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기업’ 정책만큼 우리 편인지 저들 편인지 헷갈리는 정책도 없을지 싶다. 속칭 진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한결 같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치유할 주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동시에 시민사회를 돈으로 포섭해서 상업화 시킨다는 명확한 한계를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사회적 기업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라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리스크를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통치 테크놀로지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이에 대한 근거는 신자유주의 유형 중 하나인 독일 질서자유주의를 통해 잘 드러난다.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정치적 조절을 통해 사회를 유기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에 있다. 즉, 사회 자체에 개입해서 사회의 모든 단위, 그것이 개인이나 가족이든 아니면 이웃공동체 같은 지역사회이든 간에, 이 모두를 기업체로 가정하고 사회가 경제의 이름 안에서 통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사회체 내부에 기업의 형식을 파급하고, 기업화된 주체를 주조하고자 하는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은 사회적 기업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회적 기업 정책은 시민조직들이 공공성의 기치 아래 자발적으로 펼쳐오던 활동들을 기업의 형태로 포섭하는 역할을 한다. 즉, 사회적 기업을 통해 시민조직을 기업의 형식으로 변환시키고, 시민조직의 구성원을 기업화된 주체로 주조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독일 질사자유주의가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자율화시킴으로써 시민사회가 자기 스스로 책임을 부여받고 자신의 문제를 관리하게끔 하듯이 사회적 기업을 통해 시민조직이 자율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관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업 정책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기업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사회적 기업을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의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적 기업이 시민사회영역에 일반적인 기업 문화와 기업 담론을 확산시킴으로써 시민조직의 구성원들을 기업가적 주체로 주조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시민조직이 사회적 기업으로 되면 구성원들은 곧장 기업가적 주체가 되고, 그 단체의 문화는 일반적인 기업 문화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달 사회적 기업가 <장애인극단 판>의 좌동엽 대표를 인터뷰했다.
1. 시민조직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Q. <장애인극단 판>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A: <장애인극단 판>은 장애인 문화예술활동 단체이다. 처음에는 장애인 극단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애초에 연극을 해야겠다는 기획을 가지고 극단을 꾸린 건 아니다. 다만 전에 노들 야학 교사로 있을 때, 중증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이 고민이 극단을 만들게 했다.
보통 장애인들이 야학을 졸업하면 대개 센터나 자립공장 같은 곳에 들어가는데, 실제로 그런 건 중증장애인 보다는 행정능력이 가능하고, 몸을 쓸 수 있는 장애인들이 주로 한다. 중증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연극을 떠올리게 됐다. 생각해보니 연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노들야학) 학생들도 좋아했고, 또 나름 의미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얼마간의 준비과정을 거쳐서 2008년도에 장애인 극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2010년에 사회적 기업이 되었다. 중간에 사업을 확장하면서 카페 <별꼴>, 로스팅 사업, 장애인 문화예술 웹진 <비마이너>를 같이 하고 있다.
Q. 처음에는 활동가 단체(일종의 시민조직)였다가 2010년에 사회적 기업이 되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A. 장애인들이 단순히 연극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일정정도의 소득을 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극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을 것을 하면서 생활비나 활동비까지 받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설정하니 재정적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사회적 기업을 신청하게 됐고, 노동부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사회적 기업을 통해서 본래 <판>이 가지고 있는 목표를 더 확장시키고 싶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소통하기를 바란 거다. 연극도 그렇지 않나? 극을 통해서 무대에 있는 장애인과 이를 바라보는 관객이 소통을 한다. 이 소통이 중요한 건, 일단 사람들이 장애인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걸 안다는 점이고, 또 연극을 통해서 그게 내용이 됐든 배우의 연기가 됐든 어쨌든 이런 요소들을 통해 장애인과 만나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 많이 만나고 소통하기 위해선 또 다른 공간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장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걸 다룰 수 있는 웹진 <비마이너>와 장애인들이 만나서 얘기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는 문화공간 카페 <별꼴>로 사업을 확장하게 됐다.
2. 사회적 기업의 독특한 문화; 활동가 단체와 일반 기업의 ‘사이’
Q. 사회적 기업이 된 후, <판>의 성격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우선, 고용인과의 관계는 어떤가?
A. 판에 속한 고용인은 다 합치면 20명이 넘는다. 그 중에서 고용돼서 들어온 분들이 있고, 원래 활동가로 있던 분들이 있다. 이 부분이 조금 복잡하다. 우리는 활동가 단체도 아니고 일반 직장도 아니라서 좀 어중간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사회적 기업 형태가 아니었을 때는 그냥 하나의 활동가 단체였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이 되고 나니 일정 정도 기업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있게 됐다. 노동부에서 요구하는 것도 그렇고, 또 단지 활동가의 틀로써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고용관계를 명확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고, 책임져야할 부분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초기 활동가로 결합한 이들과 채용을 통해 고용된 이들 이 공존하는 형태를 띠게 됐다.
Q. 그러면 초기 활동가로 결합했던 사람과 채용된 사람 사이에 갈등이나 마찰은 없었나?
A. 이런 구분이 우리에게 더 용이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정리된 것이기 때문에 따로 마찰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 고용관계면 의무가 이는 대신 권리가 있는 거고, 활동가는 약간 자율성이 있는 대신 책임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고용관계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주말에 일하면 더 쉬게 하거나 특별한 보상이 있어야 하지만, 활동가들은 다르다. 활동가들은 주말이라고 해도 필요하다면 일을 해야 하는 게 맞다. 대신 평상시 출퇴근이나 업무는 자유롭게 하는 걸 존중해준다. 그런데 이런 것을 막 일부러 나누는 건 아니다. 다들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고용인이건 활동가이건 모두 팀장 아래 직원에 속해 있다. 따라서 ‘고용인 대 활동가’ 이런 식으로 서로 대립적인 인식이나 문화가 만들어지고 그러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 규모가 크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Q. 고용인과의 관계가 특이하다. 관계가 특이한 만큼 일반 기업과 다른 문화를 갖고 있을 것 같다. <판>이라는 사회적 기업의 문화는 어떤가?
A. 그게 애매한 게. 수평적이기도 하면서 수직적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자유롭고,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기업적으로 돌아가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도 관계성은 일반기업하고도 완전히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공동체성이라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관계성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리고 우리가 힘들다고 누구를 구조조정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합심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를 갖는다. 임금문제와 같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물론 일반 기업도 문제가 발생하면, 노사가 합의해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공동의 목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일반 기업하고는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안 좋은 문제들… 사회적 기업은 대다수 저임금 구조를 피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기서 같이 일하고 있는 것은 단체목적이나 이런 의미 때문에 계속 살아남는 거지 기업인데 이렇게 임금을 주면 남을 사람 없다고 얘기를 한다. 단체 비전이 일반기업과 차이나는 부분이 있고, 관계성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자유롭고, 어떤 면에서는 재정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니까 기업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관계성’이라 측면에서는 일반 기업과 완전히 다른 것 같다. 물론 일반 기업도 위기가 발생하면 노사가 합의해서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합심하기도 하지만, 우리(사회적 기업)가 말하는 공동체적 유대는 그것과 다르다. 우리는 무엇보다 재정이 힘들다고 누구를 구조조정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합심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통분담이 사회적 기업 대다수가 저임금 구조를 피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기서 같이 일하고 있다. 사람들이 남는 건 전적으로 단체목적이나 의미 때문이다. 다들 만일 일반 기업인데 이렇게 임금을 주면 남을 사람 없다고 얘기한다.
Q. 고용인들 간의 관계성을 지적하니, 사회적 기업의 문화 관련 연구 중에 구성원들을 가리켜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는 연구결과가 생각난다. <판>도 그러한가?
A.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일반 기업도 공동체성을 강요하면서 희생과 헌신을 강요할 때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나. 같이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공동체라는 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거지 인위적으로 공동체 강조하면서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장애인 관련 분야에서는 ‘장애인 한 가족’처럼 가족이나 공동체라는 말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것에 거부감 있다. 이런 왜곡된 사용이 많다보니까 ‘공동체’나 ‘우리’라는 말을 피하게 된다. 그래서 앞서 굳이 ‘관계성’이라는 말을 사용한 거다.
Q. 그러면 반대로 대표에 대한 호칭은 어떠한가? 고용인들은 대표를 뭐라고 부르나?
A. ‘동엽씨’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누가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걸 너무 싫어했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더라. 사회적 기업에는 활동가로는 책임질 수 없는 구조가 있다. 노동부가 요구하는 사회적 기업 틀 형태를 갖춰야 하는데, 특히 출퇴근 문제라든지 또 어떤 일을 해야 되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문제가 계속 반복된 다든지 그런 경향이 있다. 해서 고용관계를 확실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정리하다보니 자연히 호칭의 문제도 발생하게 됐다. 딱히 처음부터 강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호칭에 대해서 문의하면 ‘대표’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지금은 1/3 정도는 자유롭게 부르고 나머지는 ‘대표’라고 부르는 것 같다. 호칭이 통일되어 있지는 않은데, 나는 오히려 이런 다양한 관계가 좋은 것 같다. 누군가 부담스러워서 대표라고 부르기 싫다면 강요한 적은 없다.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게 부르는 게 좋고, 오히려 호칭이 혼재되어 있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Q. 비영리를 추구한다는 점은 사회적 기업을 일반 기업과 가장 구별되게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기업으로서 <판>이 지향하는 목표가 듣고 싶다.
A. 먼저, <판>은 장애인들이 문화예술활동으로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왜 하필 문화예술이냐 하면, 문화야말로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가 가능 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중증장애인들은 문화 영역 외에는 사회에서 다 경쟁구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장애인들이 하는 걸 다 쫓아 해야 하니까. 그런데 문화의 영역에서 감수성이나 표현 능력에서는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 차이가 적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표현 능력의 면에서는 장애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게 더 다양한 면도 있다. 또한 장애인들이 이런 문화예술 활동을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또 열심히 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경증 장애인들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은 조금 더 많을 수 있지만, 중증장애인에게 열려있는 것은 거의 없다. 노동시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집 안에만 있어야 되는, 아니면 기초수급권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장애인들이 선택하거나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문화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확산시키는 것이 우리 단체 비전이 있다. 따라서 <판>이 지향하는 목표는 장애인 문화예술활동을 확산시키는 것이고, 그런 것을 통해서 장애인 문화예술에 대해 사회가 새롭게 조명하여, 멀지 않은 기간 내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나 장애인들이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자립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장애인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거 밖에 없는 것 같다.
3. 사회적 기업을 위협하는 것들; 정부지원금과 사회적 기업의 변질
Q. 확장된 사업까지 합쳐서 <판>의 재정 규모나 구조는 어떠한가?.
A. 4억 정도 규모다. 그 중에서 후원금의 비중은 크지 않고, 대부분이 정부 보조금이나 민간단체의 기금, 혹은 기획에 응모해 선정 받은 기금이라고 보면 된다.
Q. 지금 <판>이 하고 있는 사업 중에 카페 <별꼴>은 수익이 나지 않아 상황이 나쁘다고 들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수익이 안 나는 부문이 있으면 그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나?
A. 카페를 통해서 수익을 막 내고 싶은 부문은 없다. 너무 큰 타격만 안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써는 조금 많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가 않기 때문인데, 작년 상반기에도 대부분의 적자는 다 카페에서 났다. 사실 극단의 다른 부문들은 투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아서 적자나는 구조가 아닌데, 투자비용이 큰 카페는 그게 다 손실과 적자로 나타나니까 조금 타격이 있다.
그러나 일정정도 부담이 되더라도 카페를 접거나 인력을 감축할 생각은 없다. 또 애초에 영리사업을 목적으로 카페를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적자가 났다고 정리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카페가 좀 길게 갈 수 있는 자립적인 구조를 만들고 싶다. 이번 여름이면 카페 <별꼴>의 계약기간이 끝나는데, 지금 공간을 유지하는 건 조금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카페 매니저들하고 이런 생각을 공유한 상태이다. 만일 공간을 옮겨서라도 카페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면, 다시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보려고 한다.
Q. 사회적 기업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정부 지원금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시민사회가 돈으로 포섭돼서 상업화, 기업화 된다는 논리인데, 직접 기업을 운영하면서 이런 고충이 있었나?
A. 나도 사회적 기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단체 성격이 변질되는 것은 아닌지, 이런 걱정을 많이 했다. 실제로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을 받다보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사업 형태를 바꿀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 때문에 단체 성격이 변질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다. 생존의 문제 때매 많은 단체들이 애초의 목표를 버리고 영리기업으로 단체 성격을 바꾼다. 애초에 기획했던 공공적인 목표를 잃고 수익 구조에 매몰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기업은 인권비 지원이 종료되는 4년차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일반 기업 형태로 가든지 아니면 공공성을 단보한 단체로 남든지. 사회적 기업도 제조업과 제조업이 아닌 부문이 크게 나뉘는데, 처음부터 상품 판매를 했던 사회적 기업은 대개 기업화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거기는 재끼고, 문제가 되는 건 <판>처럼 문화예술 영역이나 비영리목적으로 출발한데다. 이런 단체는 뭔가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게 된다. 가령 노리단이라는 문화예술 단체가 그랬다. 결국 거기는 둘로 나눠졌다. 기업 가치를 추구하는 멤버들과 그걸 거부하고 자기들이 처음 목표로 했던 문화예술 단체로써 남으려는 멤버들로. 쉽게 말하자면, 기업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은 돈을 많이 주는데 위주로 공연을 하려고 하고, 반대로 애초의 비영리적 목표를 지키려는 이들은 돈은 안 되지만 의미 있는 곳에 가서 활동하려고 하면서 갈등이 증폭된 것이다.
Q. 그렇다면 <판>은 어떤가?
A. <판>은 기업형태를 띠고 있지만 기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공성을 단보한 활동가 단체라고도 규정지을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기업으로써 <판>은 새로운 틀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판>은 영리추구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말이 돈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기업을 운영하는 목적이 돈이 아니라는 거다. 만일 그냥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다 보면, 고용문제 단체비전부터 다 바뀌게 된다. 이게 위험한 지점인데, 그래서 나는 사회적 기업은 일반기업과 지향하는 목적이나 운영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업이 어설프게 일반 기업을 쫓아가려고 하다가는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오히려 사회적 기업은 공공성을 담보하고, 공공성을 선택할 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판>은 처음 시작할 때도 무에서 시작했다. 단지 생존을 위해, 단체 운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남을 생각은 없다. 단체가 잘못 가는 것 같다면 폐업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하는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한다. 보이는 건 있다. 사회적 기업을 하는데 있어서 어쨌든 정부정책이 굉장히 중요해서 정부정책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하고 있다.
Q. <판>은 내년에 사회적 기업 인증 된지 4년차가 된다고 들었다. 이제 내년부터 인권비 지원이 중단될 텐데, 이에 대해 어떠한 대책이 있나?
A. 우리도 지금 정부 지원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게 큰 고민꺼리인데, 때문에 올해 역점을 두고 있는 건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는 수익사업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지원금에서 독립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최대 목표다. 아직은 지원금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올해는 그래도 일차적인 기반을 만드는 것이 목표고, 내년에는 지원금이 다 끊기는데, 지원금이 끊기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교육부문을 중심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우처 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이다. 가령 우리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열 경우, 장애인 당사자들은 돈이 많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대신 장애인을 지원해주는 비용이 있을 거고, 우리는 교육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정부로부터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또는 학교나 임대 아파트 같은데 가서 문화예술 교육을 하면서 수익을 만들 수도 있다.
Q. 재정 독립이후에 <판>은 사회적 기업의 성격을 계속 유지하게 되나?
A. 자세한 건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지원기간이 끝나면 <판>은 비영리민간단체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적 기업이라는 건 해마다 정책들이 너무 많이 바뀌면서 일종의 실험대상 된다는 이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재정적 독립이 되면 사회적 기업 타이틀을 사용하더라도, 사회적 기업이 요구하는 틀을 그대로 맞춰갈 생각은 없다.
Q. 마지막 질문이다.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로써 사회적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나?
A. 나는 사회적 기업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기업형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가 책임져야할 공공의 영역을 사회적 기업 형태로 시장에 편입시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주의는 그렇게 하겠지만, 사회적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최대한 그렇게 따라가지 않는 게 의미 있을 것이다. 사실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을 수 있는 데가 다 비영리 민간단체거나 법인이다. 일반 기업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 단체이다. 따라서 단체가 처음에 설립했던 목적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버리는 순간 대안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그냥 모든 공공적인 성격들이 다 시장에 편입되고 모든 것들이 시장의 가치대로 평가되고, 또 살아남지 못하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걸 전제로 하면서, 장애인 복지를 두고 싸우듯이 사회적 기업도 이 공공성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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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결과, 사회적 기업 내부에는 일반 기업의 문화와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이는 미래의 이익창출에 야심을 갖고 있기보다 지금 현재의 공익적 목표창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활동가와 고용인의 공존으로 인해 조성되는 업무환경과 대표와 활동가/고용인 사이의 호칭의 혼재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포착 가능하다. 즉, 사회적 기업은 명확한 의미에서 활동가 단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기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민조직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되었음에도 단체 내부에 곧장 기업의 형식이 확산되거나, 특정한 주체로 주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로써 통치성 개념에 기반해서 가해지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에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사회적 기업이 신자유주의 통치 테크놀로지일지라도 그것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해볼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마냥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기업의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끊임없이 변질의 위협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업은 언제든 단체의 속성이 일반적인 기업의 문화로, 그리고 기업가적 주체로 주조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기업이 신자유주의적 통치 전략에 불과할 것인지, 아니면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회적 기업의 정부 지원금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고된 싸움에 의해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