 대체 예수의 용서에는 회개라는 조건이 있을까 없을까. 있다면 어떤 회개조건일까 궁금해지네.

비슷한 내용인데 누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이 훨씬 더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의 학자들의 공통된 연구 결과를 하버지는 많이 따르는 편이야. 그래서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자기네 예수공동체의 엄격한 규율로 삼으려고 터무니없이 과장한 게 많아. 아마도 예수가 누가 쪽처럼 회개를 조건으로 용서하라고 가르쳤을 거야. 예수께서 당시의 지배계층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격렬한 증오를 쏟아낸 것을 봐도 되풀이하여 잘못한 아무나 무조건 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아.

하버지에게는 아무것도 따져보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은 바보나 하는 소리처럼 들려. 그래서 어쩌면 하버지처럼 가해자의 처지와 범행 동기나 의도에 따라 무조건 용서를 할 수도 있고 조건부용서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지도 모르지. 그런데 제자들이 상황에 따라 적용하지 못하고 성급히게 일반화 해버린 것인지도 몰라.

어떻든 용서가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잖아. 용서하고서도 무언가 마음에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어서 그걸 덮으려고 애쓰느니보다는 우러나오는 그대로 미워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옳은 말이야. 용서가 안 되는데 억지로 하려한다고 될 리 없지. 그래서 가해자의 처지나 범행 동기나 의도를 알아보자는 거야. 그러면 미움을 가라앉히는 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공감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돕고 싶을 수도 있어. 그러나 양 아흔 아홉 마리 가진 사함이 한 마리 가진 남의 것을 빼앗는 것처럼 남을 못살게 하면서까지 자기만 더 잘 살려고 했다면 용서가 안 되겠지. 그런 경우에 미워하는 것이 속이 더 편하다면 그래야지.

여기서 말하는 그 미움은 하는 짓이 밉다는 게 아니야. 같은 하늘 밑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미움, 가해자를 파괴시켜버리고 싶은 미움, 기회만 주어진다면 반드시 보복하고 싶은 미움,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고 싶은 미움이야. 홍아야, 이러한 미움을 가질 때와 버릴 때 정말로 어느 쪽이 속이 더 편할지는 알고 가자. 어느 쪽이 마음의 평안도 깨지고, 몸의 건강도 해치고, 삶의 리듬도 뒤엉켜서 손해가 더 큰지 알고 가자. 어느 쪽이 나의 몸과 마음과 삶을 끝없이 소모시켜서 피곤하고 허약하게 만들었는지 과거의 우리 경험을 되돌아보자. 어느 쪽이 가해자가 회개하여 원상회복이나 배상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도 생각해보자. 원망과 미움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피해자가 진심으로 평안과 행복을 얻고 싶다면 버릴 수밖에 없단다.

하버지, 계속해서 괴롭히는 자를 용서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용서가 안 되면 가해자의 나쁜 행위를 용서하지 마. 그리고 나쁜 짓을 했다고 또는 하고 있다고 가해자의 행위를 큰소리로 널리 알려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자. 아니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자. 그리고 물론 너도 마찬가지로 피해를 당하고 있는 약자나 소수자의 목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풀어주려고 애써야지. 그러면서 잘못할 수 있게 된 제도적 장치를 바꾸는 데에 네 힘을 보태자.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가해자가 미워서 해코지 하고 싶은 마음만은 갖지 말자. 만약 벌을 주려는 의도 즉 보복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마음의 평안을 지킬 수 있어.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싸우려고 공감을 버리고 악마가 되어야만 이기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들을 파괴시켜 버리려는 미움으로 싸우면 공감할 수 있는 우리가 먼저 괴로워져서 결코 이길 수가 없단다. 우리끼리는 공감으로 연대하면서 가해자에게도 공감을 요구하며 그를 공감할 수 있는 우리 편을 만들어야 돼. 그러나 그가 완고하다면 쓸데없이 우리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체념하되 그러나 미워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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