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황홀한 공존의 윤리 <라이프 오브 파이>

- 황진미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의 소설<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안 감독의 영화이다. 227일간 태평양을 표류한 소년의 생존기를 압도적인 스펙터클의 화면에 담아 낸 3D영화이자, 영화전체가 비유로 읽히는 종교적 영감이 가득한 작품이다. 남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소년의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미국에 팔 동물 여러 마리와 함께 승선한다. 그러나 마닐라 해역에서 배가 난파되고, 소년만 구조보트에 던져진다. 구조보트엔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오랑우탄이 타고 있었다. 얼룩말을 뜯어먹는 하이에나와 이를 저지하는 오랑우탄 간의 유혈참극이 벌어지고, 보트 아래에 숨어있던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결국 보트에는 호랑이와 소년만 남게 된다. 발밑은 상어가 들끓는 망망대해요, 보트 위엔 언제든 소년을 먹어치울 호랑이라니. 과연 소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는 마치 ‘병속의 새를 꺼내라’ 같은 선문답의 난제를 던져놓고, 그 답을 하나씩 보여준다. 소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그가 수영과 동물의 본성에 능통한 덕분이다. 영화는 소년의 이름을 수영장에 땄다는 사연과 소년의 아버지가 동물의 본성을 냉혹하게 각인시켜주었던 일화를 보여준다. 이성을 중시했던 아버지 덕분에 소년은 동물을 낭만화하지도 의인화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바라보며 생존을 모색하게 되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서바이벌 모험극으로 <정글의 법칙>이나 <캐스트 어웨이>를 볼 때와 마찬가지의 재미를 선사한다. 즉 자연의 거대함과 이에 맞서 생존의 기술들을 터득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 맹수와의 공존이라는 특별한 설정이 재미를 배가한다. 그러나 소년의 생존비법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공존의 기술 익히기’이다. 소년이 호랑이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호랑이가 굶어서도 안 된다. 굶주린 호랑이는 소년을 먹어치울 것이다. 소년은 구명조끼로 뗏목을 만들어 생존의 거리를 유지한 채, 생선을 잡아 호랑이를 먹이고 배 멀미를 이용해 조련해나간다. 그는 호랑이의 먹잇감이자 관리자이다. 처음 소년에게 호랑이는 저놈만 없어도 살 것 같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호랑이와의 적대적 긴장관계와 그를 돌보는 책임감은 오히려 소년이 긴 표류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호랑이는 소년에게 유일한 정서적 끈이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배구공 따위에게 마음을 두었던 것을 떠올리면 고립된 인간에게 타자와의 유대가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다. 호랑이는 일방적 대상인 사물도 아니고, 길들이기 쉬운 애완견도 아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호랑이의 타자성을 탈색하지 않는다. 영화는 생생히 살아있으며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는 ‘타자와의 공존과 공생’이라는 화두를 태평양의 비경과 함께 전한다. 소년이 살아남은 마지막 이유는 종교적 심성 덕분이다. 소년은 힌두교인이자 기독교인이고 무슬림이다. 종교내전까지 겪은 인도에서 세 종교를 동시에 믿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소년에게 종교는 우주에 가득한 신성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그가 본명 대신 쓰는 약자 파이는 숫자가 무한히 펼쳐지는 원주율이다. 그는 입속에 전우주가 담기는 무한소와 무한대의 상상을 통해 허무와 나태를 견디는 심성을 얻었다. 그가 안락한 죽음을 선사하는 해초 섬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영적 건강함 때문이리라. 죽음직전 마침내 멕시코 만에 닿은 소년은 경위를 묻는 조사관에게 표류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못한다. 동일한 이야기에서 동물을 사람으로 치환하여 들려주니 그들은 믿는다. 파이는 두 가지 판본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다. 그리고는 “신을 믿는 것도 그와 같다”고 덧붙인다. 알듯 말듯 한 후기를 통해, 영화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우화이자 잠언임을 암시한다. 어떠한 철학적 사변도 없는 간결한 모험담으로, 영화는 생존의 기술과 공존의 윤리와 영적 각성을 동시에 일깨운다. 황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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