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판’에 관하여

- 고손

이번 호는 덕성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한 학기동안 문화인류학 전공수업인 ‘생애과정의 인류학’에 참여했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매년 개설되는 강의지만 지난 2012학년도 2학기의 수업은 ‘특별하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는 것이 담당 교수와 학생들의 평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만나면, 인사는 하지 않더라도 서로 동지의식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서로 손잡고 같이 밥먹고 함께 행동하는 것도 연대겠지만, 이러한 모습도 하나의 연대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생애과정의 인류학’이라는 기존의 판이 어떻게 참여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변주되었는지는 학생들의 글에서 이야기되고 있으므로, 저는 이 ‘판’에 대해서만 짧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대학에서의 전공이란 적성의 문제보다도 어떠한 텍스트와 단어로 자신과 세계관을 구성하느냐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렇게 진득하게 앉아서 무엇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 주위의 경우, 문화인류학과 학생들은 대부분 경영이나 국제통상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합니다. 문화인류학이 취업시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주요 분야가 마케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문화인류학을 복수전공 혹은 부전공으로 선택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디자인, 사회복지, 철학, 스페인어 등 다양합니다. 이번 호에 실리는 글도 문화인류학과 학생이 아닌 타전공 학생들의 것입니다.

타전공 학생들과 교류하다보면 ‘문화인류학과’라는 영역 자체가 학교 그리고 시대의 대세와는 다른 방향에 놓인 하나의 판으로 여겨집니다. 문화인류학이 타과생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은 학문의 우월함따위가 아닙니다. 문화인류학’과’가 갖는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가 형성하는 하나의 ‘판’이 학교 밖, 스펙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학생들에게 합법적으로 자신의 타자성을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이기도 한-장소가 된 것이 중요 포인트입니다. 덧붙여 밖에서는 배척받는 이야기에 학문적 권위를 실어주는 문화인류학이라는 도구의 힘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수업을 ‘기꺼이’ 학생들에게 넘겨주는 교수님들-판 제작자-의 성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체적 스토리텔링은 결국 어떠한 환경이 ‘판(공동체라고 해도 좋고, 코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구성원들의 상상력을 촉진하고 증폭시키는지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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